소설_12. 연애

by 랑애

준영과의 연애는 이제 겨우 두어 달 남짓.

일 학년 때부터 친구 사이였으니 한번쯤 사귀어 보아도 나쁘지 않을 성품이라 생각했다.

친구로 지낼 때의 그는 이해심도 많았고, 매너도 좋았으며, 은근히 나와 코드도 잘 맞았다. 또 내게 엄청 잘해줬다.


내가 H와 사귀는 모습, 헤어지고 방황하던 모습, 그 후의 지질한 만신창이가 된 모습까지도 모두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 내게 위로주를 사주며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곤 했었다.


준영은 사실 신입생 시절부터 나를 좋아했다고 했다.

그래서 H와 헤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고. 그것도 아주 손꼽아서.


그 녀석 완전히 다 못 잊었어도 괜찮아. 나한테도 기회를 줘.


내가 널 많이 좋아하니까 다 상관 없어. 사람들이 하는 말 신경쓰지 마.


네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 옆에만 있어 줘. 진심이야.


뭐 이런식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연애.

한쪽으로 기운 시소처럼 불공평하게 시작된 사랑.

그래도 언젠간 수평이 맞춰질 줄 알았는데. 친구들은 내가 H를 만날 때와는 너무도 다른 태도라고 말했다.


아마, 난, 내가, 더 편하게, 내 멋대로 굴어도 괜찮을 거라는 못된 믿음을 갖고 있었는 지도.


그래서인지 사실 준영과는 연인이라는 느낌이 내겐 별로 없었다. 마냥 편한 친구 사이에서 조금 더 가까워진 친구와 연인의 중간 즈음. 어쩌면 우리가 아직 키스를 나눈 사이가 아니라서 인지도 모르겠다.


준영이 넌 쫀심도 없냐?
쟤가 이한수랑 어떻게 사귀는지 다 봤으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준영의 친구들은 나를 매우 싫어했다.




나는 할머니의 궁전 대문 앞에 노란 개나리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노란 원피스가 꽃과 맞춤으로 보였다.

딱히 노란색을 좋아하진 않지만 지금의 계절과 딱 어울리는 색이라 꺼내입었다.

사실은 오년 전 내 생일에 H가 선물로 사줬던 원피스.


너 혹시 그거 미련이니?


창문 속 원피스가 내게 말했다.


아니, 아니니까 입을 수 있지. 봐, 아무렇지 않잖아?


맞다.

괜히 머쓱하니까 드는 질문이었다.

오늘은 그냥 이 원피스가 입고 싶었다.

할머니의 궁전에서 정기적 전시회가 있는 날이기도 했고, 완연한 봄날을 느낄 수 있는 날씨기도 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이 옷을 헌옷 분리수거함에 넣으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원피스가 너무도 깨끗했다. 중고 물품을 거래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볼까도 생각했지만 왠지 H가 알게 된다면 창피할 것 같았다.


선물해 준 원피스를 중고품으로 팔아 차액을 남기는 여자라니.


H가 알게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그냥 옷장 구석에 처박아뒀었다. 그리고 다시 이 원피스를 꺼내입은 것이다. 그러니까 오 년 전 생일날 딱 한 번 입고 오늘이 딱 두 번째 착용.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은 영락없이 봄바람 난 처녀였다. 이 차림새로는 준영을 만나러 갔어야 했나.


H가 지금 날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자기가 사준 원피스를 기억이나 할까?


에이, 아무래도 괜히 입었다 싶다. 내가 언제부터 환경을 생각했고, 헤어진 남자에게 내 이미지를 걱정했다고. 나는 오늘 이 원피스를 입지 말았어야 했다. 집에 가면 돌돌 말아 헌옷 분리수거함에 기필코 넣으리라.


차라리 한번 쯤 마주치기나 했으면 좋겠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H와의 이별이 서글퍼졌다.

나는 그와 영문도 모르고 헤어졌으니까.

원피스 치마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얼른 할머니의 궁전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서둘러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고요했다.

다시 한 번.


딩동.


역시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복잡해진 지금 내 마음처럼 녀석도 고장이 난 걸까.

손으로 살포시 대문을 열어보니 웬일로 문이 열려 있었다.

혼자 사는 할머니의 집에 불청객이라도 온 걸까. 전시회가 시작되려면 아직 꽤 이른 시간인데.

갑자기 걸음이 빨라졌다.

시계 바늘은 오전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불청객이 아니라면 아마 할머니는 분주하게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초인종 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불청객은 없었다.

현관 입구에는 이미 손님맞이를 할 준비가 모두 끝나 있었다.

신발장 앞에는 나무로 만든 예쁜 의자가 나를 맞이했다.

의자 위에는 어린 천사의 조각상이 놓여 있었고, 어린 천사는 '환영합니다'라는 팻말을 든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 팻말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다가 또다시 그 그림과 마주쳤다.


이 태석 화백의 <귀>


여전히 마뜩찮은 그림이다.

할머니는 아직도 이 그림을 떼지 않았다니. 아무래도 오늘 회원들에게 이 그림을 소개할 작정인가 보다.


일전에 나는 화백에 관해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일이 있다.


이태석. 1928년생. 1950년대 주로 활동했지만 알려진 그림이 거의 없는 화가.

전쟁 직 후 한 남녀의 죽음을 세 그림으로 나누어 그려서 '연작화가'라는 별칭을 얻었으나, 그림과 함께 행방이 묘연해졌음. 나그네처럼 떠돌며 그림을 그려주고 받은 돈으로 연명하였는데, 어느 겨울 술에 취해 객사한 채로 발견됨. 일각에서는 그의 그림이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으며 액수 또한 상당할 것으로 추정되나, 공식적으로는 확인된 바 없음.


나는 내 눈앞에 걸려 있는 <귀> 말고도 다른 그림들이 궁금했다. 혹여나 지도교수는 그것들에 대해 더 알고 있을 수 있겠지만, 궁금해하지 않기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귀>의 귓바퀴는 여전히 현기증이 일었다. 내 귓바퀴도 물결처럼 울렁거리는 듯 했다.


손에 든 빵과 케이크, 꽃다발을 놓기 위해 얼른 주방으로 갔다.

케이크는 오늘 새로 뽑힐 총무를 위한 축하용이었고, 빵은 늘 그렇듯 할머니와 따로 먹으려고 산 베이글이었다. 전시회 준비를 하며 우리는 늘 가볍게 커피타임을 갖곤 했다. 베이글에 할머니가 직접 만든 블루베리 잼을 발라 먹으면 환상적인 맛이다.


할머니.


나는 할머니를 부르며 보조 식탁 위에 케이크과 베이글을 올려놓았다.

어쩐지 할머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꽃집에 들르느라 늦어서 할머니가 많이 분주한 걸까. 우선 꽃을 꽂아둘 화병부터 찾기로 했다. 허리를 숙여 수납장을 여는데, 작은 방에서 소곤대는 말소리가 났다.


올 때 됐어요. 나중에 해요, 나중에.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나는 별 생각없이 할머니의 목소리를 따라 작은 방으로 갔다.

하지만 다음 말소리에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이리 와 봐요.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이 참. 간지럽대두. 어머어머. 홍홍홍.


할머니는 간드러지게 웃고 있었다.

평소 대장부 같은 성격이라 생각했던 할머니의 처음 듣는 어조였다.

나는 재빨리 문 앞에 벽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을 훔쳐보는 꼴이 되어버렸다.

목소리의 진원지는 작은방 안 간이옷장이었다. 옷장 안 남녀의 실루엣은 한껏 뒤엉켜있었다.

화끈거렸다. 나는 너무 놀라 손에 들고 있던 꽃을 떨어뜨릴 뻔 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입을 가리다가 옷장 안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예상대로 최 화백이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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