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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ug 24. 2018

복음과 변론

복음주의자들은 어떻게 복음을 변론했는가?_이재근

제4강  복음주의자는 어떻게 자기 신앙을 변호했는가?

20140708_기독느헤미야

이재근 박사님(에딘버러ph.D)

'계몽주의는 어떻게 복음주의의 '적대적 동반자'가 되었나? ; 20세기 복음주의 변증학 태동의 역사적 배경


1. 계몽주의의 전제 ; 프란시스베이컨(1561-1626), 르네데카르트(1596-1650)에서 기원하였다.

- 이성의 시대

-주체와 객체

-기계론적 인과율 도임

-진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

-모든 지식, 특히 과학적 지식이 사실적이며 가치배제적이고 냉정하게 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음.

- 세상의 모든 문제는 원칙적으로 해결가능한 것이라 인식하였음.

-사람을 해방된 자율적 개인으로 규정하였음



2. 계몽주의에 대한 서구 기독교의 반응

- 종교와 이성 분리

종교와 이성을 분리시키고 종교를 감정과 경험에 위치시키려는 성향이 나타난다.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의 부흥, 낭만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인 슐라이어마허가 있다.

고립주의의 입장이 발전하게 되는 근본적인 관점이 된다.


- 종교와 사유화 및 고립주의


계몽주의를 통해서 진행되는 이성 우선주의에 영향으로 밀려난 종교적인 분위기를 대응하지 않고 고립되는 방식으로 경건주의가 발전하게 된다.

영적인 것과 부흥으로만 집중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서 이성의 도전에 대한, 즉 인문주의와 계몽주의에 도전에 대한 자기도피의 수단으로 경건주의가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예로는 경건주의적 근본주의자들과 아나베티스트 일파(아미쉬)가 있다.



-신학의과학화 선언을 통한 저항


개신교 복음주의 변증학이 그 예이다. 이성이라는 동등한 무기를 가지고 세상과 싸우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인 변증체계로는 19세기 미국 구프린스턴신학, 오늘날의 장로교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이다.

비비워필드와 같이 캘빈주의 신학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불리는 사람들이 변증학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캘빈과 내용은 같지만 방법론은 다를 수 있다. 과학과 신학을 변증법 안에서 통합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성경은 모든 정보의 저장고라는 표현을 쓰면서, 성경은 백과사전과 같은 통합질서의 저장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심리학과 생물학, 물리학 등의 모든 계몽주의의 공격으로 부터 성경은 방어하고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이성의 세속화 수용


원래 계몽주의의 시초인 데카르트 역시도 완전 무신론자나 이교도는 아니었다. 기독교적 베이스를 일부 가지고 있었고 그로부터 적용과 이해의 툴을 상당부분 가지고 온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무조건 배격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이신로체계 안에서 유일신이나, 신의 존재 인정은 가능하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기독교 체제 안에서도 세상의 흐름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운동과 역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신론 체계에서 계몽주의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하버드에서도 나오게 된다.

1930년대에는 고등비평이 시작되면서 여러갈래의 방법론이 생겼는데 진화론의 발전으로 사회진화론이나 자유주의등이 발생하게 된다.

결국 계몽주의에 대한 반응에 따라서 기독교의 모든 부분의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기독교의 기본뿌리는 계몽주의와 많이 맞닿아 있었지만, 시대정신이라는 미명아래 계몽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세속화가 진행되었다.



3. 복음주의와 계몽주의의 관계 : 적과의 동침?


복음주의를 탄생시킨 배경에는 부흥운동이 있다. 부흥운동을 생각할 때 대부분은 지적운동에 대한 결과로서의 부흥운동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주의가 계몽주의와 연결될 수 있을까? 반항이나 대립  혹은 무시 등의 어떤 입장에서라도 말이다.

저항의 입장에서 이성의 흐름보다는 감성과 영성의 측면에서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복음주의가 부흥운동으로 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 18세기 복음주의(1차 대 각성운동과 감리교 운동


정설은 의식적이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계몽주의의 구도 내에서 복음주의 부흥을 이해하고 촉진하기를 기대했다고 볼 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드 : 객관과 주관의 조화를 주장하고, 감정과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이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철저하게 이성적이었다. 다시 말하면 철저하게 계몽주의의 측면에서 변증의 방법론을 가지고 이성과 신앙, 감정과 지혜를 연결시켰다. 스스로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표현되는 방식은 무의식적으로 계몽주의와 연결된다고 할수 있다. "경험없는 성경은 공허, 성경없는 경험은 맹목"이라고 표현하였다.

존/찰스 웨슬러 : 옥스퍼드 출신의 지식인이다. 절제세련논리질서인간가능성을 강조하였고 부흥을 추진하였다.



감리교


감독이 통치하는 체제라고 보통 불리지만 사실은 장로교에 대한 반동으로 감리교가 생겼다. 메소디스트라고 하는 것은 방법론에 대해서 철저하게 경건생활을 지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리교라는 것은 한국적상황에서 번역된 것이지, 사실은 감리교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는 않는다.


- 19세기 복음주의(2차 대각성 선교, 사회운동)


빅토리아 시대는 신앙적으로 볼 때 제일 중요한 시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산층 계몽주의의 진보, 계몽, 해방, 개척과 개발 유산을 상호 공유하며 세기적인 혜택과 흐름을 타게 된다.

윌리엄 캐리 : 1793년 "하나님으로 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큰일을 시도하라"라고 하는 부분이 가장 인상에 남는 윌리엄 캐리의 명언이다. 제임스 쿡이 항해하면서 오세아니아를 발견하고 시대정신으로 발견과 진보, 인간의 가능성을 과시하려는 욕망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영국이 제국주의적으로 진출하던 시기에 윌리엄 캐리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편승하여 진보의 입장에서 선교와 전도를 이야기 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확장이 현대 선교의 시작이라고할 수 있다.

아더 피어슨 ; 1888 "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eis Generation이라는 슬로건을 쓰고 svm이라고 하는 학생자원자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피어슨대학이 한국에 있었는데 지금은 평택대학교로 바뀌었다. 아더 피어슨은 무디와 같이 활동을 했다. 한국으로 들어온 대부분의 선교사들(70%)은 svm출신이다.  아더피어슨은 낙관적으로 미래를 바라보면서 이세대 안에 세계복음화를 이루겠다는 구호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구호의 기저에 깔려 있는 생각은 계몽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원선교다체voluntary societies의 급증, 금주와 노예제폐지, 성경번역, 문서선교 등 수 많은 선교단체들이 생겨난다. 1930-40년대 생겨난다. 찰스피니의 2차 대각성 운동 이후에 이와 같은 파라처지들이 생겨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원단체라는 것이다. 스스로 자원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관점이 깔려 있었는데, 이 근본은 바로 계몽주의라고 할 수 있다.

1차 대각성 운동은 캘빈주의 전통(하나님의절대적 주권 아래서 일어나는)이라면 2차 대각성운동은 인간이 스스로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상으로 무장하고 신팔라기우스주의로 발전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극단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어느정도는 배경적으로 납득이 가기도 한다. 인간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전적타락에 대한 반응이라기 보다는 신학적변용으로 모든 부분이 타락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이 기반이 되어서 인간중심의 계몽주의사상과 시너지 효과를 내고 시대적 흐름을 만들어냈다라고 하는 설명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후천년설의 유행 : 남북전쟁이전까지 1861-1865년까지 하나님나라의 지상 임재를 강조하는 낙관적 종말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임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대부분은 계몽주의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민네이션

결국 다시 우리는 사상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사상의 향연으로 부터 시작되는 변화를 읽고 시대정신의 밑바닥에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내야 하지 않는가?

계몽주의에 대한 반응이라고 해서 다 잘못된 것인가? 기존에 유행했던 것이

2에서 3세기 교부들이 헬라철학에 맞서서 교부철학을 만들었다면, 19세기에서 20세기에는 복음주의자들은 계몽주의에 맞서서 변증학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책은 그 사람이 속해 있던 단체의 정체성과 시대상황이 주는 시대정신에 상당한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이해할 때, 혹은 그 사람의 책을 읽을 때, 그것 자체로 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의 도전은 성경을 근거로 하는 모든 세계관을 쓰레기처럼 무용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계몽주의는 근본적인 사유자체를 흔들어놓는 변화였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헬라철학의 부활과 인간의 발견이었다.

왜 나는 변증서들이 눈에 안들어오는가? 했다. 그러나 이제 알았다. 변증서는 변증서일뿐, 변증서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과 피로사회, 성과사회, 투명사회가 가지고 있는 갖가지 일상적 도전에 대한 반응은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과거에 기대어 현실을 해결하려고만은 할 수 없다.





변증서


존스토드의 변증서는 모든 체계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레슬리뉴비긴의 변증서는 따뜻하고 애정이 느껴진다. 세속화에 대한 비판력을 잃어 버린 영국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선교적 입장에서

cs루이스 변증을 변증으로 하지 않고 문학으로 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변증의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변증서의 기본적인 교단과 배경 그리고 신관과 인간관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일반삶이 달라진다.



20세기 개신교 복음주의 변증학의 대표자들


복음주의자들은 행동주의와 십자가, 그리고 성경과 회심주의의 4가지 필라를 통해서 신앙을 살아내기 때문에 시대적 흐름인 계몽주의에 대해서 여러가지의 반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에서의 변화 :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다양한 보수적변용, 현대주의와 근본주의의 논쟁이 유산으로 남게 되었고 합리적인 변증이 일어났다. 미국의 극단주의자들은 영국보다는 더 치열하게 현실과 싸웠다.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의 틈바구니 속에서 비주류로서 정체성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더욱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1. 코렐리어스 반틸


네덜란드계 기독교개혁교회의 유산인 존더반, 어드먼드 등 출판사를 만들고 칼빈신학교와 칼빈대학의 대표자가 된다.

캘빈주의실천으로 교단을 이어가기 위해서 목회자 양성과정을 만드는데 이것이 캘빈신학교가 된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이 네덜란드의 다른 계파는 영역주권이라는 측면에서 사회변혁과 국가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틸의 경우에는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신학을 지키고 전수하려는 노력을하게 된다.

프린스턴신학교 박사이며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 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이동하여 웨스트민스터 힌학의 실질적인 대표자가 된다.

철두철미한 개혁신학(전적타락, 인간의 절대 무능)에 근거하여 전제주의 변증학을 추구한다.

타락한 인간 이성의 중립성과 고유지대는 없으므로, 기독교가 합리적이라는 증거를 찾아 기독교의 타당성을 논증한다.

전통적 증거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카톨릭 변증학이라고 하여 불신자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반틸의 변증학을 전제주의적 시점에서 사사을 전개하는데, 19세기의 수많은 세속화된 반계몽주의적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 전제주의적 시점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 그래서 변증을 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완전히 폐기될 수는 없다.

반틸의 입장에서 중간지대를 만들어서 계몽주의와 복음주의의 동행을 추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변증학의 시작인 계몽주의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배경을 배격하고 복음, 성경 그자체로써의 중요성을 가지고 케리그마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전제주의적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반틸에 의해서 기독교변증의 대부분은 거짓된 신조와 사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반틸은 바르트와 죽을 때까지 사상적인 대립을 한다.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서 반틸의 영향력에 의해서 20세기의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반틸의 입장에서 변증학을 하게 된다.

3위 일체 안에서만 변증학은 가능하다라고 하면서 대부분의 변증학의 싹을 잘라버린다.

CRC라는 네덜란드 개혁파의 미국내 교단의 대표적 학자이다.

불신자들을 설득하는것은 불가능하며, 오직 삼위일체에 기반한 기독교가 진리라는 것과 다른 체계가 허위라는 것을 전제할 때에만 참된 기독교 변증학이 성립된다고 생각했다.

카넬, 헨리, 쉐퍼에게 영향을 끼쳤음.


2. 에드워드 카넬 : 저통신학 변호자


3. 칼 헨리 ; 계시 지향 변증가


미국 신복음주의 창시자이자 지성의 대부

휘튼에서 소득 클락에게서 배웠다.

젤레마와 반틸에서 영향을 받아서 보스턴대 박하 후 풀러 신학교의 창립교수가 된다.


4. 프란시스 쉐퍼 ; 세속 문화에 대한 복음주의 대중 변증가  


웨스트민스터에서 반틸에게 배우던 중에 이탈하여 페이스신학교와 성경장로교회BPC에 합루하게 된다.

칼 먜킨타이어예 의햬서 보수적인 단체인 ICC가 만들어 지고 여기에서 타락한 유럽의 자유주의진영에 대한 근본주의 선교사로 파송된 사람이 바로 쉐퍼이다.

그러나 실제로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쉐퍼는 현실적인 전도의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1955년 ICCC이탈 이후 스위스 로잔에 라브리를 설립하여서 문화변증학을 시도한다.

이전의 변증가들과 다르게 문화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대중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전문적인 학자들이 볼 때는 타당하지 않은 이야기가 많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한 비판으로 거대한 흐름을 비판했다.

쉐퍼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노년에는 신근본주의 측면에서 낙태와 현실의 문제를 극단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이 때는 대중적인 인기를 잃게 된다.



5. 앨빈 플란팅가 ; 복음주의 철학자


복음주의마피아라고 할 만큼 지성적으로 최고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와 함께 복음주의 신학계 경계를 넘어 세속 철학계에까지 개혁파인식론의 하구적 신뢰성을 보증한 네덜란드개혁파 철학자였다.



*영국 : 계몽주의 합리적 변증보단느 포스트모던적 문화 상황에 대한 변증적 기여를 하게 된다.



1. 레슬리 뉴비긴 ; 서구문화에 파송된선교사


에큐메니컬진영에서 활동했다.


서구문화의 세속화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선교 후 영국이 바로 선교지라는 것을 깨닫고 수 많은 일상의 문제를 변증의 대상으로 잡고 공적진리로서 복음과 복음의 대진리로서 교회, 고교회론을 강조했다.



2. CS루이스 ; 기독교적 상상력의 시도


북아일랜드 출신의 옥스퍼드/케임브릿지 영문학자이다.


옥스퍼드 연구원 시절(31세) '마지못한 회심'을 하지만 이후에는 실제로 회심했다고 고백한다.


상징과 은유에 담긴 메시지를 활용하는 고도로 암시적이고 내제적인 기독교를 변증하게 된다.


나니아연대기를 썼다.


성공회 신자이지만 고교회주의자로써 카톨릭 신학에 더 가까워지게 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복음주의자는 아니다. 성경의 무오류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미국에서 더 인기가 많다.


미주


-아나배프티즘


아나뱁티스트(Anabaptist)란?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재세례신앙) 운동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철저한 제자도의 정신을 기초로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던 소수 급진종교개혁자들의 진정한 교회 개혁 운동이었습니다.



재세례신앙(anabaptism, rebaptism : 다시 세례를 주었던)의 신자들은 교회가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가로부터의 자유로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개인의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관습적인 유아세례는 제자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교회의 본질과 그리스도인의 신자됨을 심각하게 훼손한다고 믿었기에 유아세례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국가교회는 이를 반종교적 이단 행위로써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국법을 어기는 일로 간주했기에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은 수많은 핍박과 박해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아나뱁티스트 교회의 정체성은 성인세례를 바탕으로 한

“신자들의 교회”에 있으며 이는 카톨릭 교회뿐 아니라 루터와 칼빈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와도 구분됩니다.



아나뱁티스트 교회는 기독교의 뿌리를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찾아야 한다고 믿었고 따라서 근본적 개혁(radical reformation)을 표방해왔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faith) 뿐 아니라 제자로서의 따름(following)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나뱁티스트 교회는 “자유교회(Free Church)”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성경말씀에 따라 세상적 권세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명령과 국가에 주신 명령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다고 믿습니다.



아나뱁티스트 교회는 또한 “전통적 평화교회 (Historic Peace Church)”로서 언제 어디서나 사랑의 최고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며 사랑과 평화의 윤리적 삶을 살며, 비폭력적 갈등해결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 중에는 메노나이트(Mennonites), 아미쉬(Amish), 후터라이트(Hutterites), 그리스도 형제단(Brethern in Christ) 등이 있습니다.



메노나이트는 16세기 네덜란드의 재세례신앙 운동의 지도자였던 메노 사이먼스(Menno Simons)를 따랐던 재세례신자들을 일컬었던 말로써 오늘날에는 메노나이트 교회와 교인들로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후터라이트는 초창기에 16세기 모라비아에서 공동의 재산을 소유하고 물질을 나누던 제세례신자들로, 야곱 후터(Jacob Hutter)의 지도를 받았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아미쉬는 17세기 스위스 제세례신자들 중에서 야곱 암만(Jacob Ammanm)의 지도를 따라 나온 사람들에서 시작되었고, 세상의 죄악성에서 분리되어 신약성경적인 생활에 헌신하려는 사람들입니다.



- 계몽주의


계몽주의(啓蒙主義)란 17, 18세기에 유럽과 신세계를 휩쓴 정치, 사회, 철학, 과학 이론 등에서 광범하게 일어난 사회 진보적, 지적 사상운동으로, 계몽사상이라고도 부른다. 계몽주의는 교회의 미신적인 면과 독단적인 해석에 대해 반란하였다. 대신 실제적인 도덕을 지향하였으며 형이상학보다는 상식, 경험, 과학을, 권위주의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특권보다는 평등한 권리와 교육을 지향하였다. 이 계몽주의는 1760년경 이후 강력히 대두되게 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은 이성으로 적법성을 판단할 수 있으며, 이성은 권위의 요소이자 권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이 이성은 인간과 세계의 보편적 원리나 자명한 법칙을 발견할 수 있게 했으며 진보를 확신토록 했다.



독일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에서 계몽주의 운동이 거의 동시에 이런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대서양 주변 국가에서 일어난 각종 혁명을 통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러시아, 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도 이런 움직임을 따랐으며, 라틴 아메리카 역시 아이티 혁명을 통해 이런 움직임에 동참했다. 미국 독립 선언과 영국 권리 장전, 프랑스 인권 선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제정한 1791년 5월 3일 헌법은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1]



"계몽주의" 또는 "계몽주의 시대"라는 용어는 어떤 하나의 운동이나 사상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속하는 사상가들은 서로 충돌되는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어떤 사상의 집합체라기 보다는 가치의 집합체에 더 가까웠다. 전통적 관습, 의례, 도덕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계몽주의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여러 대립하는 철학 사이에도 비슷한 부분이 상당했다. 심지어 계몽주의에 반대했던 철학자들까지 계몽주의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이성의 시기"는 보통 계몽주의 사상의 전주곡으로 여겨진다.[2]



-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년 10월 5일 – 1758년 3월 22일)는 미국 식민지 시대의 장로교 목사, 신학자, 원주민 선교사이다. 에드워즈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독창적인 철학적 신학자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1] 미국 3대 부통령과 뉴욕 주 주지사를 지낸 에런 버의 외할아버지였다.



매우 다양한 분야에 관한 저술을 남겼으나, 주로 개혁주의 신학과 신학적 결정론의 이론적 바탕, 청교도 전통에 관한 저작들로 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유명한 설교인 "분노한 하나님 손에 있는 죄인들"은 대각성 운동의 시발점으로 인정되고 있다.[2] 그는 1758년 1월 뉴저지 대학교(College of New Jersey, 지금의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으나 천연두 예방 인두법 시술의 부작용으로 3월 22일 사망하였다.[3][4]



그의 딸 에스더 에드워즈(Esther Edwards)의 아들이 미국 부통령을 지낸 에런 버 주니어(Aaron Burr. Jr, 1756 - 1836)이다.



- 찰스 웨슬러


웨슬리 [Charles Wesley]잉글랜드 목사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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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요약정보

태어난 때 1707. 12. 18

태어난 곳 잉글랜드 링컨셔 엡워스

죽은 때 1788. 3. 29

죽은 곳 런던.

소속 국가 영국

소속 국가 부속정보 잉글랜드

직업 목사

1707. 12. 18 잉글랜드 링컨셔 엡워스~ 1788. 3. 29 런던.

영국의 목사, 시인, 찬송가 작가.

웨슬리

웨슬리

형인 존 웨슬리와 함께 영국국교회에서 감리교 운동을 시작했다. 새뮤얼 웨슬리와 수재나 웨슬리의 막내 아들이자, 살아 남은 형제들 가운데 셋째인 웨슬리는 1716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입학했고, 1726년에는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치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고전을 영시로 번역했다. 1728~29년에 걸친 겨울에 그는 영적인 각성을 경험하고 다른 2명의 학부생과 함께 '신성 클럽'을 구성했다. 1735년 그는 조지아로 선교하러 가는 형 존 웨슬리를 돕기 위해 성직 임명을 받았다. 형보다 극단적인 감정에 좌우되는 경향이 심했던 찰스 웨슬리는 신앙적인 절망과 신체적인 탈진으로 불과 몇 달을 못 넘기고 영국으로 귀향했다. 형인 존과 마찬가지로 그는 모라비아교도들의 도움으로 영적인 평안을 발견했다. 성신강림대축일이었던 1738년 5월 21일에 그는 자신이 '하느님과 평화로운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감리교 신조를 매우 설득력있게 표현하는 설교자가 되었고 복음의 내용을 찬송가로 옮겼는데, 이것은 복음전도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1749년에 세라 그윈과 결혼해서 8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그중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살아 남았다. 찰스는 브리스틀과 런던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형이 그레이스 머리와 결혼하는 것을 막으려 했기 때문에 둘의 관계는 멀어졌고, 찰스는 감리교 단체들의 활동적인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동시에 그는 영국국교회에 보다 깊이 애착을 갖게 되었으며, 존이 설교자들을 임명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감리교 전도자이며 찬송가 작가로서 벌인 그의 활동은 사람들에게 항상 기억되어왔다. 웨슬리는 4,500여 곡 이상의 찬송가를 발표했고, 3,000여 편의 원고를 남겼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그중 일부를 특별히 작곡했다. 웨슬리의 찬송 중에서 널리 알려진 것들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 Love divine, all loves excelling〉·〈천사 찬송하기를 Hark, the herald angels sing〉·〈예수 부활했으니 Christ the Lord is ris?'n today〉·〈그리스도의 군병들아, 일어나라 Soldiers of Christ, arise〉·〈만유의 주 앞에 Rejoice, the Lord is king〉·〈비바람이 칠 때와 Jesu, lover of my soul〉 등이 있다(한국어 곡명은 통일찬송가를 따랐음).



-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 1741 ~ 1770



'모든 사랑, 모든 영광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 그의 일기 중 하나



"나는 조금씩 자고 조금씩 먹었으며 아침부터 한 밤중까지 일했다..."



실제 그 아내와 결혼했는데 3년이 지나 아들을 낳았다

설교를 하기 위해 출타하였는데 아기가 죽었고

아내와 함께 아기의 죽음을 애도하기는 했으나

함께 있어달라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울며 씨를 뿌리는 자...'[시편 126] 말씀을 인용하며

여느 때처럼 설교를 떠났다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침착하고 평정한 태도, 그리고

환난 가운데서 기뻐하는 그의 자세가 놀랍다고 어떤 사람은 말했다



감리교 수장자리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며 그는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꼐서 영광 받으시게 하라

내 이름은 모든 곳에서 죽어 없어지게 하고 내 친구들도 나를 잊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복되신 예수의 대의가 진작될 수 있다면..."



결국 감리교 수장자리는 요한 웨슬러가 되었다..



그가 매일 자기의 삶을 점검하는 '확인 목록'(checklist)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나는 개인 기도 시간에 뜨겁게 기도했는가?

2. 정해진 기도 시간을 지켰는가?

3. 모든 시간을 아꼈는가? 매시간 부르짖었는가?

4. 모든 대화나 행동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심사숙고했는가?

5. 어떤 기쁨 후에 즉시 감사했는가?

6. 하루의 일을 계획 가운데 진행했는가?

7. 모든 면에 검소하고 침착했는가?

8. 무슨 일을 행할 때 열심히 혹은 힘 있게 행했는가?

9. 말하거나 행함에 있어서 온유하고, 명랑하고, 붙임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였는가?

10. 다른 이들에 대하여 교만하거나, 허탄하게 굴거나, 참지 못하거나, 투기하지는 않았는가?

11.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자신을 돌아 보았으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잠자는 일에 있어서 절제가 있었는가?

12.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 시간을 드렸는가?

13. 연구하는 일에 부지런했는가?

14.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친절하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는가?

15. 나의 모든 죄를 고백했는가?



- 감리교


감리교회(監理敎會, 영어: Methodist Church)는 성서를 중심으로 한 이성, 전통, 체험을 기독교의 근간으로 이해하는 복음주의적이며 경건한 신학적 입장을 가진 개신교 교파이다.



신학적으로는 전통을 수용하고 있으며, 교회 구조는 공교회(보편교회)의 구조인 감독제 교회이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방회의 감리사, 대규모 구역인 연회에 감독이 있는 교회구조를 가졌다. 감독은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연회의 성직자 안수와 주요 의사결정을 내린다.



18세기 성공회 성직자였고 신학자인 존 웨슬리(영어: Rev. John Wesley)의 복음주의 운동과 사회복음 운동, 부흥 운동으로 등장한 개신교 교파이다. 성공회 성직자이자 신학자였던 존 웨슬리는 영국이 신앙적인 침체기에 빠져 있을 당시,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조지 휘트필드등 옥스퍼드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클럽을 조직했다. 그들은 클럽활동을 통해 성경을 연구하고 병자와 빈민, 감옥에까지 방문하여 전도에 힘썼다. 격식을 중시하고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특징이었으며 이는 감리교회의 시초가 되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7천5백만명이 넘는 신도들이 있는 개신교 교회로 폭넓은 신학적 토양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영국과 미국, 남미에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활동을 펼치고 있다.



- 아더 피어슨


아더 피어슨(Arthur Tappan Pierson)(1837-1911)은 미국 장로교회 소속 목사로 1만 3천회 이상 설교하고, 5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한 강해설교자이다. 그의 설교와 성경강해는 미국 외에도 스코틀랜드와 영국에까지 널리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다. 그는 조지 뮬러와 무디, 스펄전과 아도니람 저드슨 등과 폭넓게 교제했으며, 1891년부터 1893년까지 스펄전을 대신해서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교회에서 설교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는 세계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상당히 큰 영향력을 미쳤다. 19세기 말에 학생선교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고, 1880년부터 죽을 때까지 해외선교에 주력해서 미국이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영국을 직접 방문해서 뮬러와 오랫동안 친분을 쌓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뮬러가 세상을 뜨자, 뮬러의 사위이자, 자신의 막역한 친구인 제임스 라이트의 추천으로 뮬러의 공식 전기인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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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8_기독느헤미야

이재근 박사님(에딘버러ph.D)

'계몽주의는 어떻게 복음주의의 '적대적 동반자'가 되었나? ; 20세기 복음주의 변증학 태동의 역사적 배경



1. 계몽주의의 전제 ; 프란시스베이컨(1561-1626), 르네데카르트(1596-1650)에서 기원하였다.

- 이성의 시대

-주체와 객체

-기계론적 인과율 도임

-진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

-모든 지식, 특히 과학적 지식이 사실적이며 가치배제적이고 냉정하게 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음.

- 세상의 모든 문제는 원칙적으로 해결가능한 것이라 인식하였음.

-사람을 해방된 자율적 개인으로 규정하였음



2. 계몽주의에 대한 서구 기독교의 반응

- 종교와 이성 분리


종교와 이성을 분리시키고 종교를 감정과 경험에 위치시키려는 성향이 나타난다.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의 부흥, 낭만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인 슐라이어마허가 있다.


고립주의의 입장이 발전하게 되는 근본적인 관점이 된다.


- 종교와 사유화 및 고립주의


계몽주의를 통해서 진행되는 이성 우선주의에 영향으로 밀려난 종교적인 분위기를 대응하지 않고 고립되는 방식으로 경건주의가 발전하게 된다.


영적인 것과 부흥으로만 집중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서 이성의 도전에 대한, 즉 인문주의와 계몽주의에 도전에 대한 자기도피의 수단으로 경건주의가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예로는 경건주의적 근본주의자들과 아나베티스트 일파(아미쉬)가 있다.



-신학의과학화 선언을 통한 저항


개신교 복음주의 변증학이 그 예이다. 이성이라는 동등한 무기를 가지고 세상과 싸우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인 변증체계로는 19세기 미국 구프린스턴신학, 오늘날의 장로교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이다.


비비워필드와 같이 캘빈주의 신학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불리는 사람들이 변증학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캘빈과 내용은 같지만 방법론은 다를 수 있다. 과학과 신학을 변증법 안에서 통합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성경은 모든 정보의 저장고라는 표현을 쓰면서, 성경은 백과사전과 같은 통합질서의 저장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심리학과 생물학, 물리학 등의 모든 계몽주의의 공격으로 부터 성경은 방어하고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이성의 세속화 수용


원래 계몽주의의 시초인 데카르트 역시도 완전 무신론자나 이교도는 아니었다. 기독교적 베이스를 일부 가지고 있었고 그로부터 적용과 이해의 툴을 상당부분 가지고 온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무조건 배격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이신로체계 안에서 유일신이나, 신의 존재 인정은 가능하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기독교 체제 안에서도 세상의 흐름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운동과 역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신론 체계에서 계몽주의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하버드에서도 나오게 된다.


1930년대에는 고등비평이 시작되면서 여러갈래의 방법론이 생겼는데 진화론의 발전으로 사회진화론이나 자유주의등이 발생하게 된다.


결국 계몽주의에 대한 반응에 따라서 기독교의 모든 부분의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기독교의 기본뿌리는 계몽주의와 많이 맞닿아 있었지만, 시대정신이라는 미명아래 계몽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세속화가 진행되었다.



3. 복음주의와 계몽주의의 관계 : 적과의 동침?


복음주의를 탄생시킨 배경에는 부흥운동이 있다. 부흥운동을 생각할 때 대부분은 지적운동에 대한 결과로서의 부흥운동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주의가 계몽주의와 연결될 수 있을까? 반항이나 대립  혹은 무시 등의 어떤 입장에서라도 말이다.


저항의 입장에서 이성의 흐름보다는 감성과 영성의 측면에서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복음주의가 부흥운동으로 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 18세기 복음주의(1차 대 각성운동과 감리교 운동


정설은 의식적이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계몽주의의 구도 내에서 복음주의 부흥을 이해하고 촉진하기를 기대했다고 볼 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드 : 객관과 주관의 조화를 주장하고, 감정과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이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철저하게 이성적이었다. 다시 말하면 철저하게 계몽주의의 측면에서 변증의 방법론을 가지고 이성과 신앙, 감정과 지혜를 연결시켰다. 스스로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표현되는 방식은 무의식적으로 계몽주의와 연결된다고 할수 있다. "경험없는 성경은 공허, 성경없는 경험은 맹목"이라고 표현하였다.


존/찰스 웨슬러 : 옥스퍼드 출신의 지식인이다. 절제세련논리질서인간가능성을 강조하였고 부흥을 추진하였다.



감리교


감독이 통치하는 체제라고 보통 불리지만 사실은 장로교에 대한 반동으로 감리교가 생겼다. 메소디스트라고 하는 것은 방법론에 대해서 철저하게 경건생활을 지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리교라는 것은 한국적상황에서 번역된 것이지, 사실은 감리교라는 것은 이치에 맞지는 않는다.



- 19세기 복음주의(2차 대각성 선교, 사회운동)


빅토리아 시대는 신앙적으로 볼 때 제일 중요한 시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산층 계몽주의의 진보, 계몽, 해방, 개척과 개발 유산을 상호 공유하며 세기적인 혜택과 흐름을 타게 된다.


윌리엄 캐리 : 1793년 "하나님으로 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큰일을 시도하라"라고 하는 부분이 가장 인상에 남는 윌리엄 캐리의 명언이다. 제임스 쿡이 항해하면서 오세아니아를 발견하고 시대정신으로 발견과 진보, 인간의 가능성을 과시하려는 욕망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영국이 제국주의적으로 진출하던 시기에 윌리엄 캐리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편승하여 진보의 입장에서 선교와 전도를 이야기 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확장이 현대 선교의 시작이라고할 수 있다.


아더 피어슨 ; 1888 "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eis Generation이라는 슬로건을 쓰고 svm이라고 하는 학생자원자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피어슨대학이 한국에 있었는데 지금은 평택대학교로 바뀌었다. 아더 피어슨은 무디와 같이 활동을 했다. 한국으로 들어온 대부분의 선교사들(70%)은 svm출신이다.  아더피어슨은 낙관적으로 미래를 바라보면서 이세대 안에 세계복음화를 이루겠다는 구호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구호의 기저에 깔려 있는 생각은 계몽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원선교다체voluntary societies의 급증, 금주와 노예제폐지, 성경번역, 문서선교 등 수 많은 선교단체들이 생겨난다. 1930-40년대 생겨난다. 찰스피니의 2차 대각성 운동 이후에 이와 같은 파라처지들이 생겨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원단체라는 것이다. 스스로 자원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관점이 깔려 있었는데, 이 근본은 바로 계몽주의라고 할 수 있다.


1차 대각성 운동은 캘빈주의 전통(하나님의절대적 주권 아래서 일어나는)이라면 2차 대각성운동은 인간이 스스로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상으로 무장하고 신팔라기우스주의로 발전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극단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어느정도는 배경적으로 납득이 가기도 한다. 인간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전적타락에 대한 반응이라기 보다는 신학적변용으로 모든 부분이 타락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이 기반이 되어서 인간중심의 계몽주의사상과 시너지 효과를 내고 시대적 흐름을 만들어냈다라고 하는 설명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후천년설의 유행 : 남북전쟁이전까지 1861-1865년까지 하나님나라의 지상 임재를 강조하는 낙관적 종말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임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대부분은 계몽주의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민네이션


결국 다시 우리는 사상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사상의 향연으로 부터 시작되는 변화를 읽고 시대정신의 밑바닥에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내야 하지 않는가?


계몽주의에 대한 반응이라고 해서 다 잘못된 것인가? 기존에 유행했던 것이


2에서 3세기 교부들이 헬라철학에 맞서서 교부철학을 만들었다면, 19세기에서 20세기에는 복음주의자들은 계몽주의에 맞서서 변증학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책은 그 사람이 속해 있던 단체의 정체성과 시대상황이 주는 시대정신에 상당한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이해할 때, 혹은 그 사람의 책을 읽을 때, 그것 자체로 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의 도전은 성경을 근거로 하는 모든 세계관을 쓰레기처럼 무용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계몽주의는 근본적인 사유자체를 흔들어놓는 변화였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헬라철학의 부활과 인간의 발견이었다.


왜 나는 변증서들이 눈에 안들어오는가? 했다. 그러나 이제 알았다. 변증서는 변증서일뿐, 변증서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과 피로사회, 성과사회, 투명사회가 가지고 있는 갖가지 일상적 도전에 대한 반응은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과거에 기대어 현실을 해결하려고만은 할 수 없다.



변증서


존스토드의 변증서는 모든 체계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레슬리뉴비긴의 변증서는 따뜻하고 애정이 느껴진다. 세속화에 대한 비판력을 잃어 버린 영국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선교적 입장에서


cs루이스 변증을 변증으로 하지 않고 문학으로 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변증의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변증서의 기본적인 교단과 배경 그리고 신관과 인간관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일반삶이 달라진다.



20세기 개신교 복음주의 변증학의 대표자들


복음주의자들은 행동주의와 십자가, 그리고 성경과 회심주의의 4가지 필라를 통해서 신앙을 살아내기 때문에 시대적 흐름인 계몽주의에 대해서 여러가지의 반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에서의 변화 :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다양한 보수적변용, 현대주의와 근본주의의 논쟁이 유산으로 남게 되었고 합리적인 변증이 일어났다. 미국의 극단주의자들은 영국보다는 더 치열하게 현실과 싸웠다.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의 틈바구니 속에서 비주류로서 정체성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더욱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1. 코렐리어스 반틸


네덜란드계 기독교개혁교회의 유산인 존더반, 어드먼드 등 출판사를 만들고 칼빈신학교와 칼빈대학의 대표자가 된다.


캘빈주의실천으로 교단을 이어가기 위해서 목회자 양성과정을 만드는데 이것이 캘빈신학교가 된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이 네덜란드의 다른 계파는 영역주권이라는 측면에서 사회변혁과 국가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틸의 경우에는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신학을 지키고 전수하려는 노력을하게 된다.


프린스턴신학교 박사이며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 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이동하여 웨스트민스터 힌학의 실질적인 대표자가 된다.


철두철미한 개혁신학(전적타락, 인간의 절대 무능)에 근거하여 전제주의 변증학을 추구한다.


타락한 인간 이성의 중립성과 고유지대는 없으므로, 기독교가 합리적이라는 증거를 찾아 기독교의 타당성을 논증한다.


전통적 증거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카톨릭 변증학이라고 하여 불신자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반틸의 변증학을 전제주의적 시점에서 사사을 전개하는데, 19세기의 수많은 세속화된 반계몽주의적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 전제주의적 시점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 그래서 변증을 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완전히 폐기될 수는 없다.


반틸의 입장에서 중간지대를 만들어서 계몽주의와 복음주의의 동행을 추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변증학의 시작인 계몽주의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배경을 배격하고 복음, 성경 그자체로써의 중요성을 가지고 케리그마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전제주의적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반틸에 의해서 기독교변증의 대부분은 거짓된 신조와 사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반틸은 바르트와 죽을 때까지 사상적인 대립을 한다.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서 반틸의 영향력에 의해서 20세기의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반틸의 입장에서 변증학을 하게 된다.


3위 일체 안에서만 변증학은 가능하다라고 하면서 대부분의 변증학의 싹을 잘라버린다.


CRC라는 네덜란드 개혁파의 미국내 교단의 대표적 학자이다.


불신자들을 설득하는것은 불가능하며, 오직 삼위일체에 기반한 기독교가 진리라는 것과 다른 체계가 허위라는 것을 전제할 때에만 참된 기독교 변증학이 성립된다고 생각했다.


카넬, 헨리, 쉐퍼에게 영향을 끼쳤음.



2. 에드워드 카넬 : 저통신학 변호자



3. 칼 헨리 ; 계시 지향 변증가


미국 신복음주의 창시자이자 지성의 대부


휘튼에서 소득 클락에게서 배웠다.


젤레마와 반틸에서 영향을 받아서 보스턴대 박하 후 풀러 신학교의 창립교수가 된다.



4. 프란시스 쉐퍼 ; 세속 문화에 대한 복음주의 대중 변증가  


웨스트민스터에서 반틸에게 배우던 중에 이탈하여 페이스신학교와 성경장로교회BPC에 합루하게 된다.


칼 먜킨타이어예 의햬서 보수적인 단체인 ICC가 만들어 지고 여기에서 타락한 유럽의 자유주의진영에 대한 근본주의 선교사로 파송된 사람이 바로 쉐퍼이다.


그러나 실제로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쉐퍼는 현실적인 전도의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1955년 ICCC이탈 이후 스위스 로잔에 라브리를 설립하여서 문화변증학을 시도한다.


이전의 변증가들과 다르게 문화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대중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전문적인 학자들이 볼 때는 타당하지 않은 이야기가 많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한 비판으로 거대한 흐름을 비판했다.


쉐퍼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노년에는 신근본주의 측면에서 낙태와 현실의 문제를 극단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이 때는 대중적인 인기를 잃게 된다.



5. 앨빈 플란팅가 ; 복음주의 철학자


복음주의마피아라고 할 만큼 지성적으로 최고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와 함께 복음주의 신학계 경계를 넘어 세속 철학계에까지 개혁파인식론의 하구적 신뢰성을 보증한 네덜란드개혁파 철학자였다.



*영국 : 계몽주의 합리적 변증보단느 포스트모던적 문화 상황에 대한 변증적 기여를 하게 된다.



1. 레슬리 뉴비긴 ; 서구문화에 파송된선교사


에큐메니컬진영에서 활동했다.


서구문화의 세속화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선교 후 영국이 바로 선교지라는 것을 깨닫고 수 많은 일상의 문제를 변증의 대상으로 잡고 공적진리로서 복음과 복음의 대진리로서 교회, 고교회론을 강조했다.



2. CS루이스 ; 기독교적 상상력의 시도


북아일랜드 출신의 옥스퍼드/케임브릿지 영문학자이다.


옥스퍼드 연구원 시절(31세) '마지못한 회심'을 하지만 이후에는 실제로 회심했다고 고백한다.


상징과 은유에 담긴 메시지를 활용하는 고도로 암시적이고 내제적인 기독교를 변증하게 된다.


나니아연대기를 썼다.


성공회 신자이지만 고교회주의자로써 카톨릭 신학에 더 가까워지게 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복음주의자는 아니다. 성경의 무오류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미국에서 더 인기가 많다.


미주


-아나배프티즘


아나뱁티스트(Anabaptist)란?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재세례신앙) 운동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철저한 제자도의 정신을 기초로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던 소수 급진종교개혁자들의 진정한 교회 개혁 운동이었습니다.



재세례신앙(anabaptism, rebaptism : 다시 세례를 주었던)의 신자들은 교회가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가로부터의 자유로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개인의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관습적인 유아세례는 제자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교회의 본질과 그리스도인의 신자됨을 심각하게 훼손한다고 믿었기에 유아세례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국가교회는 이를 반종교적 이단 행위로써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국법을 어기는 일로 간주했기에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은 수많은 핍박과 박해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아나뱁티스트 교회의 정체성은 성인세례를 바탕으로 한

“신자들의 교회”에 있으며 이는 카톨릭 교회뿐 아니라 루터와 칼빈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와도 구분됩니다.



아나뱁티스트 교회는 기독교의 뿌리를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찾아야 한다고 믿었고 따라서 근본적 개혁(radical reformation)을 표방해왔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faith) 뿐 아니라 제자로서의 따름(following)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나뱁티스트 교회는 “자유교회(Free Church)”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성경말씀에 따라 세상적 권세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명령과 국가에 주신 명령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다고 믿습니다.



아나뱁티스트 교회는 또한 “전통적 평화교회 (Historic Peace Church)”로서 언제 어디서나 사랑의 최고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며 사랑과 평화의 윤리적 삶을 살며, 비폭력적 갈등해결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아나뱁티스트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 중에는 메노나이트(Mennonites), 아미쉬(Amish), 후터라이트(Hutterites), 그리스도 형제단(Brethern in Christ) 등이 있습니다.



메노나이트는 16세기 네덜란드의 재세례신앙 운동의 지도자였던 메노 사이먼스(Menno Simons)를 따랐던 재세례신자들을 일컬었던 말로써 오늘날에는 메노나이트 교회와 교인들로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후터라이트는 초창기에 16세기 모라비아에서 공동의 재산을 소유하고 물질을 나누던 제세례신자들로, 야곱 후터(Jacob Hutter)의 지도를 받았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아미쉬는 17세기 스위스 제세례신자들 중에서 야곱 암만(Jacob Ammanm)의 지도를 따라 나온 사람들에서 시작되었고, 세상의 죄악성에서 분리되어 신약성경적인 생활에 헌신하려는 사람들입니다.



- 계몽주의


계몽주의(啓蒙主義)란 17, 18세기에 유럽과 신세계를 휩쓴 정치, 사회, 철학, 과학 이론 등에서 광범하게 일어난 사회 진보적, 지적 사상운동으로, 계몽사상이라고도 부른다. 계몽주의는 교회의 미신적인 면과 독단적인 해석에 대해 반란하였다. 대신 실제적인 도덕을 지향하였으며 형이상학보다는 상식, 경험, 과학을, 권위주의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특권보다는 평등한 권리와 교육을 지향하였다. 이 계몽주의는 1760년경 이후 강력히 대두되게 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은 이성으로 적법성을 판단할 수 있으며, 이성은 권위의 요소이자 권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이 이성은 인간과 세계의 보편적 원리나 자명한 법칙을 발견할 수 있게 했으며 진보를 확신토록 했다.



독일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에서 계몽주의 운동이 거의 동시에 이런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대서양 주변 국가에서 일어난 각종 혁명을 통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러시아, 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도 이런 움직임을 따랐으며, 라틴 아메리카 역시 아이티 혁명을 통해 이런 움직임에 동참했다. 미국 독립 선언과 영국 권리 장전, 프랑스 인권 선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제정한 1791년 5월 3일 헌법은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1]



"계몽주의" 또는 "계몽주의 시대"라는 용어는 어떤 하나의 운동이나 사상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속하는 사상가들은 서로 충돌되는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어떤 사상의 집합체라기 보다는 가치의 집합체에 더 가까웠다. 전통적 관습, 의례, 도덕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계몽주의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여러 대립하는 철학 사이에도 비슷한 부분이 상당했다. 심지어 계몽주의에 반대했던 철학자들까지 계몽주의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이성의 시기"는 보통 계몽주의 사상의 전주곡으로 여겨진다.[2]



-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년 10월 5일 – 1758년 3월 22일)는 미국 식민지 시대의 장로교 목사, 신학자, 원주민 선교사이다. 에드워즈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독창적인 철학적 신학자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1] 미국 3대 부통령과 뉴욕 주 주지사를 지낸 에런 버의 외할아버지였다.



매우 다양한 분야에 관한 저술을 남겼으나, 주로 개혁주의 신학과 신학적 결정론의 이론적 바탕, 청교도 전통에 관한 저작들로 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유명한 설교인 "분노한 하나님 손에 있는 죄인들"은 대각성 운동의 시발점으로 인정되고 있다.[2] 그는 1758년 1월 뉴저지 대학교(College of New Jersey, 지금의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으나 천연두 예방 인두법 시술의 부작용으로 3월 22일 사망하였다.[3][4]



그의 딸 에스더 에드워즈(Esther Edwards)의 아들이 미국 부통령을 지낸 에런 버 주니어(Aaron Burr. Jr, 1756 - 1836)이다.



- 찰스 웨슬러


웨슬리 [Charles Wesley]잉글랜드 목사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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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요약정보

태어난 때 1707. 12. 18

태어난 곳 잉글랜드 링컨셔 엡워스

죽은 때 1788. 3. 29

죽은 곳 런던.

소속 국가 영국

소속 국가 부속정보 잉글랜드

직업 목사

1707. 12. 18 잉글랜드 링컨셔 엡워스~ 1788. 3. 29 런던.

영국의 목사, 시인, 찬송가 작가.

웨슬리

웨슬리

형인 존 웨슬리와 함께 영국국교회에서 감리교 운동을 시작했다. 새뮤얼 웨슬리와 수재나 웨슬리의 막내 아들이자, 살아 남은 형제들 가운데 셋째인 웨슬리는 1716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입학했고, 1726년에는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치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고전을 영시로 번역했다. 1728~29년에 걸친 겨울에 그는 영적인 각성을 경험하고 다른 2명의 학부생과 함께 '신성 클럽'을 구성했다. 1735년 그는 조지아로 선교하러 가는 형 존 웨슬리를 돕기 위해 성직 임명을 받았다. 형보다 극단적인 감정에 좌우되는 경향이 심했던 찰스 웨슬리는 신앙적인 절망과 신체적인 탈진으로 불과 몇 달을 못 넘기고 영국으로 귀향했다. 형인 존과 마찬가지로 그는 모라비아교도들의 도움으로 영적인 평안을 발견했다. 성신강림대축일이었던 1738년 5월 21일에 그는 자신이 '하느님과 평화로운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감리교 신조를 매우 설득력있게 표현하는 설교자가 되었고 복음의 내용을 찬송가로 옮겼는데, 이것은 복음전도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1749년에 세라 그윈과 결혼해서 8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그중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살아 남았다. 찰스는 브리스틀과 런던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형이 그레이스 머리와 결혼하는 것을 막으려 했기 때문에 둘의 관계는 멀어졌고, 찰스는 감리교 단체들의 활동적인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동시에 그는 영국국교회에 보다 깊이 애착을 갖게 되었으며, 존이 설교자들을 임명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감리교 전도자이며 찬송가 작가로서 벌인 그의 활동은 사람들에게 항상 기억되어왔다. 웨슬리는 4,500여 곡 이상의 찬송가를 발표했고, 3,000여 편의 원고를 남겼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그중 일부를 특별히 작곡했다. 웨슬리의 찬송 중에서 널리 알려진 것들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 Love divine, all loves excelling〉·〈천사 찬송하기를 Hark, the herald angels sing〉·〈예수 부활했으니 Christ the Lord is ris?'n today〉·〈그리스도의 군병들아, 일어나라 Soldiers of Christ, arise〉·〈만유의 주 앞에 Rejoice, the Lord is king〉·〈비바람이 칠 때와 Jesu, lover of my soul〉 등이 있다(한국어 곡명은 통일찬송가를 따랐음).



-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 1741 ~ 1770



'모든 사랑, 모든 영광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 그의 일기 중 하나



"나는 조금씩 자고 조금씩 먹었으며 아침부터 한 밤중까지 일했다..."



실제 그 아내와 결혼했는데 3년이 지나 아들을 낳았다

설교를 하기 위해 출타하였는데 아기가 죽었고

아내와 함께 아기의 죽음을 애도하기는 했으나

함께 있어달라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울며 씨를 뿌리는 자...'[시편 126] 말씀을 인용하며

여느 때처럼 설교를 떠났다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침착하고 평정한 태도, 그리고

환난 가운데서 기뻐하는 그의 자세가 놀랍다고 어떤 사람은 말했다



감리교 수장자리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며 그는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꼐서 영광 받으시게 하라

내 이름은 모든 곳에서 죽어 없어지게 하고 내 친구들도 나를 잊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복되신 예수의 대의가 진작될 수 있다면..."



결국 감리교 수장자리는 요한 웨슬러가 되었다..



그가 매일 자기의 삶을 점검하는 '확인 목록'(checklist)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나는 개인 기도 시간에 뜨겁게 기도했는가?

2. 정해진 기도 시간을 지켰는가?

3. 모든 시간을 아꼈는가? 매시간 부르짖었는가?

4. 모든 대화나 행동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심사숙고했는가?

5. 어떤 기쁨 후에 즉시 감사했는가?

6. 하루의 일을 계획 가운데 진행했는가?

7. 모든 면에 검소하고 침착했는가?

8. 무슨 일을 행할 때 열심히 혹은 힘 있게 행했는가?

9. 말하거나 행함에 있어서 온유하고, 명랑하고, 붙임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였는가?

10. 다른 이들에 대하여 교만하거나, 허탄하게 굴거나, 참지 못하거나, 투기하지는 않았는가?

11.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자신을 돌아 보았으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잠자는 일에 있어서 절제가 있었는가?

12.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 시간을 드렸는가?

13. 연구하는 일에 부지런했는가?

14.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친절하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는가?

15. 나의 모든 죄를 고백했는가?



- 감리교


감리교회(監理敎會, 영어: Methodist Church)는 성서를 중심으로 한 이성, 전통, 체험을 기독교의 근간으로 이해하는 복음주의적이며 경건한 신학적 입장을 가진 개신교 교파이다.



신학적으로는 전통을 수용하고 있으며, 교회 구조는 공교회(보편교회)의 구조인 감독제 교회이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방회의 감리사, 대규모 구역인 연회에 감독이 있는 교회구조를 가졌다. 감독은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연회의 성직자 안수와 주요 의사결정을 내린다.



18세기 성공회 성직자였고 신학자인 존 웨슬리(영어: Rev. John Wesley)의 복음주의 운동과 사회복음 운동, 부흥 운동으로 등장한 개신교 교파이다. 성공회 성직자이자 신학자였던 존 웨슬리는 영국이 신앙적인 침체기에 빠져 있을 당시,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조지 휘트필드등 옥스퍼드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클럽을 조직했다. 그들은 클럽활동을 통해 성경을 연구하고 병자와 빈민, 감옥에까지 방문하여 전도에 힘썼다. 격식을 중시하고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특징이었으며 이는 감리교회의 시초가 되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7천5백만명이 넘는 신도들이 있는 개신교 교회로 폭넓은 신학적 토양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영국과 미국, 남미에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활동을 펼치고 있다.



- 아더 피어슨


아더 피어슨(Arthur Tappan Pierson)(1837-1911)은 미국 장로교회 소속 목사로 1만 3천회 이상 설교하고, 5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한 강해설교자이다. 그의 설교와 성경강해는 미국 외에도 스코틀랜드와 영국에까지 널리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다. 그는 조지 뮬러와 무디, 스펄전과 아도니람 저드슨 등과 폭넓게 교제했으며, 1891년부터 1893년까지 스펄전을 대신해서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교회에서 설교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는 세계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상당히 큰 영향력을 미쳤다. 19세기 말에 학생선교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고, 1880년부터 죽을 때까지 해외선교에 주력해서 미국이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영국을 직접 방문해서 뮬러와 오랫동안 친분을 쌓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뮬러가 세상을 뜨자, 뮬러의 사위이자, 자신의 막역한 친구인 제임스 라이트의 추천으로 뮬러의 공식 전기인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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