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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혜 Jun 22. 2024

미대생은 멋지다

그녀의 웃음은 나에게 전염되고

이 글을 위해 친구에게 연락했다. 우리 고등학생 때, 내가 처음으로 너한테 공황장애인 거 알려줬을 때 반응 어땠더라. 친구의 대답은 이랬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놀란 티 안 내려고 했던 것 같아. 침착하기를 노력했다고 답변이 왔다. 나는 친구의 답변을 보고 나선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었다.


그런데 기억나는 건 오로지 단 하나였다. 늘 밝게 웃어주던 모습. 그 시절의 나는 그 친구를 부러워했다. 성격이 좋아서 주변에 친구가 많고, 털털하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좋아했다. 아마 그래서 더 그 친구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 친구를 좋아하고 있다. 편견 없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허락 없이 사진을 찍어도 재밌는 표정을 지어주던 친구의 모습이 생각난다. 처음 공황 장애를 알려주고 나서 나에게 조심스럽게 묻던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그, 민혜야. 공항 장애 내가 검색해 봤는데, 증상이 이렇다고 나와있더라고, 너도 그래?


그래서 내가 다시 알려준 기억이 난다. 공항 아니고, 공황. 문장으로 보면 딱딱하게 이야기해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웃어넘기며 다시 알려줬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청소 시간에 친구들과 모여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친구들과 창문을 열어 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급격하게 숨이 막혀왔다. 나는 뒤를 돌아서 먼 곳을 쳐다보며 숨을 골랐다. 내 증상을 알고 있던 친구가 옆으로 와서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주변에서 민혜 왜 그래?라고 물었을 때, 친구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바람 쐬고 싶대. 에둘러서 말해주던 친구가 얼마나 고마운 지 몰랐다.


그리고 또 다른 날은 버스를 탈 때였다. 우리 집과 고등학교는 꽤 멀어서 버스를 환승해야 했다. 그런데 그날은 같은 학교 학생들이 버스를 꽉 차게 탔다. 마치 콩나물시루 같았다. 친구들도 같이 탔는데, 너무 끼여서 답답했다. 역시나 두 정거장 갔을 때 즈음 나는 내려야만 했다. 죽을 것 같던 공포에 더 휩싸이기 전에 내려야 했다. 정류장에 내리기 전까지 친구가 나를 다독여줬다.


이후, 나 혼자 내려서 정류장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숨을 골랐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뒤로 오는 버스에 타서 한 산한 버스 공간에 안도하며 집에 갔던 기억이 있다. 환승하기 위해 다른 버스에 올라탔을 때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괜찮아? 응, 괜찮아. 지금 환승 버스 탔어. 다른 애들이 뭐래? 아, 왜 내리냐고 물어보길래,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음 버스 탄다고 말했어. 고마워.


조금은 슬펐다. 매일 이용하던 버스가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공황 장애가 발병하고 나서는 버스를 타는 게 무서웠다. 아침이면 두 손을 꽉 쥐고 주먹을 말아 쥐어야 했다. 버스가 오면 입을 앙 다물고, 호흡을 골라야만 했다. 어쩔 때는 토할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나에게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내릴 수 있다. 갇혀 있는 게 아니다. 힘들면 조퇴해도 된다. 어쩌면 강박에도 시달리고 있어서 불안 장애도 같이 왔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보다 실제로 내린 적은 몇 번 안 된 것 같다. 기억이 희미해져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잘 버틴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가장 걱정이 되었던 건, 미대생인 친구와 늘 하교 버스를 같이 탔는데 공황 장애가 올까 봐 걱정했었다. 그런데 그 친구와 같이 있으면 그래도 마음이 편했다. 어쩌다 웃긴 상황이 생길 때는 나의 마음의 병도 잊어버리고 웃기에 바빴던 것 같다.


낙엽만 보면 까르르 웃던 시기였고, 별 것도 아닌 것들에 웃기 바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순간들 마저도 예쁘게 빛이 났던 것 같다. 요즘 학생들을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웃기 바쁜 모습을 종종 보고는 하는데, 정말 예쁘단 말이 절로 튀어나오곤 한다. 그럴 때면 우리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미대생 친구에게 공황 장애를 알리고 나서 한 통의 편지를 전달받았다. 우리는 손 편지 쓰는 걸 좋아했기에 그날도 자연스럽게 전달받았다. 그렇게 집에 와서 그 편지를 펼쳐 보았을 때 펑펑 울던 기억이 난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가도, 다시 가고, 또 가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나에게 든든한 친구가 있으니까, 힘내서 가야겠다. 그런데 정말 시간이 약이었던 걸까? 친구 말대로 2017년 초에는 많이 좋아졌었다. 그러고 보면, 신기하게도 이 친구와는 3년 동안 단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수학 시간에는 같은 반이었다. 점수마다 분별되어서, 영어와 수학은 늘 이동 수업이었다. 나는 그 친구와 같은 반이었기 때문에 같이 짝꿍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일 싫어하는 수학 과목이 즐거웠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을 일찍 끝내 주시면, 열심히 수다를 떨고 각자 다른 반으로 흩어졌다. 아니, 나는 반에 남아있고 그 친구는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우리가 만날 구멍은 또 있었다.


미대를 준비하는 친구는 미술반 동아리었다. 나는 그 동아리의 일원이 아니었지만, 틈만 나면 미술 동아리 실에 가서 다 같이 놀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미술 반에서 놀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같이 밥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저녁 시간에는 나와 친구도 저녁 급식 신청을 안 했기 때문에 빵을 사다 먹었었다. 학생들이 잘 가지 않는 곳에 가서 간이 의자에 앉아 웃고 떠들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건, 별 거 아닌 이야기에 빵 터진 기억이다. 내 아버지가 방귀를 뀌셨단 이야기를 하는데 깔깔 거리며 웃었었다. 웃을 때마다 예쁘게 접히는 반달눈웃음. 나는 귀엽고 상냥한 그 친구의 단짝인 게 너무 좋았다. 그래서 그때는 그 친구를 조금이라도 닮고 싶었다.


소심하고, 조용하던 나와 달리 활발하고, 재주도 많고, 사랑이 많던 아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이후 나는 서울에 있는 전문학교에 붙고, 이사 가기로 결정되었을 때 또 다른 편지 한 통을 받았었다. 이사를 가도 자주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 가지 말란 말에 코 끝이 찡 했었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다른 친구들처럼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털털하게 어깨동무를 하며 신나게 웃기도 했고, 내가 울 때면 어느 인터넷 소설 남자 주인공처럼 교복 마이를 벗어서 얼굴에 덮어주기도 했었다. 설렘 포인트를 잘 아는 이 친구는 여러 모로 특출 난 친구였다.


이 글을 빌려서 말하고 싶다. 친구가 별로 없고, 조용하던 나와 친구를 해줘서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나의 아픔을 덤덤하게 받아줘서 더할 나위 없이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미대생은 어엿한 어른이 되어 냉정하고도 치열한 사회를 온몸으로 부딪히고 있다. 그 친구의 최근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면, 우리의 시절은 다 어디로 간 건지, 씁쓸하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 시절이 있기에 지금의 시절 또한 버틸 수 있음을 깨닫는다.


다른 이의 아픔을 받아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미대생은 멋지다. 그리고 나는 시간이 약이라는 말 참 싫어했는데, 미대생 덕분에 좋아진 말이다. 그래, 시간이 약이지. 이 또한 지나가리라. 너도, 나도 지금 시절이 지나가고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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