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Jan 13. 2019

욕망과 희망

나에게 매번 질문하게 되는 순간


#1. 한참을 돌아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의 욕망으로 살아왔던 때를 돌아보면, 내가 진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만큼 나는 그렇게 누군가가 소망하는 것으로 살았다. 어느순간이 지나니깐 너무 무겁고 덜렁거려서 잠시 쉬면서 그 겉옷을 벗고보니 그렇게 자유로울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부모님의 대리만족과 같은 기대도 이해가 가고, 이 사회가 자체 시스템을 유지하려고 만들어 놓은 어떤 유니폼같은 인간형도 이해가 간다. 그리고 학교에서 혹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만들어지는, 기대되는 기본적인 유형들에 맞추려고 굳이 나를 깍아냈던 많은 시간들도 생각이 난다. 그래 이해는 간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할까?


여러가지 유형의 인간의 지점


#2. 처음에는 라캉이나 프로이트나 융과 같은 이들의 말이 맞는 줄 알았다.


나는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사는데, 프로이트는 원천적으로 절제된 리비도를 개방시키라는 말을 하면서 무의식을 꺼내고, 융은 그것이 원형과 페르소나(가면)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이 갭의 차이가 삶의 굴곡을 만든다고 했다. 그러니깐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은 원형archetype인데 이 원형은 무의식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무의식을 개방하는 방식으로, 페르소나를 정복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라고 말했다. 그것도 매우 좋은 것이었다. 라캉은 오히려 그 무의식의 중심에 거대한 사물(주이상스)가 있는데 이것을 피해가려고 하기 때문에 망상, 허상, 강박, 히스테리가 생긴다고 했다. 그러니 그 큰 사물을 피해가지 말고, 너의 마음 속에서 ‘정말 이것만은 피하고 살아라’라고 하는 것들과 정면으로 부딪히라고 말했다. 그러니 그것과 부딪히면 비로소 타자의 욕망으로 살던 너의 자아가 자유로워져서 그 때부터는 너의 질서대로 살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자유일까? 자유로워지는 길일까? 생각해보았다.




#3. 심리학과 정신분석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체와 자아’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히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부터 나의 자유와 주체성을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공동체주의자’라고 했다. 그리고 이들은 규모의 측면에서 개인 속으로는 안 들어갔다. 다만 개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내면에 ‘공공선’이 규정되기까지 공동체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 것이다. 반대로 공동체가 아니라 원래 인간이 가지고 있던 ‘자아’가 ‘자유’를 만날수록 더욱 자기다워진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공동체가 없어도, 자유를 중심으로 개인이 살아갈 수 있고 일정한 제도와 규정 속에서만 계약한다면 그것은 ‘사회’를 이루고 사회의 여러부분들을 관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케일이 달라지니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어느정도 이해는 되었으나 혼란스러웠다.




#4.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구해줘’


라고 말하는 제니홀저의 말은사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하고 있는 것들에서 나를 구해달라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삶의 구조를 넘어서 내면의 구조까지 조작해버리는 이들에 대해서 도와달라는 말처럼 들린다. 자본주의와 산업심리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러한 말이 매우 심각하게 들린다. 도대체 얼마나 사람들을 조종하고 이용해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그렇게 이용해먹는 이들의 목적은 대부분 돈인데, 그 돈이 그의 주인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 것일까?’라고 나이브한 질문들을 던져놓고는 마음이 상한다. 정말 이것밖에 안되는 것일까? 인간이란 정말 이러한가? 이런 허탈한 질문도 해 본다.


제니홀져_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구해줘


#5. ‘원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하고 싶다.


 원하는 게 없을 수도 있고, 사실 원함이라는 것으로 인간을 규정할 수만도 없다. 그럼 원함을 계속 강요하는 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계속 내면에서 비교와 열등감으로 규정되는 자아에 대해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원하는 것들이 끝나는 지점은 어디에 있을까? 정말 원해지 않아도 괜찮은 것일까? 잠깐 다른 이야기이지만, 내가 이런 고민을 꺼내면 주변의 어른들은 ‘너가 아직 어려서 그래’라던거 ‘그런 심각한 고민은 답도 없고 건강에도 해가 된단다’라거나 ‘너는 너무 복잡하게 사는구나’라면서 핀잔을 주었다. 자신들의 생각과 경험으로 나를 판단하고는 바로 이상한 아이 혹은 생각이 너무 많은 아이라고 치부해버렸던 과거의 생각들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나는 이 고민을 포기하지 않았고 계속 그 고민에 대한 정답은 아니더라도 나름의 해답을 찾아가려고 하고 있다. 혹시나 같은 길을 가는 친구들이 있다면 함께 죽을 때까지 가겠지. 아무튼! 나는 원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 그러게 원하는 것이 없다. 욕구와 욕망은 다르지만, 욕망의 차원에서는 욕망은 욕망하지 않으면 끝난다. 내가 그것을 더이상 추구하지 않으면 그 욕망은 끝나고, 대상은 비로소 빛을 잃고 내 앞에서 사라진다. 그러면 그 대상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반대로 욕망하지 않아도 괜찮아!!


#6. ‘내 안에서 끓어 오르는 것으로 사는 삶’


원함과 다르게 내 삶에서 움트고 있는 어떤 것으로 사는 삶. 이것이 어떻게 욕망과 ‘원함’의 길과 다를까? 아직은 겹쳐져 있는 것 같고, 아직은 같은 이야기 같다. 하지만 명확하게 다른 것은 욕망으로 가는 길은 외길이고 혼자만 가는 길이라면, 소유와 함께 자신이 취한 것으로 욕망을 성취했다고 한다면 지금 내 안에서 끌어나오는 것들은 그것과는 정반대의 길 같다. 같이 갔으면 좋겠고, 누군가가 우위에 있어서 명령하거나 혼내는 거 말고, 진짜 친구들처럼 함께 무엇인가를 하고 기대하고 기다리고 사랑하는 그런 것 같다. 일종의 유토피아와도 같은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가 만들어 놓은 정해진 유토피아로서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닌다. 그러나 명확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럼 꿈은 누구나 있지 않나? 그래! 말이 나온 김에 욕망과 원함이라는 길이 아닌 꿈이라고 생각해보자. 꿈과 비전의 길 말이다.


#7. 모르는 것을 모르는 상태로, 아는 것을 아는 상태로’ 놓아 두자.


모르는 것은 나도 사실 아직 내 안에서 무엇이 꿈틀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희망적이라는 것, 그 꿈틀대는 것들이 희망적이고 무엇인가 이루어졌을 때 가슴이 뛴다는 것이다. 함께 걸어갈 날들과 마음에 짐 같이 남아 있던 부모님과 같은 세대들의 아픔과 이전세대들의 눈물이 날아갈 것 같은 희망 말이다. 앞으로 해야할 일이 많다.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공부도 필요하고, 실제적인 행동도 필요하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도전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스물스물 올라와서 더욱 커져가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평화를 이루기 위한 평화적 수단’(요한 갈퉁)처럼 ‘희망을 이루기 위한 희망적 방법’을 개발하고 찾아내야 한다.


리얼유토피아에서 에릭올린라이트의 구분


#8. 다시 삶으로


이제 이 글들과 상황을 나가야 한다. 한참을 돌아와서 잠시 쉬어보니, 나는 내 안에서 솟아나는 희망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욕망과 다른 희망이라면 충분히 속도를 내서 달려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욕망은 항상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만들고 결국은 자기자신도 욕망의 대상이 되어 버리니까. 에피쿠로스학파처럼 욕망의 대한 문제와 싸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때가 있다. 그래서 욕망대로 살아라 욕망을 절제하라 같은 교조적인 것 같은 문제들 같다. 그런데 한가지는 확실한다. 그 욕망은 다른 이들과 함께 걸어갈 희망 때문에 절제해야 된다. 이것은 자유주의나 공동체주의자들 모두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어쨌든 이정도 쉬었으니 더 빠른 속도로 달려가봐야겠다. 너무 많이 돌아왔으니까.


알을 보면서 새를 그리는 사람



매거진의 이전글 출장과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