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어가는 일요일 오후의 끄적거림
어느 지점에 서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어느 경계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 경계를 넘어서 어떤 지점으로 넘어 온 것 같다. 그래서 어떤 관점이 생기고, 누군가에 대한 판단과 어떤 제도에 대한 잘못들을 계속 비평하고 있는 나를 만난다. 민주주의라거나 자본주의라거나 하는 거대담론을 이야기하다가 삶의 가장 조그만 부분으로 내려와서 하는 이야기들이 시시하다고 느껴질 때 나는 무엇인가 잘못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년이라는 시간이 정말 훅 지나간 것 같다. 항상 새로운 해가 다가오지만 작년보다는 이번 년도가 더 스펙터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협동조합을 가입해서 활동도 해보고, 정치적인 글을 써서 발표도 해보고, 여명학교에서 아이들도 만나고, 해오름지역아동센터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교제도 했다. 필리핀 출장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7년간 독서모임을 해오던 결과들이 하나씩 수면위로 올라오고 있는 것을 느낀다.
쉽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그래도 많은 것들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래도 이 시점에서 다시 돌아보면서 무엇인가 마음에 걸리는 가시 같은 조각들을 찾아내야 할 것 같다. 누군가를 몹시 미워했던 기억들이 있다. 지금은 머 그럴수도 있지 하는데, 그 때는 왜 그렇게 그 사람이 미웠을까? 그리고서는 다시는 그 사람과 말을 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조용히 악수를 청해야 하지 않을까싶다. 사람은 참 그런 존재인 것 같다. 현상학적으로 삶을 살고 해석학적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존재말이다. 일이 일어나는 순간에는 그 동안 내 안에 쌓여 있던 능력, 관점, 삶의 자세와 관계들로 열심히 풀어가지만 그 순간순간 의미를 부여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 지나고 나면 과거의 일과 행동들이 스물스물 올라와서 어떤 해석과 관점을 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간들이 사치라고 생각하거나, 실용주의 적으로 필요없는 시간이야라면서 치부해버린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의 매번 일어나는 현상학적인 대응은 이러한 의미들의 연결고리에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촘촘히 의미가 지워질 수록 삶을 조금 더 자세하게, 치열하게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이야기 해왔던 것 같다. 어떤 순간에도 자신만의 관점과 상황에 대한 인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일관된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렇게 보면 주위에 어른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항상 돈에, 부동산에, 주식에 시달리다가는 술 한잔에 시름을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꿀꺽꿀꺽 삼키는 것 같은 사람들도 많다. 물론 지금 내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어느순간 나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 그룹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에 이런저런 생각들로 긁적이는 중이다. 이렇게라도 남기지 않으면 나의 일상은 또 그냥 대충 지냈어!라고 하는 인사로 대신할 것 같으니까.
무라카미하루끼가 스승으로 삼았던 레이먼드 챈들러의 말이 맞을 때가 많다. 작가는 인스퍼레이션이 왔을 때 써야 한다는 것. 무엇인가 마음이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이 우리 속에 상처를 내거나 옹아리를 틀 때, 그 때 상징을 통해서 그 형상을 잡아내는 활동이 글쓰기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에는 정말 많은 감동과 영감들이 흘러가는데, 다 담지 못해서 아쉬운 부분들도 있다.
예를 들면, 사회학이론들을 접하고 있는데, 피터버거라는 사회학자는 "사회학은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부정의 방법론을 쓴다. 그것은 사회를 일단 정지시켜놓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는 디스토피아식의 분석을 한다는 것이다"라고 하는 이야기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그래서 사회를 분석하는 것으로는 희망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도 동감한다. 그렇게 사회를 비판적으로만 보면 우리 안에서 희망은 별로 없지 않나?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가 인간인데 말이다. 그럼 그 다음은 희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새로운 사회 구조와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정도가 될 텐데, 그럼 그건 누가 만드는가?라고 할 때 답이 없어진다.
내가 만들어야겠지, 나의 작은 삶의 조각들부터 희망이 움터 오르는 변화를 만들어야겠지, 나부터 바뀌고 그 다음에 생각하는게 맞는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깐 이 글을 쓰게 된 처음 동기부터 생각해보면, 삶이 너무 거대해지는데, 그 거대한 만큼 내 삶은 너무 초라하게 보였다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형적인 현실주의자들의 관점이면서 구조주의자들의 관점인데,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결국 거대한 사회에 압도당해서 자신의 존재를 잃게 된다. 현실주의자들의 치명적인 약점일지도 모른다. 현실은 악이 만연해있고, 부패가 가득하고 사람들은 점점 저 서로를 미워하거나 자본의 노예가 되어 가는 것 같은데. 욕망을 추구하는 게 무엇이 나쁜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면 되지, 더 나아가서 해를 입혀도 조금 어떤가? 내가 더 영향력이 많고 지위가 높고 무시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로 주변에 둘러 쌓여 있으면 대부분의 현실주의자들은 '그래 어쩔 수 없지' 나도 그냥 비슷하게 살아야겠다. 라캉의 말이 맞았어!'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욕망을 살고 있는거야'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이다. 이러한 현실의 우울함과 욕망으로 치환된 모든 관계에 대해서 '사랑'이 이 세상을 치유하고 사랑이 만들어내는 선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정치를 선택한 이상주의자 말이다. 아무도 안 믿고, 대부분은 헛소리로 들은체 만체 한다.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럼 묻고 싶은게, 그렇지 않으면 다시 현실주의로 돌아갈 것인가? 그럼 현실의 암울한 붕괴가 어느순간 이상사회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렇게 묻고 싶다. 누군가 희망하고 품지 않으면 절대 안바뀐다. 자연이 자연스럽게 정화작용을 일으키던 시대도 끝났고 플라스티 아일랜드는 이제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고 있고, 전쟁과 기근은 도처에 가득하고,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희망을 품고 선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현실은 안 바뀐다.
그러나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해 봤는데 안되더라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생각만 있었어, 라든지 아니 원래 안되는 건데 그냥 해 본 말이야 이런것들 말고. 진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획과 아이디어 사례들을 찾아다녀야 하지 않을까? 자본이 던져준 성과급의 하이에나보다는 사랑이 던져주는 느티나무 밑에 유니콘 같은 느낌이겠다만.
나도 잘 모르고 가는 길이긴 하다. 누군가 이거 맞아요? 물어보면 나도 잘은 몰라요.라고 대답해놓고는 지금 내 앞에 보이는 조그만 희망을 찾아서 부지런히 가는 중이다. 가다가 안되면 포기하지 말고, 가다가 안되면 왜 안 되었는지를 알아보고 다음 세대가 이 길을 갈 때는 여기는 30미터 앞에 절벽이 있으니 지금부터 계획을 세워서 절벽을 내려갈 것인지 기술을 개발해서 날아갈 것인지 하시오!라고 말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리저리 40세가 다가오면서 40 이후에는 정치판에 들어가야 할 것도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제 실제 정치에 서야 할 때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차근차근 배우는 것도 좋지만, 나는 어떤 비전과 설계도를 가지고 들어갈 것인가 했을때 이제 집중해서 깊이 있는 공부를 해야할 때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해가 바뀌는 일요일 오후가 되니 어려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그래도 이렇게 고민이 많아지는 오후는 웬지 잘 산거 같은 느낌도 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