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불청객이다.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예의 없이 찾아든다. 포획되지 않은 야생의 날 것이다. 공포이고 두려움이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그 무엇이기를 바랐다. 그런 고통이 허락 없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나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아빠, 아빠, 아빠~”,
“엄마가 이상해요. 빨리 집으로, 빨리 와 주세요! 빨리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다. 무엇에 놀라 두려워 떠는 모습이었다. 평상시 조용한 성격의 아이답지 않았다. 그날부터 가족의 평범한 일상은 사라졌다. 아예 자치를 잃고 말았다. 병명 없는 아내의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쇠약해져만 갔다.
오십 대 줄에 들어선 몸의 신고식이었을까? 갱년기 때 있을 법한 여러 일들이 한꺼번에 폭탄처럼 쏟아졌다. 의사의 진단은 오진으로, 처방해 준 약은 부작용을 일으켰다. 아내의 육체와 정신은 갈수록 무너졌고 불면증과 병명 없는 호흡곤란과 마비 증세는 더 큰 고통으로 이어졌다.
백사장에 밀려드는 파도처럼 고통은 계속해서 짓눌렀고, 고통의 시간과 자리는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 되었다. 질문의 질문이 이어졌고, 알 길 없는 고통의 원인과 그 이유를 끝없이 갈망했다. 하지만 나는 차 안(此岸)의 세계 한복판에 단지 홀로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고통은 그러한 것일까, ”눈뜬 이“라는 뜻의 부처 역시 인간이 처해 있는 실존적인 상황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인 것을 보고, 네 가지의 진리 중 그 처음을 ‘고제(苦際)’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고통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찾기 위해 도제를 외쳤던 그 외침 말이다.
”인생은 대단히 복잡하다 “ 는 어느 책의 글귀에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복잡한 인생사를 하나의 언어로, 답만으로,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 어떤 인과율, 권선징악, 규범적 지혜로 풀어낼 순 없는 것이다. 욥의 경우가 그러하지 않은가, 그의 경우는 ‘반성적 지혜’를 안긴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던 수년의 시간을 버텨내고 또 버텨냈다. 자녀들의 희생이 컸고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 사랑이라는 단어로 하나가 됐다. 그사이 잃은 것도 많고. 얻은 것도 많았으니, 불청객이 불러들인 선물일까, 우리 가족은 사랑으로 하나가 됐다.
불청객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세상살이다. 고통에서 피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고통은 모든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 ‘신분고하(身分高下)’를 막론하고 찾아든다. 고통 앞에서 모든 이는 평등하다는 마광수의 글이 생각났다. 그럼에도 나는 불청객 손님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