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하면 편입해서 공부 더 하려고요. 저희 아버지도 대학을 두 번 나오셔서 공부 꾸준히 하셨거든요.
그래, 공부는 끝이 없지.
전문학교는 2년제 학사학위를 주기 때문에 편입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학사학위를 받으면 국내외 대학원 진학과 4년제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의 나는 학벌에 대한 열등감이 심했다. 자기혐오에 열등감까지.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데 세상이 정해놓은 틀에 맞춰서 살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꼭 세상의 패배자가 되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주변에서 중고등학교 동창들의 소식이 들려올 때, 누구는 어느 대학을 갔다더라, 또 누구는 어떻게 됐다더라. 그런 잘 됐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나 스스로 열등감이 솟구쳤다. 겉으로는 그래,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도 자기혐오가 시작되었다. 나는 왜 이럴까. 왜 똑똑하지 못하고, 의지가 없고, 열정도 없을까. 항상 왜라는 질문이 붙으면서 불안감과 무기력함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졸업 이후의 삶이 두려웠다. 스물셋에 일찍이 졸업을 하고 사회로 뛰어들기 두려웠다. 냉정한 사회에 부딪히기 싫었다. 애견 미용을 평생 하며 살아갈 자신도 없었고, 하기 싫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내 생각에 대한 것을 못 박았다.
나 애견 미용 안 할 거야. 그럼 뭐 할 건데? 편입 도전해서 미디어학과 진학하려고.
그래서 졸업하기 전에 소수 과외를 알아보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편입에 도전해서 4년제 대학에 가고 싶다고. 미디어학과를 들어가서 방송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면 어떤 길이든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아버지는 지방에 발령이 나신 상태라 먼 지역에 계셨고, 어머니 역시 만학도 전형으로 학교를 다니고 계셨다.
그렇기에 1년 정도는 집에서 나 혼자 지내며 공부를 해야 됐다. 아버지는 편입 도전에 허락을 해주시고 달마다 과외비를 보내주시며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셨다. 나는 소수 과외 모임에 들어가서 3월부터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나이대가 다양해서 걱정 없이 공부했던 것 같다. 내가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나보다 뒤늦게 도전하시는 분도 계셨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외계어를 듣는 것만 같았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 공부 못 했는데. 그럴 때면 선생님은 항상 말씀하셨다. 지금도 늦지 않았고, 내가 얼마나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 왔겠냐고. 먼저 편입에 합격한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안심을 시켜주셨다.
스톱워치로 하루를 시작하며 인증사진을 보내야 했다. 편입 시험을 보기 전까지 그렇게 지냈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창피한 이야기를 꺼내자면, 한 달간은 열심히 하다가 두 달 만에 포기했다. 나는 못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이 생각이 들었을 때, 과감하게 그만두었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스럽지만, 도전을 하지 않았다면 분명 지금 나이에 도전하겠다고 부모님 속을 썩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월말 평가 시험 때마다 꼴찌를 했다. 그래서 의아했다. 나는 매번 꼴찌인데 선생님은 왜 나를 자르시지 않는 걸까.
반대로 생각하면 나 역시도 그랬다. 나는 왜 그만두지 못하는 걸까. 솔직히 이야기하면 공부를 핑계로 사회로 나가는 것과 취업 준비 하는 것을 하기 싫어했다. 그래서 그 핑계로 편입 공부를 계속 붙잡고 있었다. 결국에는 아버지의 돈이 달마다 그냥 나가고 있었다.
영어 단어가 안 외워진다며 바닥에 구르면서 엉엉 울다가도 다시 볼펜을 붙잡았지만, 당시 좋아했던 방탄소년단 영상을 보기에 바빴다. 어쩔 때는 방탄소년단의 대규모 공연 소식에 티켓팅을 시도해서 공부한 다고 거짓말하고 공연을 보러 간 전적이 있다. 집이 공허할 때면 방탄소년단 영상을 틀어놓고, 단어 공부만 하기도 했다. 아니면 좀 있다 해야지, 조금만 더 보다 공부해야지 하면서 하루 종일 영상을 본 적도 있다.
그리고 나는 새벽에 노래를 들으며 팬픽을 썼었다. 새벽에 글을 쓰니 술술 써졌고,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면서 즐거워했다. 그러니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딴짓을 1년 가까이한 거다. 무척이나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나는 사실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나를 포기했지만, 내가 내 발로 직접 나가지 않아서 그냥 놔두고 있었던 것이다. 연말이 되어서 편입 시험이 다가왔을 시점에 돌아가면서 일대일 상담을 했는데 나는 못 받았다.
의문이 들었지만, 점수가 최하위이기 때문에 갈 수 있는 대학이 없어서 상담을 못 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전화 통화로 어느 대학을 갈 수 있겠다며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전화 통화 상담을 받았다. 그때 해주신 이야기가 있는데, 편입 시험 두 달 전에 찾아온 제자의 이야기였다. 항공과 학생이었는데 단어만 죽어라 하면서 공부하다가 결국엔 가고 싶은 학교를 갔다는 이야기였다.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더듬어보면 그런 류의 이야기였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최대한 단어를 외워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1년 가까이 딴짓을 했는데 뒤늦게야 공부한 다고 해서 술술 외워질 리가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아무튼 나는 시험을 보러 다니고 원서 넣은 대학교에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흑역사를 또 말하자니,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지는데, 사실 그 이후로 1년 더 도전했다. 그때는 진짜 마음을 먹고 공부를 했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지만, 과외 선생님이 요즘 핸드폰으로 인강을 찍고 있다며 나에게 영상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그래서 블로그에 들어가서 멍을 때리며 인강을 듣기도 했었다. 부모님의 지원 없이 공부해 보겠다고 대형병원 편의점에 들어가서 물류 알바일을 하기도 했었다.
공부와 알바 두 가지 동시에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알바는 관뒀지만. 왕복 두 시간이 넘는 거리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2020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2년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되고 살아오면서 가장 창피한 일이며, 부모님께 죄송한 일이지만 아마 다시 되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 같다. 그때 도전하지 않았으면, 도돌이표가 반복되어 지금 안 돌아가는 머리를 붙잡고 울면서 바닥에 뒹굴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그러셨다.
민혜야, 아빠가 젊은 시절에 과외를 했었는데 안 될 사람은 부모님께 가서 직접 말씀드렸어. 이 아이는 안 될 것 같다고. 근데 그 선생님은 얼마나 많은 제자를 가르쳤겠니? 진즉에 네가 어떤 애인지 알았을 텐데. 솔직히 사기라고 생각했어. 근데도 그냥 네가 후회할 것 같아서 놔뒀다.
불효자도 이런 불효자가 있을까.
그런데 그 이후 엄마가 나에게 제안하셨다. 방송대 들어가는 건 어때. 학사학위는 따고 싶다며. 그때 EBS의 다큐 3일 프로그램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유튜브로 방송대를 다니시면서 공부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징글징글하게도 보는 나는 '방송대 인식'을 재빨리 검색했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라는 결론을 냈다. 그래서 왜 인지 허탈한 마음으로 미디어학과에 원서를 넣고 지원했다.
그렇게 합격을 하고 나는 방송대 3학년 미디어학과 생이되었다. 이후 이 선택은 내 인생 중에 최고로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엄마에게 너무 감사한 일이다. 너무 많은 나이를 먹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 젊은 나이도 아니지만, 지금 까지 살아온 인생 중에서 허탕을 치고, 후회하고,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안다.
그래서 창피하지만 그게 나이기 때문에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숨기지 않고, 그저 그렇게. 무엇보다 글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되었으니, 여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