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터

by 김민관

휴머니터 1


오래도록 입었던 내복을 벗는다.

바람이 살갗에 바로 닿았다.

핸드폰으로 날씨를 확인하니

계절이 봄으로 들어섰지만 바람은 아직 추울거란다.

구름은 맑다.

하늘이 보이는 창 바로 밑에 컴퓨터가 있다.

난 컴퓨터가 꼭 난로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추울때 모니터를 보고 있으면 따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외로울때도 인터넷의 각종 소식으로 인해

심심할 틈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메일과 이런저런 가십거리를 확인하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었다.

그때 컴퓨터가 동작을 멈춘다.

본체를 살펴보니 오래된 CPU 쿨러가

연속해서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다.

분해하여 먼지를 털고 다시 작동시켜 보아도

이제는 쿨러가 너무 오래된 탓인지 계속해 멈춤을 반복한다.

용산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고급 컴퓨터가 만연에 대중화된 지금

난 여전히 몇 가지의 부품만을 사용해

컴퓨터를 업그레이드 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참에 적은 가격의 컴퓨터를 장만하는것도

나쁘진 않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또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복을 벗어 그런건지

아니면 그냥 마음이 허전해서인지

오늘따라 쓸쓸한 이 기분을 전환하고 싶다고 말이다.


휴머니터 2


용산은 정말 오랜만이다.

전자랜드로 들어가는 입구 초입에는

벌써 잡화를 파는 상인들로 가득했다.

난 가격이 싼 가게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가

마침내 구석진 장소까지 들어오게됐다.

이곳은 내가 컴퓨터 부품을 살 때 매번 들리는 단골가게인데

가격경쟁이 심한 이 용산에서

그래도 양심적으로 장사를 하는 몇 안되는 곳이다.

컴퓨터가 얼마나 하냐는 물음에

사장이 가격을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금만 더 둘러보고 오겠다고 말했다.

다시 장소를 옮긴다.

사실 아무리 믿을만한 가게라도

용산에서는 최대한 많이 훑어보아야 한다.

이곳이 싸구나 싶어 물건을 구입 했다가도

돌아가는 길이면

더 싼곳을 찾게되는 곳이 바로 용산이란 곳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영상이 삐까번쩍거린다.

불과 어렸을때부터 10여년의 세월이 흘렀을 뿐이지만

그 동안 컴퓨터 시장은 크게 변했다.

2인치 플로피 디스크는 씨디롬으로

또 본체 자체가 필요없어진 태블릿 피시들.

대용량을 간단히 넣고 뺄수 있는 초소형 유에스비까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수없던 일들이

이제는 엄연한 현실이 되어있다.

그런데 발 아래 디스켓 하나가 떨어졌다.

플로피 디스크.

난 너무 오래된 모델이라 그것을 전시용 모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주은 디스크를 건네받은

남자는 그 디스크를 구형 컴퓨터에 집어넣는다.

그러고나자 난 내가 어느덧 이상한 곳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이제까지 보았던 삐까번쩍한 컴퓨터 코너들이 아니라

십여년전쯤 내가 사용하고 보았던

구식 컴퓨터 기계들이 가득 모여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사장은 곧이어 끼워넣었던 디스크를

빼고 또 다른 디스크를 꽂아넣는다.

그러자 소형 브라운관 모니터 안에서

독특한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휴머니터 3


테트리스.

사람 키만한 스피커에서는 단조로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나는 재생되는 그 영상을 바라보다가 다시 주변을 바라봤다.

분명 낯 익은 통로이기는 한데

모여져 있는 컴퓨터들이 죄다 구식이다.

사장은 계속 모니터를 바라본다.

‘뭐 필요한거 있으세요’

그가 쳐다보지도 않고 묻는다.

나는 가격이 싼 컴퓨터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컴퓨터의 가격을 일러준다.

엄청난 가격.

그는 무려 십여년전의 고급 컴퓨터 가격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너무 비싸다고 말하자 주인은 에누리는 없다고

잘라말하곤 다시 컴퓨터를 바라봤다.

재차 팔려는 컴퓨터가 무엇이냐고 묻자

사장은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컴퓨터라고 말한다.

그리고 확인해보겠냐며 내게 모니터를 보여준다.

마침 뒤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가게 사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금방 식사를 하고 돌아오겠다며

배를 움켜쥐고 자리를 나섰다.

나 참, 장사를 할 생각이 있는건가.

황당한 상황에 웃음이 났지만

난 덕분에 아까부터 궁금했던

상점들의 물건을 가까이서 들여다볼수 있었다.

그런데 마우스 하나가 바닥에 나뒹군다.

포장도 되어있지 않은 그 마우스는

먼지를 뒤짚어쓰고 있었는데

손으로 그것을 만지자

표면이 물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탓인가 하고 마우스를 놓으려는데

이미 그것은 액체처럼 흐물흐물해져서

내 손을 휘감아버리기 시작했다.

손을 급히 빼내려해도

강력본드에 붙여진듯 절대 떨어지지가 않는다.

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빼낼 도구를 찾는데

무심코 올려다본 모니터 위에 글자가 적혀있다.

팔을 비틀어 모니터를 확인하니 거기에 작은 글씨가 보인다.

‘손 마사지를 해드릴까요’

그리고 아래에 YES OR NO 라는 영어가 적혀있다.

키보드를 찾아 Y를 눌렀다.

그러자 손을 움켜쥐고 있던 액체 마우스가

서서히 내 손을 조물락거린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한편 손가락의 피로가 풀리는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침부터 허전했던 기분이 점차 나아진다.

이건 내가 그리워했던 무언가다.

바로 사람의 체온.

따스한 어루만짐.

현대의 컴퓨터는 도저히 채워줄수 없는 사람만의 그것이다.


휴머니터 4


참 기묘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나는 오래된 그 컴퓨터 가게 바닥에 앉아서

모니터를 등지고 통로쪽을 바라보고 있다.

오랫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한번 손을 마우스에서 빼내려했다.

그러자 스피커에서 작은 컴퓨터 음이 들린다.

‘안녕하십니까 휴머니터 세계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자 우선 환영의 악수‘

마우스가 거세게 흔들린다.

내 손이 강제적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잠깐만요 손님 주인없죠? 혹시 곁에 주인 있어요?’

스피커의 음이 잔뜩 줄어서 마치 사람이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나에게 묻는건지 몰라 뜸을 들였는데

스피커에서 다시 같은 질문이 날아왔다.

모니터를 향해 그가 밥을 먹으러 갔다고 말한다.

‘다행이다. 주인님은 성격이 까칠하거든요’

컴퓨터가 톡톡 쏘듯 말을 한다.

‘제가 손님들이랑 친해져보려고 해도

언제나 그 아저씨가 훼방을 놓으니까 말이에요.

하지만 그 인간도 하루종일 밥을 안 먹을수는 없겠죠 흐흐흐‘

난 단 한명의 사람을 주인, 아저씨, 인간이라고 지칭하는

이 컴퓨터의 단어 사용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생각해보니 나도 밥을 안 먹었다.

요즘들어 춘곤증 때문인지

식욕이 크게 떨어졌다.

‘손님도 배고프신가봐요 그럼 중화반점 요리라도 시켜 드릴까요.

용산에서는 사무실에 앉아서 짜장면 시켜 먹는게 참 꿀맛이죠.

제가 전화번호 알려드릴게요 짜장면인가요 짬뽕인가요?‘

컴퓨터가 쉴새 없이 주절거렸다.

나는 언젠가 봤던 잡지책이 떠올랐다.

미래에는 컴퓨터의 인공지능이 발달돼

인간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날도 찾아온다고.

하지만 인공지능이란건

어디까지나 사람이 정해놓은 대사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지

컴퓨터가 스스로 대답을 하는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의 인공지능이란 없다.

난 이 목소리가 요즘 나오는 새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라 생각했고

한번 그것을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과연 이 컴퓨터는 내 말에 어느정도까지 대답할수 있을까.

내가 말했다.

짜장면과 짬뽕 그리고 탕수육이 먹고 싶어.

하지만 짬뽕은 조금만 먹고 싶네.

피식 웃음이 난다.

대체 내가 컴퓨터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싶어서다.

그러나 곧 컴퓨터가 대답했다.

‘돈은 있으신거죠? 손님 주문대로라면

짬짜면을 시키되 짬뽕은 조금만 넣어달라고 하고

탕수육을 추가시키면 되겠네요 그럼 계산을 해보겠습니다.

여기 전자랜드에서 가장 가까운 영덕반점에서 총 이만원이 드네요‘

모니터를 봤다.

그런데 잠시후 모니터 상에 눈을 찡그린

이모티콘 표시가 떴다.

‘앗 죄송합니다 계산 실수했네요.

총 이만 이천원이에요

실은 제 CPU가 나온지 오래되서 가끔 실수를 한답니다

치매죠 치매, 이래서 내가 손님들하고 이야기를 많이 나눠야 된다고

누누이 이야기했거늘‘


휴머니터 5


모니터를 멀뚱히 쳐다본다.

모니터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화면 위에는 두 개의 동그라미와

가로로 된 일자표시가 길게 그어져있다.

마치 컴퓨터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것 같다.

지금 저것이 진짜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건가.

나는 컴퓨터의 대답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었는데

순간 본체에서 펑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몸이 움찔거린다.

‘컥 놀라지 마세요 손님

지금 하드가 자기를 너무 오래사용한다고 화내고 있는 거에요.

사실 아침부터 내내 켜져있기는 했죠.

사장님이 버리는 디스크 프로그램들을 확인중이였거든요‘

뭔가 할 말이 있지만 자꾸 말문이 막힌다.

컴퓨터를 상대로 대답을 한다는것이 도무지 이상했기 때문이다.

‘한번 실행해보시겠어요’

컴퓨터가 그렇게 말하더니 화살표를 만들어 아래를 가리켰다.

그 방향을 바라보니 플로피 디스크가 보인다.

‘사장님이 만든 프로그램인데 디스크로 사람의 심리상태를 확인할수 있는거에요

아까 말했듯이 사장님이 진짜 까칠하시거든요.

그래서 결국 마누라가 이혼 소송을 제기했는데

그 바람에 자기 성격을 고쳐보겠다고 만든거래요

하지만 손님 제가 이 말 한건 비밀이에요‘

디스크를 본다.

표지에는 ‘거울’ 이라는 프로그램명이 적혀있고

그 아래에 이런저런 낙서가 지저분하게 있다.

내가 망설이자 컴퓨터가 또 말했다.

‘한번 넣어보세요. 사람은 자신의 심리상태를 알게되면

그것을 고칠때 꽤 유용하게 쓸수 있거든요.

심리 상담을 받지 않는이상 자기 마음을 온전히 확인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니까요.

저는 그 프로그램을 실행해서 위안을 받는 손님들을 꽤 접해봤어요.

물론 반대인경우도 있지만요‘

디스크를 만져보았다.

그러니 어린시절의 이 디스크를 사용하던 때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

난 그 까칠한 디스크 표면을 어루만지다

곧 마음을 침착히 하고

플로피 디스크를 컴퓨터 안에 집어넣었다.


휴머니터 6


모니터에 테트리스 그림이 펼쳐졌다.

이건 아까 가게 사장이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그 테트리스 게임이다.

스피커에서는 조용한 기계음이 들리기 시작했고

나는 키보드를 만져 움직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키보드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블록들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난 컴퓨터를 불러 보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응답이 없다.

갑자기 막막해진다.

잠시후 기다란 막대기 하나가

바닥에 닿아 똑 소리를 냈다.

그리고 또 다시 아무런 손쓸틈 없이

재차 블록들이 떨어져내렸다.

방금전까지 그렇게 떠들어대던 컴퓨터는 아예 깜깜 무소식이다.

다시 똑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점점 감당할수 없는 퍼즐의 모양새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난처하다.

어떻게 해야되지.

왜 키보드가 먹히지 않는걸까.

그리고 컴퓨터는 갑자기 대답을 안하지.

나는 생각 끝에

혹시 이 테트리스가 키보드가 아닌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프로그램이 아닌가 추측했다.

여지까지도 이 컴퓨터와 목소리로 대화를 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내 큰 소리로 오른쪽으로 움직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네모 블록은 그런 나를

비웃듯 또 똑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애가 탄다.

불록들이 산처럼 쌓여갈수록 마음이 점점 불안해진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말을 외쳤다.

‘야 오른쪽이라고 임마!’

그러자 곧장 내려오던 니은자 블록이 한 걸음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잠시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내가 외쳤다.

‘야! 그 자리에 있어!’

니은자 블록이 주춤거린다.

‘부탁이야 게임 끝나게 생겼잖아’

마침내 블록이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 원하는곳에 안착했다.

‘좋았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트리스 한복판에 폭죽이 터졌다.

마치 나의 기쁜 마음을 이 컴퓨터가 동조해주듯이 말이다.

좋다 이제 이 컴퓨터의 생리를 알겠다.

이건 인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컴퓨터는 컴퓨터로 생각을 하면 안된다.

이 컴퓨터는 인간이다.

내 손을 잡고있는 마우스도 그렇고

치매에 걸렸다는 CPU도 그렇고

화병난 하드도 그렇고

여기 있는것들은 모두가 인간적이다.

그러니까 컴퓨터가 처음 말했듯이 이건 휴머니터다.

아마 휴먼과 컴퓨터의 합성어가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 테트리스란 게임이 모니터상에 나타나는 이유는

아마 평소 대인기피증에 걸려있던 내 심리를 보여주는 것이라 추측했다.

거울이란 프로그램명처럼

테트리스란 게임으로서 내 심정을 그대로 투과시켜 보여주는 것이다.

언젠부턴가 사람이 몹시 싫어졌던 나는

거리에서 한시도 마음이 편할날이 없었는데

동네에서도 사람이 다가오면 일부러 먼 곳으로 떨어져 다닌다.

마치 지금 공중에서 떨어지는 블록들처럼

다가오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해치는 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피하면 피할수록

나는 점점 외로움을 느끼게 됐다.

허전해졌다.

쓸쓸해졌다.

그래서 봄이 되어 날은 분명 따뜻해졌을텐데도

아직까지 내 마음은 겨울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겨울을 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화면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쁘게 떨어지던 블록이

언제 그랬냐는듯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손을 들어 블록을 건드려 보아도

목소리로 움직이라고 소리를 쳐 보아도

게임 화면에 엉겨붙은 블록들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다리가 저려온다.

테트리스를 하기위해 너무 오랫동안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이것을 클리어하기 전에는 절대로 벗어나고 싶지가 않다.

‘움직여!’

모니터를 향해 다시 소리를 쳤다.

하지만 내가 소리를 치면 칠수록

화면에 엉겨붙은 얼음은 더욱 커지고 농도가 짙어지기만 한다.


휴머니터 7


여전히 나의 손을 마우스가 주물러주고 있다.

따뜻하다.

비록 이것은 마우스지만 사람의 손 같은 온기가 느껴진다.

현재 내 가슴은 차갑고 손은 따뜻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다시금 휴머니터의 생리가 떠올랐다.

이건 인간적인 컴퓨터다.

즉 휴머니터.

‘미안하다’

내가 컴퓨터에 대고 말했다.

그러자 엉겨붙은 얼음이 살짝 녹는것처럼 보였다.

난 머릿속에 평소 싫어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아무리 밀어내고 밀어내도 끝없이 날 괴롭히던 인물들.

해서 나는 싫어하는 그들을 상대로

마음에 철통같은 보안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그 때문이였을까

언젠가부터 내 가슴속에는 빙하기같은 얼음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얼음기둥들이 화면 바닥에 쿵쿵 떨어졌다.

다시금 블록들이 움직인다.

그러나 아직 몇몇 블록들은 꽁꽁 언 얼음속에서 차마 빠져나오지 못했다.

또 다른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러니 내가 미워하던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그런데 각각 생각해보면

어떤 이유든간에 그들을 미워할만한 이유가 하나씩은 존재했지만

기억을 다시한번 되짚어보니

나 또한 그들에게 미안한 것이 있었다.

내가 언젠가부터 그들을 미워하게 되고 싫어하게 된 것은

모두 그들의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어느 순간부터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나도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것을.

‘미안하다’

마침내 얼음이 다 녹아내렸다.

그러자 물방울이 붙어 반짝거리는 블록들이

바닥으로 시원하게 떨어져내리기 시작했고

난 그 블록들을 잘 구슬려 제자리에 떨어지도록 유도했다.

이윽고 블록이 한 계단씩 부서진다.

그러니 테트리스와 함께

내 마음에 쌓여있던 온갖 응어리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것을 느낄수가 있었다.

곧 CLEAR라는 글자가 화면에 떴다.

그리고 테트리스가 꺼진다.


휴머니터 7


잠시후 사장이 걸어왔다.

내가 급히 손을 빼자

이제껏 내 손을 움켜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마우스에서 팔이 빠졌다.

‘거 오래도 고르시네’

그가 인상을 쓴다.

난 사장을 쳐다보다

혹시 이 컴퓨터가 실제로 파는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사장이 입에 묻은 짜장을 닦아내며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이 휴머니터를 해보셨구만

하지만 그럼 알거 아뇨.

못 팔지.

손님은 손님 마음을 남한테 팔고 다니시오?‘

나는 다시 날 외면하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그를 쳐다보다가

다시 가게들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말 한후 그 상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까전의 단골 가게를 찾아가 컴퓨터를 구입했다.

그런데 내 옆에 텅빈 수족관 배경을 바라보고 있는 한 아이가 보인다.

멍한 눈의 그 아이는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흔들며

화면을 이리저리 헤엄칠때마다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순수하다.

나도 저렇게 생각없이 즐거웠던 때가 있었던가 떠올려본다.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니 가지각색 표정으로

서로 다른 프로그램 앞에 서 있는 수없는 사람들이 보인다.

핑핑 핑핑.

충혈된 눈으로 보이는 모든 적을 제거해 나가는 슈팅 게이머 고등학생.

쯧쯧 쯧쯧.

모니터 속 재난영상을 보며 자기 일처럼 호들갑을 떠는 팔불출 아주머니.

딱딱 딱딱.

심각한 표정으로 한 수 한 수 장기알을 클릭하는 점잖은 늙은 상인도 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어쩌면 이곳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각기다른 그들의 컴퓨터가

사람들의 마음을 마주 보여주는 일종의 휴머니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전자랜드 전부가 살아있는 유기체다.

즉 컴퓨터는 로봇과 같이 인간의 명령만을 수행하는 기계적 존재가 아니라

실은 사람과 소통하고 그들의 내면을 표현해주는 멋진 물건인 것이다.

나는 다시 모니터 앞에 서 있는 아이 곁에 섰다.

파란 수족관 배경화면.

그 안에는 보글보글 호기심 가득한 물고기들이 있다.

또 작은 아이또한 천진한 얼굴속에 설레임이 가득하다.

참 멋진 기계다.

난 이 참에 컴퓨터가 모여있는 이 용산의 전자랜드를

좀더 그럴듯하게 표현할수 있겠다 싶었다.

사람들에게 편리를 주는 거대상점인 동시에

그들의 인간다움을 온전히 보여주는 장소라는 뜻으로.

인간을 뜻하는 휴먼과

장소의 뜻을 가진 한자 터를 덧붙여

휴머니터 라 지칭하면 어떨까.

난 내내 들고있던 컴퓨터를 잠시 단골 가게에 맡겨놓고

아까전 상점을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이미 문이 닫혀있다.

주변 가게들은 아직 그대로인데

그 상점만 일찍 문을 닫았다.

다만 상점 옆에

어떤 노파가 쭈그려 앉아서 조용히 물건을 팔고있다.

아쉬워하며 돌아가려니

노파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보따리 위에 있는 물건을 불쑥 내민다.

몸을 수그려 그것을 쳐다본다.

그러니 그건 동그란 몸통에 기다란 꼬리를 갖고있는

쥐를 닮은 기계였다.

바로 오늘 낮까지 꾹꾹 닫혀있던 내 마음을

활짝 열어주었던 손 마사지용 진동 마우스 말이다.


-끝-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