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달다

'목요일'

by 김민관

오렌지 달다 1


두 남자가 악수를 한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났는지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곧 서점 내부를 걷기 시작했다.

‘근데 뭐야’

‘왜’

‘그거’

먼저 와 있던 남자가 자신이 들고있던 책 표지를 쳐다본다.

‘과일들의 당분’ 이란 제목의 자연도감.

그는 그중 오렌지의 당분이라는 페이지를 펴고 있다.

친구가 웃는다.

뭘 그런 재미없는 책을 보고 있냐.

그러자 남자는 그럼 재미있는 책이 뭔데 라고 되묻고는

또 한번 친구와 히히덕 거린다.

그리고 자연 코너로 걸어가서 들고있던 책을 꽂아 넣는다.

그가 말한다.

‘서점에 책을 보러 온게 아니라

아무책이나 보고 있었던거야‘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고 실용이라고 적힌 코너로 걸어갔다.

남자가 그를 따르며 묻는다.

‘넌 보려는 책이 있어?’

‘당연히 있지 넌 그럼 책방에 왜 온거야’

‘사람 보러와’

‘그럴거면 길에서 보지 왜 책방에 기어들어와’

남자가 말한다.

‘길거리는 혼잡하고 책방은 조용하잖아

근데 실은 내가 책방에 책을 보러 오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어‘

‘뭔데’

‘책 보면 어지러워’

남자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눈을 주무른다.

‘또 그러네 역시 책방에 오면 어지러워’

친구가 남자를 빤히 쳐다본다.

그가 말한다.

‘있잖아 내가 왜 이런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 텔레파시라는거 있잖아

책이란게 결국 수많은 작가들의 생각이 투영된 작품이니까

어쩌면 이 책방에선 그 텔레파시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게 아닌가하는 말이야‘

남자가 이어 말한다.

‘그래서 어지러운 거야 생각해봐 여기 책방에

책이 도대체 얼마나 많아

그러니 작가들 머릿속에 있던게

다 쏟아져 나오는 공간이라면 당연히 어지럽지 않겠어‘

대답을 기다린다.

하지만 친구는 자신은 전혀 아니라는 표시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있다.


오렌지 달다 2


‘고뤠?’

가족들이 방바닥을 구른다.

아버지는 무릎을 탕탕치고 어머니는 이불위로 넘어지고

청년은 숨쉬기가 힘든듯 배를 움켜잡았다.

너무나 웃긴 개그 프로.

이 가족은 항상 일요일이면 안방에 모여 개그프로를 시청한다.

가족들은 그 중 먹성 좋게 생긴 개그맨을 제일 좋아한다.

고뤠를 외치면서 자신의 뚱뚱한 뱃살을 무기로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개그맨.

청년은 마침 들고있던 오렌지를 한입 베어먹었다.

얼굴이 찌푸려진다.

‘셔?’

아버지가 말했다

‘네 셔도 너무 셔요’

청년은 으레 또 다른 개그맨의 유행어를 따라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접시에 놓여있던 오렌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한 움큼 오렌지를 문다.

‘달기만 하고만’

‘달다고요?’

청년이 다시 오렌지를 집어들었다.

또 한번 얼굴이 찡그려진다.

‘시잖아요 그냥 신게 아니라 너무 시다니까요’

아버지가 청년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오렌지가 시다고?’

‘당연히 오렌지가 시죠’

‘아니야 오렌지가 모두 신건 아니야’

‘무슨 말씀이세요’

‘오렌지가 다 신게 아니라니까’

‘그럼 오렌지가 달아요?’

‘단 것도 있어 너가 단 오렌지를 못 먹어봤구나’

청년이 아버지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이불에 엎어져 웃고있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동조를 구하는 눈빛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둘의 대화에 관심이 없다.

얼마후 개그프로가 끝나고 청년이 방에 돌아와 과제 정리를 했다.

그리고 입이 심심해 냉장고를 찾았다.

냉장고 안에 오렌지 쥬스가 있다.

어제 먹다 남은 과자와 오렌지 쥬스.

그것들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온 청년은

봉지를 활짝펴 그 위에 과자를 널부려뜨리고

오렌지 쥬스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달다.

오렌지 쥬스가 너무 달다.

가만 생각해보니 오렌지 쥬스는 전혀 신맛이 아니다.

신맛은 아예 나지도 않는다.

그는 첨가제를 탄 것이 아닌가 해서 쥬스 몸통을 살펴보니

역시 단맛을 내는 재료들이 대거 포함 되어 있다.

그럼 그렇지.

하지만 이내 뭔가 찝찝하다.

청년은 이때까지 오렌지 쥬스를 달다고 생각해본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오렌지는 신 과일이므로 오렌지 쥬스도 당연히 신 쥬스라고 생각했다.

일종의 고정관념이다.

청년은 다시 컵에 쥬스를 따랐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렌지 쥬스가 맵다는 상상을 하며 한 컵을 들이켰다.

맵다. 맵다.

그러나 역시 오렌지 쥬스는 달다.

억지로 매운 표정을 지어보아도 입안은 달콤하기만 하다.

다시 컵에 쥬스를 따른다.

이번에는 쓰다는 생각을 하며 쥬스를 마신다.

그러나 마찬가지다.

오렌지 쥬스는 달다.

아무리 인상을 쓰고 쓰다는 표정을 지어보아도

입안에선 달콤한 향내만 가득히 퍼져 돌아다닐 뿐이다.

그런데 따지고보니 그렇다.

대체 신 표정과 매운 표정과 쓴 표정은 차이가 뭐지?

결국엔 모두 찌푸리고 있을 뿐이잖아.

잉?


오렌지 달다 3


오렌지가 달콤하게 익는다.

과수원에 햇볕이 알맞게 내리쬐고 있다.

한참 가위로 오렌지 줄기를 따고 있던 어머니는

이제 일이 다 끝났으니 가서 소 여물을 주라고

딸에게 소리를 친다.

그러자 반대편에 있던 딸이 들고있던 가위를 내려놓고

장갑을 바닥에 벗어던졌다.

천천히 과수원을 벗어나

스무발짝쯤 떨어져있는 뒤쪽의 외양간으로 엉기적 걸음을 옮긴다.

소가 다가오는 그녀를 멀뚱히 쳐다본다.

딸은 외양간 옆에 있던 수레를 끌어

귀찮은듯 건들건들 소 여물을 넣어주다가

소가 있는 외양간의 불이 나간것을 발견했다.

외양간이 어둡다.

사실 지금은 낮이라 상관이 없지만

저대로 나두면 어두울때는 가축이 보이지 않아 여러모로 애를 먹게 될 것이다.

딸은 머리를 긁적이며

수레를 내려놓고 다시 근처에 있던 창고로 건너가 전구를 찾았다.

그러나 여러개의 전구알을 모두 교체해봐도 하나같이 필라멘트가 고장난 것들 뿐이다.

딸이 멀뚱히 소를 쳐다봤다.

소도 멀뚱히 딸을 쳐다본다.

정말 한가로운 모양새로 소 팔자가 상 팔자라는걸 확인시켜주는 순간이다.

딸은 가만히 서 있다가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하여 다시 건들건들 비닐하우스로 건너가

어머니가 수확해놓은 오렌지중 하나를 성큼 집어들었다.

그리곤 소가 있는 외양간으로 건너가 노란 전구 대신 오렌지를 깊숙이 꽂아 넣었다.

바로 전구를 꽂아넣어야 할 자리에 말이다.

다음날이 됐다.

아침이면 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깨어나야할 그녀가

오늘은 웬걸 어머니의 고함소리를 듣고 잠에서 화들짝 깼다.

아버지가 무슨일이 났는가 하고 안방에서 헐레벌떡 뛰쳐나간다.

딸이 옆방에 누워 가만히 미소를 짓는다.


오렌지 달다 4


아버지가 양치를 하고 화장실에서 나온다.

청년은 동동거리며 참았던 소변을 시원하게 보고

칫솔에 치약을 짜 양치를 한다.

그리고 전구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샛노란 불빛.

그런데 어째 저 샛노란 불빛이 마치 오렌지를 닮은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렌지의 맛이 쓴 건지 매운 건지 신 건지 단 건지

이젠 그닥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이 과일이 이미지가 머릿속에 침투한 것이다.

결국 잠시 골똘히 전구를 쳐다보던 청년은

마침내 오렌지가 저 전구 대신 달려있다면 어떤 모양일까 하는 상상을 했다.

웃음이 난다.

하하 정말 웃기겠는데.

꽤 닮기도 했고.

그래 나름 신선한 생각이다.

만약 오렌지가 전구대신 달려있다면

세수를 하다가 배가 고플때 오렌지를 따서 먹을수도 있을테니까.

웃음이 터진다.

혹시 개그맨들은 이런식으로 코미디를 만드는 걸까.

고정관념이 깨질때는 언제나 웃음이 생긴다.

뚱뚱한 것은 수치스럽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버린 개그.

가족들이 좋아하는 그 뚱보 개그맨은

자신의 뱃살을 드러내며

배가 나온것은 수치스럽다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청년이 양치를 마치고 화장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후로는 오렌지에 대한 생각을 다시는 떠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일이 생겼다.

그가 화장실에 서서 잠깐동안 했던 바로 그 생각이

청년의 순간적으로 강한 뇌활동에 영향을 받아

세면대에 똑하고 떨어져버린 것이다.

하여 물과 함께 주르르 흘러내린 후

화장실의 하수구를 타고 무수히 많은 쇠파이프들을 거쳐

어느 공공 배수관에 떡 하니 안착해버린 후

다시 시간이 흘러

이어지는 시원한 물줄기를 타고 한적한 시골마을까지 꾸역꾸역 찾아가더니

한 처녀의 머릿속에 불쑥 침투해버린 것이다.

실로 놀라운 일이지만 이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해서 오랫동안의 전원생활로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처녀의 얼굴에

단 한번의 웃음꽃을 피우게 한 것이다.

언제나 일탈을 꿈꾸던 그녀.

어머니가 일을 시키면 군소리 못하고 마냥 따르기만 하던 딸에게는

청년이 생각이 너무나 재미있고 기발했기에.

그녀는 오렌지의 맛을 그날부터 그렇게 기억했다.

오렌지는 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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