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면 달라질까?

어쩌면 내가 미쳐야 살아남을지도

by 김민혜

어느 날처럼 드라마를 봤다. 주지훈 배우님에게 빠져서 넷플릭스 중증외상센터를 다시 봤다. 그러다 이런 대사를 들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죽음에 왜 이렇게까지 수고를 해야 되나. 뭐, 나도 열나게 고민했던 부분이라. '

'너도 너만의 이유를 찾아. 개같이 구르고 엿같이 깨져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그런 이유. '

' 이 퍽퍽하고 꺼끌꺼끌한 이 길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걸어가기엔 너무 되다. '



그 장면에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예전엔 그저 넘겼던 장면이었는데. 정말 뇌리에 꽉 박히고, 마음이 울렁였다. 나는 애견 유치원에서 깨지는 게 일상이었다. 어느 날은 너무나 답답했던 원장님이 내 말투를 따라 하며 성을 내셨다. 원장님은 그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나는 수치심과 울분이 확 들었다.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었다. 마치 나를 조롱하고 비아냥 거리는 것처럼 느꼈다. 원장님의 조언은 항상 수첩에 남겼다.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항상 화를 내며 조언을 하셨기에, 결국 나에게 남는 건 조언이 아닌, 감정이었다. 저 사람이 나에게 화를 낸다는 감정. 그러나 원장님을 존중하기 때문에 어떠한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강도가 점점 심해졌다. 보다 못한 주변 사람이 그랬다.



' 너도 참 너다. 넌 왜 네 할 말을 못 해? 너도 가만히 있지만 말고 네 할 말을 해! '



다들 답답해했다. 나 조차도 내가 잘 못 한 게 많다고 생각했다. 내가 일을 못 해서, 내가 부족해서. 그래서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장에 월세를 내야 했고,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다. 일하는 곳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게 불쑥 두려웠다. 아, 원래는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면 박차고 나왔을 텐데.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더 이상 도망갈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경력을 쌓고 싶었다. 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에 잠겼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걸까. 그렇게 우울에 빠져서 하루 종일 자다가 밤에 중증외상센터 드라마를 본 거였다.


사람이 질리도록 싫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업종을 동물로 바꿨다. 근데 이 지구에서 사람을 안 마주치고 산다는 게 가능한가. 아니 절대로. 불가능하겠지.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책을 읽으며 나를 다독였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는 늘 있음을 믿으라는 어느 책의 문장과 무대응만이 답은 아니라는 문장. 내가 이 세상을 버티는 이유는 그저 단 하나였다. 주님이 계시기에. 함께 걷는 길이 좋아서. 묵묵하게 나를 건져주시는 게 감사해서. 그런데 그저 '돈'이라는 속박에 얽매어서 살다 보니 버틸 이유가 점점 희미해졌다.


하나님과 동물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나를 왜 이곳에 보내셨을까. 나는 대체 무슨 일을 해야 되는 사람인거지? 나도 내 자신이 답답했다. 그러다 아빠의 말이 생각났다. 어차피 다 지나갈 인연이다. 그러니 너무 무서워 말아라. 솔직히 말하면 선생님들이 너무 잘해주셔서 별 이야기를 다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지, 싶다. 순진했다. 사람이 싫다면서 잘해주면 홀라당 넘어갔다. 어휴 정말.


아무튼 곰곰이 생각을 해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올해의 내가 버틸 이유는, 내 알을 깨고 나오기. 나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하는 타입이다. 말해도 엉엉 울어버리니. 답도 없지. 거짓말 같겠지만, 화도 못 내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원장님이 또 그러시면 차분하게 내가 느낀 감정을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자. 자격증이 그렇게 많은 데 갈 데가 없겠어? 그냥 하나님께 기도를 쌓고, 상황을 맡겨버리자. 그만두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일을 못 할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뭔, 개 어처구니없는 발언이긴 하다만. 나도 반년 넘게 묵묵히 견뎌내고 꾀 없이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부끄럽지 않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게 뭐냐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여기까지 결심하기까지 나는 마치 영겁의 시간을 거친 사람 같았다. 학생때도 지각이 무서워서 덜덜 떨던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가 99세 할머니가 되어서 이 순간을 후회할 거 같아서 결심했다. 세상이 미쳤는데. 내가 안 미치고 베기나. 그냥 차라리 미친 사람이 되어버리고 싶었다. 뒷일은 주님께 맡기겠다. 쪼그라들지 말자.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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