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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혜 Jun 18. 2024

어쩌면, 열아홉

그때 공황장애 시작이 아니었더라면

숨기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던 아픔이었다. 그런데 어 8년이 지난 지금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려 한다. 이제 나의 아픔은 삶의 거름이 되었고, 디딤판이 되었음을.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으며, 죽을 것 같던 공포에서 기어 나와 애써 살아내고 있다고.


홉, 대학 입시를 위해 모두가 학업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 그때의 난 어느 학과를 가야 될지, 그리고 어느 학교를 가야 되는 건지 한창 고민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삼 학년이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아마 2016년 4월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야자를 너무 하기 싫은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삼 학년으로 올라가니 10시에 끝났는데 도통 적응이 안 되었다. 공부를 하기 싫을 때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자주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했기에 MP3를 구매해서 좋아하는 노래를 담아 듣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앞으로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줄 알았다. 공황장애가 처음 나타났을 때를 여전히 기억한다. 윤리 수업 시간이었는데 숨이 막히고, 울렁거리고,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갇혀있는 것만 같았는데 꼭 누군가가 나를 무섭게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어쩔 줄 모르며 숨만 간신히 골랐다.


하지만 도저히 참지 못했다. 결국 손을 들어 화장실로 달려갔다. 내 성격에 수업시간에 손을 드는 아이는 아니었는데.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 고요한 수업시간에 손을 들었나 싶다.


그때의 선생님의 표정이 기억난다. 당황하시며 안도의 한숨을 쉬시던 그 모습. 어쩐지 창백해진 내 얼굴이 걱정되셨나 보다. 사실은 틈만 나면 내 얼굴을 보시던 선생님의 눈동자가 기억난다. 끝자리에 있었으니, 얼마나 눈에 띄었을까.


아무튼 나는 급하게 뛰어가서 화장실에 숨었다. 그리고 구토와 동시에 몸을 벌벌 떨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곳에 나만 덩그러니 남아 차마 소리 내지 못 한 채 울기만 했다. 왜 그런지는 몰랐는데 가슴이 퍽퍽하게 아파왔다. 분명 나는 지상에 있는데. 왜 물속에 있는 것만 같지? 숨을 쉬어도 좀처럼 내 뜻대로 다스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되었을 때 눈물범벅이 된 나를 본 친구들은 놀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유를 쉬이 말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겠다고, 처음 겪는 일이라고. 일단 속이 안 좋다는 이유로 조퇴를 하고 내과를 찾아갔다. 늘 그랬듯이 장염, 위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몸도 같이 아프다는 신호였던 것 같다.


그런 나를 본 엄마는 당연히 쉬라고 하셨다. 나 역시도 그래, 좀 쉬면 나아지겠지 했는데.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미래라고, 나는 그 뒤로도 같은 증상이 반복되었다. 수업 시간에 종잇장을 붙잡고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시간이 생각난다. 결국 나는 엄마에게 사실대로 고하고 함께 가정의학과를 찾아갔다. 의사 선생님이 한참을 고민하시다 말하시길, 아무래도 정신과를 가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근처 종합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은 결과 공황장애, 우울증이었다. 아빠는 좀 더 큰 병원에 가자며 지역에서 제일 큰 대학병원에 갔다. 부모님과 나는 여러 가지 검사를 함께 하며 결과를 기다렸었다. 결과는 같았다. 공황장애, 불안장애, 우울증. 복합적으로 섞여있었다. 그 뒤로 나는 야자도, 보충 수업도 다 빼고 정규 수업만 다니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담임 선생님께 처음 알렸을 때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검정고시가 있는데 그걸 치르는 게 어떻겠냐고. 엄마는 반대하셨다. 아이를 졸업시키고 싶다고.


솔직히 말하면, 이때의 나는 당장이라도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상태라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에게 감사하다. 졸업을 하지 못했더라면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가히 상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보다 더 우울한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 외에 어떤 선생님에게도 나의 증상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만 알고 있기로 했다. 덧붙여 힘들 때면 언제든 조퇴하기로 했다. 그래, 담임 선생님에게는 이 사실을 알렸으니까 친구들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사실은 몸도 자주 아팠던 아이라 조퇴를 몇 번 하기는 했었다. 그래서 친구들도 내가 조퇴를 하면 장염이냐고 묻고는 했었다. 그런데 이건 달랐다. 그때 당시 공황장애가 많이 알려진 시대도 아니었고 주변에 발병한 사람들이 아주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내 증상을 말해도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겪어보지 않으면 쉬이 이해할 수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 뒤로 힘들 때면 조퇴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횟수가 빈번해지자 어느 친구가 그랬다. 민혜는 조퇴 잘하던데 비결이 뭐야? 담임 쌤은 조퇴 잘 안 시켜주던데. 나는 눈치가 빠른 아이라 대번 알 수 있었다. 그의 속뜻은 왜 이렇게 조퇴를 자주 하냐는 뜻인 것 같았다. 나는 그저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그리 친한 친구도 아니었고 이 사실을 알리면 모두가 알게 되기 때문이었다.


아, 그냥 뭐. 배 아프다고 하니까 조퇴시켜주시던데. 어물쩡하게 넘겼는데 믿어주는 건지, 아닌지. 의외로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흐른다. 주변의 눈치를 많이보고, 정신과를 다닌 다는 꼬리표가 붙기 싫었던 나.


부모님도 나의 상태를 믿고 싶지 않아 하셨고, 힘들었던 열아홉의 나. 그런데 그때 곁에 있었던 미대 준비생 친구가 아니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친구에게 밥 먹듯이 말한다. 그때의 네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자퇴해서 지금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라고.


유일하게 나를 이해해 주고 안아주던 그 친구는 여전히 내 곁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 친구와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담으로, 유튜브에서 공황장애지만 괜찮은 열입곱 자퇴생이란 동영상을 우연히 접했다. 증상이 나랑 똑같아서 고등학생 때의 내가 많이 생각났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너무나 많은 생각과 가치관들이 바뀌었다. 이제는 마음이 아파서 어떠한 선택을 내리든 그 누구도 무어라 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기 때문에.


우린 모두 살아있기에 훌륭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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