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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혜 Jul 02. 2024

이게 무슨 스무 살

스무 살은 즐겁다던데

천안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가기 전이었다. 그때 아버지 인천에서 회사를 다니고 계셨다. 나는 인천으로 가기 위해 미리 짐을 쌌다. 완전한 이사를 가기 전에는 아버지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에 함께 살기로 했다. 서울에 있는 학교에 간다고, 들뜬 마음에 파마도 하고 예쁘게 단장하는 법도 유튜브로 배웠다.


그리고 2월 달이 되었을 때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우울했던 마음이 커졌다. 온통 내 머릿속에는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가득했었다.


그래서 새벽 동안 한참을 뒤척이다가 잠에 든 적도 있었다. 이 글을 위해 일기장을 펼쳐보니 2017년의 나는 우울증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늦게 자는 것이고, 운동을 안 하고, 삼시 세끼 안 먹고, 걱정이 차고 넘치도록 많다는 결과였다. 결론적으로는 미래를 너무 많이 걱정해서 밤 잠을 설치고 입맛도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파트에서 엄마와 살다가 아버지와 사려니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불편한 건 그렇다고 쳐도 답답한 생활이 답이 없어 보였다. 매우 답답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편하고, 불안정한 기류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불만을 가졌는데 아버지가 주신 이불에 쥐 똥 같은 게 묻어있다고 확신을 가졌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개미가 천장을 기어 다니고 벌레가 자주 드나드는 걸로 보아 벌레 같은 똥이라고 확신했다.


시간이 흘러 3월이 되었을 때, 그럭저럭 견디면서 생활을 했다. 하지만 늦잠을 자는 건 여전했다. 사실은 졸려서 그런 것도 있지만 너무 공허했다. 그 마음을 채울 수 없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멍하니 천장을 보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드라마 정주행 취미가 있었기에 당시 인기 있었던 역도요정 김복주를 시청했다. 그리고 몸을 바쁘게 움직이며 집안일을 했다. 그러다 옛 친구에게 연락하기 위해 카톡과 전화를 남기면,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아 불안하기도 했었다.


OT가 있었을 때는 졸리고 허리가 아팠다. 인천에서 서울에 있는 전문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왕복 3시간이 넘었었다. 그래서 6시에는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됐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 때랑 다를 게 없다며 속으로 한탄을 했었다. 흔히 '지옥 철'이라고 불리는 9호선을 2년 동안 매일 타고 다닐 생각에 벌써 지쳤다. 언제 즈음 익숙해질지 고민이 되었다.


공강인 날은 집에서 밀린 집안일을 하고 과제를 하거나 좋아하는 드라마를 몰아봤다. 그리고 3월과 4월의 최대 고민은 그 많은 동기들 중에 내 친구가 있을까?라는 고민이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활발하고 장난기 많던 어렸을 때 와는 달리, 크고 나선 소심하고 조용했다.


이런 내가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걱정과는 무색하게 나랑 동갑인 친구와 사귀게 되었다. 다행이었다. 그 친구와 학교 생활을 보내며 5월이 되었을 때, 꿈에 그리던 '아이유'를 보러 갔다. 비록 팬 사인회에 당첨되지 못했지만 코엑스에서 팬 사인회를 열기에 아이유를 보기 위해 코엑스로 달려갔다. 처음 보는 실물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팬 사인회가 끝날 때까지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만족했다.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동경의 연예인이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 그저 황홀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6월이 되었을 때, 드디어 천안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했다. 모든 학창 시절을 천안에서 보냈기에 눈물이 찔끔 났다. 그래서 기념으로 아파트 앞에서 가족과 함께 사진을 남겼다. 이사를 하는 내내 짜증을 내는 아버지 때문에 눈치를 많이 보고, 이삿짐을 도와주시는 분들도 기분이 안 좋으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짐들이 너무 많았기에 치울 것이 많아 짜증 내셨던 것 같다.


그래도 화장실이 두 개라서 행복했다. 무엇보다 아버지 방이 따로 생기고 내 방도 정말 많이 넓어져서 행복했다. 친구가 놀러 오면 같이 잠을 잘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 기지만, 슬픈. 흔히 '웃픈' 일화가 하나 있다. 이사를 하고 나서 부모님이 안 계실 때였다. 핸드폰을 두고 편의점에서 바나나 우유를 사 왔는데 집 비밀번호가 까마득하게도 저 멀리 날아갔다.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로봇이 오작동 난 것처럼 백지장이 되어서 식은땀이 줄줄 났다. 한참을 고민하다 옆집 초인종을 눌러 아주머니께 핸드폰을 빌렸다.


엄마, 나 민혜인데... 우리 집 비밀 번호가 뭐였지?


어이가 하늘로 가셨다. 창피했는데 옆집 아주머니께  얼굴 낙인이 제대로 찍혔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별일 없는 듯, 별 일 있는 하루들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을 때였다.


그때 우울증이 크게 왔다. 나는 몰랐는데 일기장을 뒤적여보면 우울한 이야기들 밖에 없다. 나는 당시에 전문학교에 온 걸 후회했다. 친구들을 사귀기 힘들어했고, 훈련반 동기들과 전혀 친하지 않았다. 어쩔 때는 동기 중 한 명이 나에게 그랬다.


넌 왜 혼자 다녀?


할 말이 없었다. 나도 혼자 다니고 싶지 않은데, 누군가와 어울린다는 게 정말 어려웠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차라리 고등학생 때가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나는 우울의 끝을 달려서 수능과 수시에서 도피하기 위해 전문학교에 왔다고 생각했다. 동물을 좋아한다는 핑계로 단지 이곳에 온 거라고 단정 지었다. 그리고 당시에 전쟁 이야기가 오고 갔는데, 핵폭탄이 떨어져서 나를 포함한 모두가 저 세상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고, 비관적인 생각을 했다.


그때는 다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줄 알았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 못 하고, 그저 그렇게 버티고 참아가며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래야만 했다. 실습은 재밌었지만, 사람들과의 교류가 엉망이었다. 말 수 없고, 혼자 있는 아이. 그게 주변에서 보는 시선이었다.


오죽하면 미용과 교수님께서 이리 말씀하셨을까.


민혜는 말없이 묵묵히 하네.


동시에 고등학교 지리 수업시간에 들었던 선생님의 말씀이 스쳐 지나갔다.


민혜야, 그렇게 입 다물고 있으면 단내 안 나니?


그때는 옆친구와 친했기에 짝꿍이 대신 대변해 주었다.


아니에요, 민혜 되게 재밌고 말 많아요.


그렇다. 어쩌면 나는 이중인격자 일지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없이 웃어주고 재밌는 농담을 던지다가도, 누군가에게는 얼어붙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무튼 나는 훈련과에서 친한 이들이 없었기에 진지하게 전과를 원했다. 처음에는 작가 쪽을 원했기에 엄마에게 작가 쪽으로 전과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 엄마가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다투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결국 나는 애견 미용으로 전과하기로 했다.


여담으로,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도 이과에서 문과로 전과한 전적이 있다. 담임 선생님께 말한 지 하루 만에 소문이 퍼져서 동네방네 내 이야기가 오고 갔던 아찔한 기억이 있다.


다행히도 나는 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2학년으로 올라가기 전에 미용 교수님과 면담을 하고, 훈련 교수님과도 면담을 했다. 훈련 교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낯 가리지? 네, 그런 편이에요. 나도 그랬는데, 일 하면서 많이 바뀌더라고, 너도 그럴 거야.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라도 빨리 훈련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혼자 있는다는 게 이렇게 괴롭고, 힘든 일인지 몰랐다. 무엇보다 다른 동기들은 다들 무리를 짓고 있는데 나만 혼자였다. 그래서 때로는 아프단 핑계로 학교를 안 나가기도 했다.


그래서 내 학점은 바닥을 쳤다. 스무 살에는 정신과 약을 먹지 않았는데, 다시 약을 먹어야 되는 건가, 싶었다. 천안에 있던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너무 그리웠다. 그리고 같이 게임을 하던 고등학교 친구들이 그리웠다.


그래도 어찌어찌 미용과로 옮기게 되면서 훈련과에서 벗어났다.


강아지도 안 키우는데 무슨 훈련과야. 이런 생각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삼 십 명이 넘는 곳에서 강아지를 안 키우는 사람은 나 포함 세 명이었다. 우울했다.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는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다들 나를 한참 동안이나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고, 흉을 볼 것만 같은 피해망상이 있었다. 그래서 졸업만 하자는 다짐으로 F를 맞지 않기 위해 출석을 채우고, 시험에 나온다는 부분은 꼭 체크했다. 그래서 다행히 F는 면하고 편안한 방학을 보낼 수 있었다.


아, 나는 그 당시에 집 앞에 있는 뚜레쥬르 주말 마감을 하고 있었는데 일한 지 이 개월만에 혼자 일하게 되었다. 사장님이 믿고 맡겨주셨는데 스무 살에 제일 잘한 점은 일 년 동안 하루 빠진 것 외에는 정말 성실히 다녔다는 점이다.


올해 2024년, 대학 동기들을 오랜만에 만났었는데, 한 친구가 그랬다.


야, 나는 민혜가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어.


머쓱했다. 그때의 일이라면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너희랑 친해지고 싶고 같이 놀고 싶은데 용기가 없었어. 너네가 싫은 게 절대 아니었어. 말하고 싶었는데, 손 사레로 끝나면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참 아쉬운 점은 너무 쉽게 약을 끊었다는 것이다. 나 스스로를 너무 믿었다 보다.


괜찮을 거라고,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스무 살만 되면 온통 내 세상이고 좋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즐거움은 잠시였고, 다시금 찾아온 우울증에 고통스럽던 나날들이었다. 술만 마시면 울기 바쁘고, 잠깐 기분 좋던 취기와 누군가에게 고백받던 그 잠깐만 즐겁던 날들.


좋은 건 금방 지나가고, 나쁜 건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래도 그때의 나에게 말하고 싶다. 다 괜찮아. 버텨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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