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마음 속에 떠다니는 생각들
#1
한 세기를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인간을 살아봤자 고작 100년이다. 한세기를 살아간다. 100년동안 많은 것들이 움직이고 바뀐다. 그 중에서도 가장 편하게 쉽게 경험되는 것은 ‘나의 신체’의 변화이다. 어느순간까지는 자란다는 느낌이 들고 성장통도 있다가, 어떤 순간에는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이빨이 빠지기도 하고 주름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는 중에 옆에 있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들이 죽으면 상갓집에서 허무한 인생을 잠시 고민해 보기도 한다.
100년간 죽어간 사람들과 함께 새로 태어난 사람들도 본다. 태어난 사람들의 성장은 나의 신체의 나이와 다르게 생기가 보이기도 하고, 무엇인가 새로운 생각이 담기는 것 같기도 한다. 아무튼 나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어느순간에는 생명과 시작에 관심을 가지다가 어떤 지점을 넘으니깐 죽어가는 사람들, 죽음, 끝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기분과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의 음악과 글과 시를 읽으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는 죽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한나아렌트와 베르그송은 생명을 중심으로 창조와 탄생성을 생각했다고 하는데 나는 어떤 지점에 와 있는 걸까? 요즘들어 답을 내리지 않고, 마냥 어설프게 답을 내지 않고 시간을 흘려 보내기로 했다.
#2
개성이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취향이 다르고 감성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너무나 기분이 좋다. 다른 감각에서 오는 다른 관점과 해석을 만날 수 있어서 그렇다. 그런데 다른 의도를 가지고 오는 이들에게서는 무엇인가 모멸감을 느낀다. 내가 없는 느낌? 아니면 나를 고려하지 않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거나 상하고선 집에 와서 한참을 생각해야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왜 그렇게 기분이 나빴는지를 유추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역사가 얼굴의 궤적으로 남아서 주름을 이룬다고 하는데 나는 어떤가? 다른 이들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치기어린 행동으로 매력을 만들어 내려고 했던 때도 있었고, 내가 가지고 싶은 어떤 물건을 얻기 위해서 다른 이의 환심을 사려고 한 적도 있다. 어릴적에는 대부분 그게 어머니였던 것 같다. 나이가 조금 드니깐 이제 정치적인 어떤 입장이나 명예나 아니면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의도가 생기기도 한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선택하는 시간은 나에게 별로 매력적이지 않지만, 그 결과는 어떤 영향력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욕망을 이끌어 내는 것도 같다. 이 부분은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다가 내 안에 아무것도 남게 되지 않을 것임을 알기 그렇다. 의도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 혹은 의도의 집단 안에서 나는 어떻게 자유로운 의도 혹은 남을 해치지 않는 의도를 가지게 될 것인가? 이런 고민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3
정말 쉬운게 한가지가 있다. 부모님과 여행가는 사진 한장만 올리면 바로 효자1위로 부상한다는 것. 재밌는 사실이 있다. 부모님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효자의 기준을 ‘돈’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깨달은 건 한 4년 전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해도 부모님이 원하시는 월급의 수준과 소유를 가질 수 있는 직업이 아니기에 부모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건이 무엇일까 질문해 보았다. 물론 그건 돈은 아니었다. 돈은 어느정도만 있으면 되었고, 언제 부모님이 행복해 하실까하는 질문을 해보니 하나였다. 여러방문으로 무의식정도까지 고찰해 본 결과 ‘자식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모든 부모님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릴적부터 ‘함께’가 몸에 베인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제일 기쁜 시간이었다. 그래서 매주 1번은 외식, 매월 1번은 여행을 소소하게라도 다녀오는 걸로 생각을 해 두었다.
그 모든 여행에는 부모님과의 추억과 사진이 있었고, 그 모든 외식에는 소주 한잔이 있었다. 이런 조그만한 행복에서 나도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부모님이 건강했으면 좋겠는데 이제는 다리가 아프셔서 산행은 어렵게 되었다. 최근에 어머니 이빨이 많이 빠지셔서 임플란트를 해야 한다. 결혼자금을 모아 놓은 것도 별로 없지만 다 털어서 어서 수술을 해드려야 겠다. 아들이라는 주체의 자리는 여러가지 정체성이 들어 있다. 때로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애완견과 같은 정체성으로 전락하다가 시간이 많이 지나가면 보호자로 바뀌어야 한다. 여러가지 정체성이 내포된 아들이라는 의미는 계속 우러나오는 곰탕의 육수처럼 순간순간 맛이 다른 것 같다.
#4
최근에 조금 감정적인 시간이 있었다. 어떤 판이 만들어지면 그 판에 끼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이 있다. 그 판에 들어 있는 사람들이 훌륭하고, 존경한다기 보다는 나에게 이득이 되고, 내 이름을 날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그 판에 들어가보면 우정은 간데 없고 계략과 모략과 술수가 넘쳐난다. 조금은 그렇지 않은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의도가 숨겨져 있고 가식적인 관계, 피상적인 인간들의 얼굴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갈림길에 서 있다. 나도 거기에 들어가게 되면 그렇게 똑같이 해야 하는걸까? 아니면 들어가도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는 걸까?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가지 말아야 할까?
최근에 이런 판에 내가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나의 의도를 계속 달아 보았다. 좋아하는 희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럴 때 ‘소격효과’라고 하는 것을 쓴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의 가장 중심부분은 빈공간으로 비워두고 중요한 문제는 의식의 가장자리로 몰아 놓는 것이다. 그럼 그 빈공간에 ‘실재’가 임하는 시간들이 온다. 다시 말하면 ‘뭣이 중한디?’라는 시간이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생각해 보았다. 뭐가 중요한가? 나는 무엇이 중요하길래 여기에 있는 것일까? 항상 하는 고민에서 답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단하게 뭉쳐져 있어서 쉽게 이해되거나 용해되거나 적용되지 않는다. 부피가 큰 사탕을 가장자리부터 녹여서 먹듯이 나는 사랑이라는 목적과 의도없는 의도를 잘 용해시켜야 했다. 답은 없다. 이렇게 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뿐더러 굳이 왜?라는 질문들만 날아오기에. 그래도 나는 이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직감과 조그마한 경험으로 볼 때 사랑은 언제나 오래가고, 사랑은 언제나 나의 존재를 만족케 하면서 다른 사람의 얼굴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케 해준다. 이렇게 상징으로, 기억을 남겨 놓는 이유는 잊지 말자는 것이겠지.
바보처럼 내 의도를 다 드러내놓고, 이용당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끌려 다니기도 하겠지만, 그런 이들이 언젠간 느낄 때가 있지 않을까? 물론 부정의한 것이나 비윤리적인 것에서는 멀어지려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운동장에서는 함께 달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사랑으로 정치를 한다거나, 사랑으로 어떤 모임을 인도해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피부로 깨달고 현실로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5
글쓰기를 업으로 하고 싶지 않다. 그냥 취미로, 진정성과 신선함을 가지고 쓰고 싶다. 인생에서 잠깐 들리는 작은 시골역처럼 잠시 누군가가 들렷다가 조금의 낭만을 얻고, 아주소소하지만 확실한 깨달음을 얻고 돌아가는 지점이 되면 좋겠다.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쓰려고 하면 아주 편하게 술술술 나온다. 그런데 누군가를 변화시켜려고 하거나 무엇인가를 계획하는 글은 좀처럼 쉽지 않고, 재미도 없다. 물론 가끔은 그런 글을 써야 하기에 인생은 도 머 이런저런 의미와 해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쨌든 영감이 오고, 내 마음이 움직일 때 글을 쓰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해본다. 레이몬드 첸들러나 무라카미하루키가 쓰는 방법이 바로 영감이 오면 쓰는 방식이었다고 하는데, 유명한 작가들처럼은 아니어도 경험하고 떠오르는 것들을 계속 써 봐야겠다. 이것을 때돈을 벌 수는 없겠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지만 아주 조그만 생각거리가 된다면 그거라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