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것들로 만드는 적지 않은 아름다움.
골목을 걷다가 빌라 뒤 회색 벽에 빛나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그곳에 꽃이 있었다. ‘돌아보니 그곳에 꽃’, 표현이 마음에 든다.
건물 뒤라 어두운 공간이었는데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듯이 꽃에게만 햇빛이 내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작지만 단단하게 곧고, 생생하게 어여쁘다.
시멘트 바닥에서 용케 활짝 핀 꽃에서는 지나칠 수 없을 만큼 빛이 났다.
그 자리에 있어 빛나는 것이 있다.
더 넓은 화단에 있었다면 화려한 꽃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았을 테고
테이블 위 꽃병에 있었다면 금세 시들었겠지, 아마.
나는 이 꽃이 여기서 어떻게 피어날 수 있었는지 안다.
뿌리 내릴 땅 한 뼘, 내게 향하는 한 줄기 햇빛에도 감사하며 자신의 영양분으로 오롯이 받아들였다.
가진 것이 적다고 불평하기보다 가진 것을 허투루 쓰지 않은 덕분이다.
뛰어난 화려함이나 멀리 가는 향기 없이도 지나가던 걸음 멈추게 만드니 절대 그가 가진 아름다움이 적지 않다.
나 또한 가진 것이 별로 없을 때 그나마 움켜쥔 것들로 연료를 삼았다.
당장 차비가 없어도, 배움을 멈춰야 할 때도, 걷는 걸 좋아하고 꿈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할 때 주어진 것은 너무나 크고 소중해서,
어떻게든 그것을 쥐어 희망으로 만들 수 있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해 많은 걸 가졌다. 뿌리 내릴 수 있는 땅도 넓어졌고 햇빛도 충분하다.
그런데 그 간절했던 것들을 이제 시간과 함께 탕진한다. 땅 위치가 별로라고, 빛이 너무 눈부시다고
꽃 피우기 힘든 핑계를 만들어내기 바쁘다. 움켜쥐지 않아도 되니 희망을 만들어낼 노력도 없다.
더 많은 것을 쥐고도 더 생생하게 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처해서 시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에 서 있는지 분간하기 힘들 때, 발치에 있는 소박한 것이 일러주기도 한다.
그것들을 잘 관찰하는 일이 나를 관찰하는 일일지 모른다.
꽃이 일러 주는 이야기를, 아직 들을 수 있어 다행이다.
#.09 아홉 번째 번짐.
쓰다듬고 싶은 모든 순간 _ 민미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