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1
창수는 떠올렸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왜 들어왔지?
멍하니 형광등을 지켜본다.
조용히 킥킥대고 있는 창수앞의 아이들.
그는 모른체한다.
지금은 자율학습 중.
처음에 그는 여자 고등학교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조건 설레고 좋았다.
여고의 체육 선생님이라니.
남자로 태어나 이런 로망이 또 있을까 싶었다.
왜 드라마에서도 남자 선생이 여자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일어나는
가슴 떨리는 이야기들이 널려 있으니까 말이다.
여하튼 그런 환상을 갖고 들어온 학교이지만
실상 대한민국의 실제 여자 고등학교란
창수의 환상과는 전혀 달랐다.
입시지옥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아이들.
학생들은 주위에 남자가 없으니
여자로서 보일수 있는 볼 꼴과 못 볼 꼴들을 모두 보이며 지냈다.
해서 이제 창수에겐 여학교에서 느낄수 있는 남자교사의
야릇한 환타지가 일말의 먼지만큼도 남아있지가 않다.
형광등을 다시 본다.
등이 살짝 깜빡인다.
그 바람에 창수도 정신이 돌아왔다.
벨이 울린다.
아이들은 왁자지껄 복도로 달아나고
창수는 다시 교무실로 돌아왔다.
책상에 놓여있는 달력을 확인한다.
대회가 코앞이다.
약속 2
‘패스’
‘아니야 너무 빠르잖아’
‘영미 교체’
창수의 목에 핏대가 섰다.
얘들이 도대체 맥아리가 없다.
어쩐일인지 교사인 창수 혼자만 열을 내고 있다.
럭비가 하기 싫은건가.
벤치에 돌아온 영미를 쳐다본다.
땀 범벅인 얼굴.
그래도 주장인 영미는 열심히 한다.
하지만 나머지 아이들이 영 아니다.
‘타임’
창수가 외쳤다.
목이 찢어질것 같다.
속속 벤치에 들어온 혜선이와 다민이 그리고 나머지 럭비부 멤버들.
아이들은 창수의 눈길을 따라 기다란 벤치에 쭈르르 앉았다.
‘뭔일 있냐’
아이들이 그를 바라본다.
그건 마치 창수가 오래된 형광등을 바라보는
바로 그 표정같다.
‘내 얼굴에 뭐 묻었냐? 대답이 없어’
‘없는데요’
‘근데 왜 그래 다다음주에 대회인거 몰라’
‘알아요’
‘김영미 얘네 왜 그러냐’
영미는 대답이 없다.
‘너도 입이 붙었냐’
‘잘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안 하는거랑 못하는 거랑은 보면 알아.
선생님이 보기에 너네는 분명 제대로 안 하는것처럼 보이는데
맞냐 틀리냐‘
아이들이 또 대답이 없다.
창수가 한숨을 쉰다.
‘쉬어라’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들 얼굴에 화색이 돌아온다.
어지간히 운동이 하기 싫었던 모양이다.
그럴꺼면 대체 왜 럭비부에 들어온건지...
‘영미는 나 좀 보자’
영미가 창수를 따른다.
어느 정도 아이들과 거리를 두고나서 창수가 자리에 앉는다.
영미도 따라 앉는다.
‘무슨 일 있니’
‘글쎄요 조금 지친것 같습니다’
‘지쳤다고? 나 원 다른 애들도 아니고 럭비부 애들이 지쳐?’
‘그게 아니고요 의욕이 없는것 같아요,
실은 저희 럭비부가 그다지 실력이 좋은것도 아니고
이제 고3이라 그런지 다들 앞으로의 진로를 걱정스러워 해요‘
‘운동부 애들이 별 걱정을 다하네. 너희들은 체육 특기로
대학교 다 들어갈수 있어. 근데 왜 그래‘
‘선생님 솔직히 그 운동부란 말도 듣기 싫어하는 애들이 있어요.
저처럼 럭비가 좋아서 들어온 아이들이 아니면
여자애치고 누가 그런 말 좋아하겠어요‘
‘난 그런 의도로 얘기한게 아닌데 기분 나쁘면 미안해’
‘괜찮아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냐 선생님은 솔직히 말해서
여자애들 속을 모르겠다 아무리 럭비부 애들이라곤 해도 여자는 여자니까‘
‘저도 모르겠어요 지금 이 상황에서는
있는 애들이 그만두지 않는것도 다행인것 같은데요‘
‘아무튼 알았다. 그건 그렇고 영미 패스 많이 늘었더라’
‘감사합니다’
창수가 고개짓을 하자 영미가 아이들 사이로 돌아간다.
그리고 떠들썩한 아이들 틈에서 다시 미소가 돌아온다.
하긴 주장 완장을 차고 있을뿐,
영미도 여자애들 사이에서는 영락없는 소녀일 뿐이기 때문이다.
창수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여고에 들어온 순간부터 생긴 버릇이다.
도대체 이해가 안가는 여학교의 수백가지 풍경들.
언젠가부터 창수는 그를 부러워하는
친구들에게 이런말을 해준다.
‘여학교의 판타지?! 그거 모두 환상일 뿐이야 이놈들아’
약속 3
‘연락 안 돼?’
‘응 안되는데’
혜선이 영미를 다그친다.
덩치가 산만해서 윽박지르는건 언제나 혜선이 몫이다.
다민이가 혜선을 달랜다.
‘기다려보자 약속은 어기신 적 없잖아’
아직 10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혜선이는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답답해하기는 나머지 멤버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체육 선생님이 나타나지 않는것에 대해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창수는 일주일전 영미를 시켜 아이들과 전지훈련을 가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말이 전지훈련이지,
그 뜻은 이른바 놀러가자는 말이다.
운동하느라 그동안 힘들었을테니
이번에는 너희끼리 마음껏 하루를 만끽하라는 창수의 뒷이야기가 있었다.
이미 교장선생님께 허락도 받았단다.
그러나 너희들은 아직 미성년자니
부모님 동의서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 선생님 창수의 유일한 조건이였다.
아이들은 모두 찬성했다.
영미와 혜선이 그리고 다민이도 부모님 동의서를 끊어 창수에게 제출했다.
그리고 당일 창수가 부른 장소로 모두 함께 모인 것이다.
‘다시 해봐’
혜선이 영미를 부추겼다.
영미가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꾹 꾹 누른다.
하지만 전원이 꺼져있다는 소리만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내가 이럴줄 알았어 그럼 그렇지 놀러가기는 개뿔 럭비부가 그런게 어딨냐’
항상 창수에게 불만이 많았던 혜선이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멤버들은 아직까지 참을만한 눈치다.
다민이가 말한다.
‘그냥 돌아갈까 삼십분이나 지났는데 또 여긴 우리가 놀만한 것도 없고’
영미가 주변을 둘러본다.
온통 나무가 가득한 곳에 덩그러니 낚시터 하나가 놓여있다.
아저씨들 몇 명이 두런거린다.
‘왜 낚시터에 모이라고 했을까’
영미가 혼잣말을 한다.
그러나 혜선은 이미 아이들을 모아 돌아가려는 행동을 취하고 있다.
‘기다려봐’
‘뭘 기다려 삼십분이나 지났잖아’
‘말 들어’
‘됐어 난 갈거야 모처럼 쉬는날인데 이게 뭐야 열받게’
‘야!’
영미가 외친다.
혜선이 벙쪄서 그녀를 쳐다봤다.
영미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 들으라고’
‘알았어 그렇다고 울건 없잖아’
영미가 무슨 이유에선지 한참동안 흐느낀다.
다민이와 나머지 아이들이 다가와 영미를 달랬다.
혜선도 밍기적거리며 다가온다.
영미가 말한다.
‘오늘 반드시 오실거라고 했단 말이야 나도 지금 화가 나
그래도 선생님이 지금까지 약속 어긴적 없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아이들이 모처럼 자리를 잡고 선다.
주장 영미를 위시해 뺑그르르 원을 둘렀다.
럭비부가 구호를 외치거나 작전을 세울때 취하는 동작이다.
잠시후 영미가 뭔가 결심한듯 말한다.
‘얘들아 그냥 우리끼리 놀래?
선생님도 오늘만은 자유라고 했고 그러니까 뭘 하면서든 놀면 되지 않을까.
마침 옆에 낚시터도 있고‘
영미가 말을 하고 낚시터를 바라봤다.
하지만 솔직히 저기서 뭘 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녀는 가끔 체육 선생님의 멍한눈을 보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의아할때가 있었는데
이제야 그 눈빛이 이해가 간다.
그 표정은 너무 낯설어서 이해가 안되는 것을 바라볼때 짓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건 그렇고 도대체 이곳은 무엇을 하는 장소일까.
남자들의 여가생활.
낚시터.
영미는 럭비부 아이들을 끌고 우르르 낚시터로 내려갔다.
안에서는 단체손님의 출현에 놀라 아저씨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자들이 뭘 먹고 저렇게 자랐지.
그들은 그녀들의 팔뚝을 보고 놀란 눈치다.
영미가 돈을 내고 낚시터 한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낚시터 사장님의 도움을 받아 낚시를 시작한다.
살면서 한번도 해본적이 없다.
그러나 승부욕만큼은 누구보다 앞선 영미다.
얼마후 몇 번의 미스 끝에 한 마리의 물고기가 성큼 잡혀 올라왔다.
멤버들이 환호한다.
약속 4
창수가 머리를 긁적인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표정.
아이들은 뾰루퉁해 있었지만
화가 난것 같지는 않다.
‘미안하다 늦잠을 잤다’
영미가 창수의 말을 듣고 입술을 왼쪽으로 힘껏 비틀었다.
‘음 영미야 하도 오래보니 알겠다 거짓말 말라는 거지?’
그녀가 놀란다.
‘알았다 알았어 실은 말이다 선생님이 거짓말 했다,
믿어줄까 모르겠지만... 어제 선생님도 낚시터에 갔었다‘
혜선이 팔짱을 낀다.
창수가 눈을 번쩍 떴다.
‘또 알아보겠다 혜선아 네 그 두꺼운 팔로 내 머리를 후려치고 싶다는 뜻이지?’
혜선이 깜짝 놀라 팔을 황급히 풀었다.
‘내가 여학교 체육교사 생활을 하는동안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것 투성이였는데
삼년째 되니까 이제 알아먹겠다.
너네들은 참 다양한 수단으로 말을 하는구나
인석들아 그냥 말로 해 욕을 하던지‘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다.
이럴때 보면 마냥 어린애들이다.
창수가 말한다.
‘나 알던 사람 중 한명이 옛날에 택시운전수를 했다’
이번에는 다민이가 귀를 만지작 거린다.
‘듣기 싫다고?’
그러자 다민이가 한술 더 떠 고개를 심하게 끄덕거린다.
창수가 웃는다.
‘그래 잘했다 그렇게 솔직하게 표현하라는 거야
하지만 들어봐 이것도 간접경험인데 운동부라고 해서
들어도 손해볼건 없잖냐‘
아이들이 창수를 바라본다.
‘아무튼 하루는 그 택시 운전수랑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어.
한데 그 사람이 대화도중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
선생님 택시 운전수가 돈을 많이 벌거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대뜸 기본료가 그렇게 비싸니까 당연히 많이 벌거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지.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거야.
실제로는 택시 운전수에 따라 많이 벌고 적게 버는건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거지.
오늘 장사를 시작해서 자신이 어디에 정차해야 하고
또 어느곳에 사람이 많이 몰리고
장거리 손님은 어느곳에서 태울수가 있는가하는
이런 돈을 벌수 있는 노하우들은
순전히 택시기사 스스로가 체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다.
마냥 어줍잖은 자세로 택시운전을 시작했다간
하루종일 돈 한푼을 못 벌때도 있다는거지.
단 한푼도.
놀랍지 않냐?
그리고 더 재미있는 건 택시기사가 그런 노력을 기울여
간신히 사람 한명을 태웠을때 쓰는 표현이였다.
기사들은 그것을 ‘물었다’ 고 표현한다지‘
아이들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지? 너네들이 어제 하고 온 낚시와 통하는 점이 있지 않냐?
낚시라는 것도 택시랑 비슷해서
물고기가 낚일때까지 앉아있어야 하잖아.
하지만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은 물고기를 대량으로 방생해놓은
그 허섭한 낚시터에서도 단 한 마리도 낚아올리지 못할때가 있다.
어제 제일 많이 잡은 사람이 누구냐‘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영미를 가리킨다.
‘영미는 럭비부 중에서도 가장 노력을 많이해.
너네도 인정하지?‘
침묵이 흘렀다.
‘이제 너희도 고 3이고 운동부로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왔다.
선생님은 지난주 동안 그 부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는데
너희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참 고민이 많을것 같고 충분히 공감이 된다.
그래서 운동에 집중하기도 힘들거라는 게 이해되고.
하지만 선생님이 말하고 싶은게 있어.
설사 다른 누군가 그런 너희를 이해하고 위로를 해준다고 해도
그 사람이 너희 미래까지 미리 약속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이란다.
럭비공의 모양을 보면 다른 공과 다르지.
이건 정말 예상할수가 없는 스포츠야.
이리 튈지 저리 튈지 도무지 알수가 없으니까.
말하자면 각본없는 드라마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스포츠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을
유난히 집중해서 바라봐야만 이길수 있는 스포츠다.
그건 낚시도 마찬가지고.
너희 인생도 마찬가지야
선생님은 너희들이
어제처럼 아무것도 약속된것이 없는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뭔가를 해냈으면 싶었다.
원래 선생님 별명이 성 따서 김약속인데
너희들을 위해 생전 처음으로 일부러 약속을 어긴거야‘
아이들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창수는 이번에는 저 표정이 뭔지를 구분할수 있을것 같았다.
천장을 쳐다보고 멍한 표정을 지을때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이지만
창수의 눈을 보고 저런 표정을 지을때는
뭔가 하나쯤은 진지한 생각을 해보고 있다는 뜻이다.
약속 5
시합이 시작된다.
상대 진영에서 던진공이 날아와 흙 바닥에 송곳처럼 내리꽂힌다.
그러자 공이 날아온 곳과 반대로 튀고
그 공을 곁에있던 영미가 잽싸게 잡았다.
그리고 있는힘껏 상대편 진영에 들어서
바닥을 향해 럭비공을 힘껏 찍는다.
심판이 손을 들어 창수팀 쪽에 점수를 외친다.
멤버들이 환호한다.
잠시후 다시 수비 진영으로 돌아온 영미는
팀을 향해 다음 작전을 알렸다.
혜선이 육중한 몸을 흔들며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다민도 손목을 풀었다.
다시 한번 숨막히는 경기가 시작된다.
이 모습을 누군가 흐뭇하게 바라본다.
바로 상대편의 여자 코치다.
그녀는 한참동안 경기를 바라보다
어디선가 들리는 코고는 소리에 놀라 옆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상대팀 코치가 벤치에 뻗어 자고 있다.
그건 바로 창수다.
그녀는 코치를 시작하고 이런 경우를 본적이 없어
피식하고 웃음이 터뜨렸는데.
창수는 잠결에 그 소리를 들은건지
대꾸를 하듯 껄껄 웃음소리를 냈다.
그녀가 배를 잡고 웃는다.
바로 이때
우리의 체육교사 창수는 꿈을 꾸고 있었다.
며칠전
자신이 한 거짓말에 완벽히 속아넘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꿈을 말이다.
사실 창수는 그날 정말로 늦잠을 잤다.
해서 허겁지겁 그럴듯한 말을 준비해
아이들을 감동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학창시절 이후로 해보지도 않던
기나긴 대사를 암기해야만 했다.
그런데 왠일로 이게 효과가 있었다.
아이들은 창수의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전에 없던 의욕이 생긴듯 활력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던가.
창수는 바로 이 일에 대한 꿈을 꾸고 있다.
꿈은 어느덧 아이들이 호흡을 맞춰 상대편 진영에
연달아 골을 성공시키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곧 창수팀 럭비부가 승리해
여자아이들이 창수를 공중으로 헹가래 시켜 주기 시작한다.
창수가 눈물을 흘린다.
이런 뭉클한 감정은 교사가 된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학교에 들어와 처음으로 만끽하는 판타지.
바로 학생들이 선생님을 헹가래시켜주는 자랑스러운 판타지다.
물론 이 모습을 보고 있는 상대편의 여자코치는
이미 실신할 지경이 되어 포복절도 하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