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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07. 2019

섬김과 이웃

기아대책 시무식에서 손봉호 이사장님 강의

20190104_기아대책 시무식

섬김의 삶_손봉호 이사장


기아대책 손봉호 이사장님~ 심지어 레비나스철학을 네덜란드에 처음 소개하셨다고 하는...


들어가기


모든 사람은 일을 한다. 우리 몸과 마음은 일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일하는 8시간이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한다.


엿새동안 힘써 네 모든 이를 행할것이나 ,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예수님도 일을 강조하셨다.



일, 소명


루터는 모든 직업Beruf이 하나님의 소명Berufung이란 만인제사장론을 주장했고 칼빈도 아무리 미천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주장했다.


루터는 우리가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약자를 돕기 위함이다라고 말했고 칼빈은 부지런히 일해야 범죄할 유혹을 받지 않는다. 근면과 절제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전통이라고 막스베버가 말한다.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노동의 개념은 성경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헬라철학에서는 영지주의적 전통 때문에 정신과 대비하는 노동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대부분의 문화들은 노동을 비천시했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은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다. 히브리전통에서는 구약성서를 중심으로 ‘육체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육체노동과 근면을 강조하는 개신교는 국가체제 안에서 ‘자본주의’를 태동하는 변화를 일으켜내기도 했다는 막스베버의 주장을 살펴보자.


고대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은 섬기고 높은 사람은 섬김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치 도구가 생명 없는 노예인 것처럼, 노예는 생명있는 도구이다’라고 했다. Slave is a living tool, as a tool is an inanimate slave_Nicomachean Ethics


그러나 성겨은 원치적으로 신분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평등문화 확산을 견인하였다.



노동, 가치


그럼 왜 우리의 노동은 이렇게 비천시되었는가? 독일어의 아르바이트의 어원은 가난한 사람이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평등하지만 매우 복잡하게 분업화된 오늘날에는 자급자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한다. 일하는 우리는 모두 서로 섬긴다. 현대인의 삶 자체가 상호 섬김으로 이루어진다. 생산활동, 유통업도 섬김으로 위한 것이므로 생산직도 광의의 서비스직이다.


대부분의 섬김은 그 대가를 받고, 그 대가는 다시 섬김을 받는 수단과 비용으로 사용된다. 화폐는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지는 섬김의 질과 양을 보편적으로 조절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원시시대에는 육체적인 힘, 전근대 사회에서는 신분이, 현대사회에서는 주로 돈이 섬김을 받을 수 있는 권리로 작용하낟.


그런데 최근에는 과학시술의 발달로 사람대시 도구가 섬김을 감당하고 금융재산의 소득이 서버스의 대가보다 더 크게 되어서 섬김과 대가 간의 불균형이 발생한다. 현대의 비극은 돈이 돈을 버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돈으로 대체된 시스템은 빈부격차를 발생시키고 그것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을 양산하게 된다.



기아대책, 사역


그들은 기아대책의 섬김의 대사를 지불할 능력이 없다. 기대의 기부자, 관리들도 모두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희생을 감수하면서 자발적으로 섬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기아대책에서는 섬길수가 없다. 기아대책 사업은 직업이 아니라 사명이다.


우리는 어느 직위에 있든지 섬기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보여준 소명이다.



예수님, 섬김


예수님은 선김기 위해서 스스로 낮은 자리로 오셔서 희생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빌 2:5~8)


칼뢰비트는 기독교의 구세주는 신기한 구세주라고 한다. 다른 신들은 명령을 하고 하늘에서 무언가를 하는데 기독교의 메시아는 자신이 직접 내려와서 사람들을 섬기고 자신을 희생해서 사람들을 직접 구원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양들을 돌보는 목자를 도둑, 삯꾼, 선한 목자로 분류하였다. 도둑은 양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이다. 삯꾼은 비도덕적이지느 않지만 그의 주 관심으 ㄴ양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대가다. 섬기는 사람이 대가를 받는 것은 정당한 권리나 오직 대가 때문에 하는 섬김은 성경적 섬김도 아니고, 명예롭지도 않다. 바울은 그 권리를 포기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삯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섬기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 수단조차 자급했다.


선학목자와 삯꾼의 가장 큰 차이는 ‘목적’에 있다. 대가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삯꾼이다. 말그대로 월급쟁이이다. 업과 일에 대한 소명과 부르심에 대한 이해 혹은 전제가 잘못된 것이다. 자기자신을 위한 대가를 위한 일은 삯꾼이다. 물론 세속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민해봐야 한다.



하나님, 약자


하나님은 약자의 수치와 열등감도 고려하신다.


신명기 24장 19장에서는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약한 자와 동일시 하신다. 그러므로 약자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에베소서 6장에서 보는 것처럼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고, 섬기기를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슈바이처나 장기려 박사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고린도 전서 11장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라고 한다. 그리스도와 같이 사람들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차이가 없어야 한다.




민네이션, 생각


‘일에 대한 중요성’을 생각하면 ‘노동’과 ‘비지니스’는 분리되는 것 같다. 노동은 1차, 2차 산업으로 구분되는 반면에 ‘비지니스’는 3차 산업이상을 말하는 것 같다. 계층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은 이 구분에 있어서 시대정신은 비지니스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기독교의 가치는 ‘노동’이 가지고 있는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정립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내리누르고 권력과 욕망을 성취하는 관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은 섬기기 위한 제작, 서비스, 금융이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지금의 방식으로는 안된다. 다른 방식의 자본주의 혹은 탈자본주의가 필요하다.


섬기는 자가 되는 것도 가난함을 넘어서야 한다. 그 말은 섬기는 자가 가난함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는 자들이 가난함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고민은 떠나지가 않는다. 자본주의가 기독교에서 태동되었기때문에 유지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중삼에 많은 변용과 타락이 있었는데 말이다.



민네이션, 기아대책


기아대책이 사역을 하는 대상은 ‘섬길 수 조차 없는 공동체와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의 강의에서는 우리는 조금 더 큰 체제로 ‘국가 자본주의’나 ‘금융서비스업’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려야 한다. 체계와 생활세계의 구분(하버마스)에서 생활세계만 구원한다고 해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가? 체계가 이미 생활세계를 식민화시키고 있는 말이다.


기아대책의 사역은 자비사역-개발사역-정의사역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사회적 정의를 이루기 위한 어드보커시나 정책활동이나 실제적인 활동들을 할 것인가?


‘공동체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공동체부터 먼저 우리가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경험하고 만들어내야 한다. 겉과 속이 다르면 문제가 되지만, 겉과 속이 같은데 잘못된 방향이면 그 조직은 곧 붕괴한다.


가난한 자를 위한다고 하면서 정치의 문제, 경제정책을 안건들릴 수 있는가? 우리는 어느수준에서 접근할 것인가?




민넨이션, 고민


독일철학과 독일 신학이 가지고 있는 조직신학적 특성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칼빈과 루터의 관점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 얼마나 적합하고 이해를 가져오는가? 우리 한국 신학이 가지고 있는 독일신학의 영향력은 과연 합당한가 옳은가? 적합한가? 이러한 종교 개혁, 종교교육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네덜란드의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야기한 국가적 기독교, 정교합일의 기독교, 성시화운동 같은 방식의 7가지 산모형을 사용해야할까? 그게 현실에서, 지금도 유효할까? 고지론적인 입장이 더 강력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함께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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