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혜 Jul 14. 2024

헤이 모두들 안녕

공황 장애 21학번

2021년,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미디어를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다. 듣고 싶은 과목을 수강신청하고 강의 목록을 찾아보기도 했다. 교재가 많아서 중고등학교 때로 다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특히 교양 과목은 실생활에서도 도움 되는 강의 내용이 많아서 재미가 쏠쏠했다. 고등학교 때 이때처럼만 공부해 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방송대에서 내주는 과제를 제일 좋아했다. 논문을 찾아보고 강의를 참고하고, 책을 펼쳐서 과제와 관련된 공부를 하는 것이 좋았다. 힘들지만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4월부터는 프랜차이즈 카페 알바를 시작하며 공부와 알바를 병행했다. 걸어서 20분은 가야 되었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새로 생긴 카페였는데 좋은 점장님을 만나서 복이 많다고 생각했다. 같이 일하던 스텝은 나와 3살 어린 친구였는데, 합이 잘 맞아서 좋았다.


귀엽고 생활력이 참 강한 친구라 닮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나는 한 달간은 별 탈 없이 지내다가 일이 다시 터졌다. 알바를 하다가 어지럼증과 구토가 올라왔다. 그래서 중간에 말도 못 하고 화장실로 뛰쳐나간 전적이 있다. 곧바로 구토를 시작하다가 정신 차리고 다시 일하러 돌아간 기억이 있다. 사실 그전에도 아르바이트하다가 숨 쉬기가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생각 했다. 아, 나 지금 이 일이 부담되는 건가? 알바와 공부를 함께하는 게 부담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스무 살 무렵 알바와 학교를 병행하며 쉴 틈 없이 달려왔을 때, 그때를 생각하면 그냥 내가 많이 힘든 가보다 하고, 넘겼다.


근데 그 뒤로 알바를 가는 게 무서웠다. 수액을 맞아봐도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카페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세상이 날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한 걸음 뗄떼마다 구토가 올라와서 너무 힘들었다. 생지옥도 이런 생지옥이 없었다. 결국 나는 조퇴를 하고 빠진 적이 있다.


그때 마침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자궁경부암 검진을 받으라고 공지가 왔었다. 그래서 병원을 빌미로 주말에 아팠다고 점장님께 말씀드렸다. 공황 장애 같다고 말씀드릴 수 없었다. 내가 첫 아르바이트생이고, 오픈 아르바이트생인데 아픈 애를 뽑았다고 속상해하실 것 같았다. 그리고 차마 설명드리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약 4년 만에 공황 장애가 다시 찾아왔다. 알바를 관두고 공부에만 전념했는데, 그것 조차 어려웠다. 한 과목은 시험을 보러 직접 학교에 나가야 됐다. 자정이 넘은 새벽에 잠을 한숨도 못 자고 핸드폰을 붙잡았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압박에 119를 불러야 되나 싶었다. 화장실에 가서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기어 나와 그대로 엎드렸다. 고등학교 때 처음 발병한 이후로 오랜만에 겪는 감정이었다.


15분이 지나자 점차 진정이 되었다. 그때 당시에 부모님이 안 계셔서 손을 바들바들 떨며 애써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결국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겨우 잠들었었다. 그리고 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나를 다스리며 역까지 나갔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지하철을 못 탔다. 잘 만 타고 다니던 지하철에 타던 순간 숨이 막혔다. 내가 이걸 타면 죽을 것만 같았다. 결30분을 넘게 역에만 앉아있었다. 가야 된다고, 가야만 한다고 생각만 했다.


근데 그러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서 별 생각을 다하며 침대에 누웠다. 내 학점 어떡하지. 부모님이 시골에서 돌아오시고, 엄마에게 상황 설명을 했다. 부모님이 오셔서 안심이 되었던 건지, 푹 잠에 들고 저녁에 일어난 기억이 있다.


나는 이 이후로 고등학교 때 보다 더 큰 아픔을 경험했다. 증상이 심하면 병원에도 못 간다던데, 그게 바로 나였다.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때 마침 코로나가 터져서 학교 수업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줌 수업으로 바뀌고, 시험도 과제 형식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걸 노려서 과제 형식인 과목들로 수강 신청을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의 도움을 받아서 근처 대형 병원에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가 8월 여름이었다. 그러니까,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서 집에만 있었다. 거의 2년가량을 그렇게 지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을 찾았는데 유튜브에서 외주 작업을 받아 대본을 써주는 일을 시작했다.


신생 채널이었는데 마침 내가 합격을 해서 1년 좀 넘게 일을 했었다. 내 생활은 과제, 작가 일, 과제, 작가 일. 그게 전 부였다. 그리고 몇 개월 동안은 엄마가 병원까지 태워주시기도 했는데, 내가 가보겠다고 혼자 도전했다가 예약 시간을 놓칠 때도 많았다.


그럴 때면 아빠가 모른 척하고 병원에 데려다주신 적도 있다. 그때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다. 왜 나에게 또다시 이런 시련이 생긴 건지. 의심이 많은 나는 의사 선생님까지 의심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 제가 진료받고 있는 의사 선생님 못 믿겠어요. 제가 믿을 만한 선생님이면 무언가를 저에게 보여주세요.


그리고 오전 진료 시간에 아무도 없을 무렵, 어떤 할머니가 처방전을 들고 간호사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한 장면을 목격했다. 나는 멍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때마침 할머니에게 다가오시는 나의 주치의 선생님을 발견했다. 선생님은 할머니를 토닥여주시며 안정시켜 주셨다.


노련한 솜씨로 괜찮다고, 많이 짜증 나셨겠다고 상대의 감정을 알아차려 주셨다. 정말 온화하신 분이었다. 그때 나의 기도가 생각났다. 신기하게도 2024인 지금까지 주치의 선생님이 진료실 밖으로 나온 적을 본적도, 환자분을 안정시켜 주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냥 내가 그날 그런 장면을 목격한 게 너무 신기할 뿐이었다.


그래서 주치의 선생님을 믿고 따랐다. 선생님은 약을 약하게 처방해 주면서 나에게 맞는 약을 조절해 주었다. 나는 너무 힘들어서 힘들단 말도 못 했고 그저 울다가 진료가 끝나기 일쑤였다. 불안장애가 심해서 손이 바들바들 떨렸는데, 그게 심할 땐 약을 더 늘려주셨다.


이틀 뒤에 오세요, 일주일 뒤에 오세요. 때마다 진료 시기가 달라졌다. 그리고 엄마가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끔 버스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실패했다. 그때 죽을 만큼 기도했다. 제발 버스 좀 타게 해달라고.


근데, 내 심장을 누군가가 따뜻하게 감싸주더니, 괜찮다고. 하는 따뜻한 음성이 들리는 순간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나는 그날 너무 감격해서 버스 안에서 엉엉 울었다. 그리고 그날 나에게 해주신 주치의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났다.


나만 믿고 따라와요. 꼭 고쳐 줄게요. 그러니까, 나쁜 생각하지 마요. 괜찮아요.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전하고 나서 나도, 엄마도 울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려고 노력했다. 꾸준히 약을 먹고, 사소한 일상생활을 시도하고, 꽃을 사서 새로 심기도 했다.


평소에 만들어놨던 사소한 습관이 나를 살게 했다. 그리고 신에게 물음을 던졌다.


저에게 왜 자꾸 이런 시련을 주세요? 그렇게 그 답을 찾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전 07화 누가 편입 소리를 내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