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 100주년 특별 국제학술회의 2일차
20190226_삼일운동 100주년 특별 국제학술회의 2일차
장소 : 메리어트호텔 3층
100-year of the democartic republic and the world citizens : For Universal Peace
주요 연사
슬라보예 지젝_문명을 문명화하기
홍호펑_세계주의’ 민주주의 프로젝트이 부상과 몰락(새로운 제국 간 경쟁을 향해)
위르겐 몰트만_인류생존을 위한 민족들의 화해
https://brunch.co.kr/@minnation/1231
1일차 강의내용은 위의 링크참조
민족국가 경쟁의 논리는 환경을 대하는 새로운 양식, 패터 스로터디에크가 ‘야생동물 문화 길들이기’라고 말한 급격한 정치적-경제적 변화를 수립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지금까지 각각의 문화는 자신의 구성원들을 훈육/교육 시키며, 국가 권려이라는 미명 하에 구성원드 ㄹ사이의 내부 평화를 보장해 왔으나 다른 문화들과 국가들 사이의 관계는 배결 평화 상태는 일시적인 휴전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의, 잠재적 전쟁 상태의 그림자 속에 지속적으로 놓여져 왔다. 국가의 모든 윤리는 결국 영웅주의적 행위, 국가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할 각오로 귀결되며, 이는 국가간의 야만적인 관계가 국가 안에서의 윤리적 삶의 기초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구라는 우주선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순간, 문명 자체를 문명화하고 모든 인간 공동체 사이의 보편적 연대와 협력을 이루는 것이 시급한 과제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 과제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종교적, 미눚적, 영웅주의 폭력과 특정한 명분을 위해 스스로를 그리고 세계를 희생시키려는 각오로 인해서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가 반역을 저질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명분을 배반하고, 현재의 전쟁놀이에 참여할 것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진심으로 보살피려 한다면, 우리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아메리카 라스트, 차이나 라스트, 러시아 라스트...”
지젝, 질문
오늘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지구적 자본주의는 새롭게 만들어질 위험성을 충분히 감당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이것은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위험성은 무엇인가? 생태학적인 문제, 사회윤리적문제(기술과학이 가져오는 윤리적 문제), 새로운 아파르헤이트가 바로 그것이다. 아파르헤이트는 난민문제와 슬럼문제를 이야기한다.
문명, 앎
기지의 기지, 미지의 미지, 기지의 미지, 미지의 기지의 네가지 경우에서 생각해보자.
알고 있는 것을 다 알게 되는 것은 문명사적 측면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하면서 실제는 모르는 상황에서는 ‘폭력과 속임수, 의도의 변형’이 일어나기도 하고 큰 재앙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가장 큰 문제는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없고, 영원히 알 수 없는 영향력이나 어떤 사건의 결단들은 사실은 모르는 것들, 미지의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지의 것들을 안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모르고 있는 것들이 오늘날 문명을 문명화시키는 과제가 된다.
우리는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두어야 한다. 혹시나 그것이 아는 것으로 밝혀 졌을 때는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과학적인 실험을 거쳤기 때문에 안다고 말하는 것인가? 회귀분석이나 시계열 분석을 했기 때문에 사회과학적으로 안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정치’라는 영역에서는 그러한 사회과학적, 자연과학적 관점은 잘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가치’를 다루는 것은 매우 복잡한 과정과 함께 합의와 토론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를 겪는다. 상황과 상태에 따라서도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과학이나 과학주의적인 측면에서 ‘안다’고 말하고서는 사람들의 삶, 국제적인 상황, 환경과 기후에 대한 결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 버린다.
보편성, 새로운 정의
우리는 새로운 보편성을 정의해야 한다. 새로운 정의를 통해서 새로운 방법론을 만들어 내야 한다.
자유주의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자유를 중심으로 새로운 보편성을 정의해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이데올로기의 현황은 모순적이다. 현재의 삶과 생활과 분리되어 있지만 여전히 작동하고는 있다. 이것은 문명을 문명화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다루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아편과 같은 포퓰리즘을 전세계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사람들은, 리더들은 포퓰리즘을 통해서 서로의 아편이 되고 있다.
서구의 관점에서 지금까지는 보편성이 정의되어 왔다. 서구가 오히려 보편성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전세계적으로 통합된 보편성을 고민해보아야 한다. 서구가 하면 보편성이 되어 버린 문명사는 서구가 하는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를 통해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고 이에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보편성의 프레임을 서구로만 한정하면 안되고, 전 세계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보편성 담론을 만들어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 소개
1949년 슬로베니아 수도인 류블랴나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철학 및 사회학 등을 전공하고, 류블랴나 대학 사회학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파리에서 라캉 연구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0년 슬로베니아에서 최초로 자유선거가 시행되었을 때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독일 관념론에 깊은 이해와 관심이 있으며, 칸트에서 피히테, 셸링, 헤겔에 이르는 흐름을 복원하고자 노력한다. 독일관념론을 되살리기 위한 지적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다. 단순한 지식인이라기보다는 실천하는 이론가로서, 매년 2~3권의 책을 출간, 왕성한 집필활동을 한다.
지은 책으로 <삐딱하게 보기>,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할리우드의 정신분석>, <향락의 전이>,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환상의 돌림병>, <믿음에 대하여>,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 <진짜 눈물의 공포>,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이라크: 빌려온 항아리>,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등이 있다.
민네이션, 생각
우리는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잘 보지 못한다. 생각해보아야 한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모르고 있는것들, 내가 모르면서 사실은 알고 있는 것들, 알고 있는 것들은 알고 있다고 쓰고 있지만, 정말 맞을까? 어떤 과정에서, 어떤 상황에서 나의 판단이 옳았을까?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타자의 탄생은 ‘신비와 이상화’할 정보가 결여되었을 때이다. 오히려 타자에 대한 정보가 없을 때 타자에게 자유를 선포한다는 것이다. 내가 타자를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때 타자는 자신을 선물로 알려줄 것이다. 현상학으로, 해석학으로 타자를 다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방법론을 사용하면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큰 문제이다.
지젝은 레닌주의자이면서 헤결주의자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결합해내는 방법은 라캉의 방식을 이용한다. 그러니까 실재계에서 레닌의 방법을, 상상계에서는 헤겔의 방법을 가지고 상징계 내에서 그것들을 변증법으로 머무린다. 그래서 지젝의 발언은 항상 두가지 상황을 왔다 갔다가 하다가 결합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사람 내면에 대한 질문에서 세계와 정치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리쾨르가 시도했던 해석의 갈등에서처럼 지젝은 그것들을 잘 버물려서 해석을, 새로운 해석을 던져 놓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한 곳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신기한 발언이 되는 것이다.
뉴노멀, 혹은 세컨트 뉴노멀과 같이 ‘보편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왜 시작된 걸까? 시대가 바뀌는데 기존의 보편적 이성이 작동하지 않아서? 아니면 새로운 정치적 기획? 문제에 대한 대응일까 하지면 이것도 무엇인가를 혁신하려는 새로운 기획일까?
민네이션, 통찰
학습조직을 만들고 우리는 변화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한다.
보편성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사람들의 삶의 변화인가? 아니면 그 변화를 미리 규정한 관념이나 개념인가? 귀납법적인가? 아니면 연역적인가? 수 많은 철학자들이 보편성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삶 속에서 현장에서 나온 보편성을 만들어낸다. 바디우와 들뢰즈가 서로 배치되어 있고, 스피노자와 플라톤이 서로를 대응하고 있다. 이 사이에 현상학적인 관점에서 하이데거와 후설과 퐁티가 이 둘을 이어가려고 한다.
어떤 개념을 만들고 이것을 실행하는 것은 보편적이지만, 일단 모여서 정하자라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방법론을 갖고 있다면 거기에서 새로운 보편성이 만들어지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세계에서의 평화, 민주주의 그리고 공화국’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현재 세계주의와 민주주의는 세계적인 우익 포퓰리즘의 부상 속에서 퇴조하고 있다. 그런데 어디로부터 후퇴했는가? 오늘은 미국이 1980년대 이래로 선봉에서 이끌었던 세계화와 민주화촉진 프로젝트의 기원을 추적한다. 1970년대에 자본 이윤율 위기는 미국으로 하여금 내부의 조직화된 노동운동을 억누르기 위한 방안으로 미국 자본 수출을 위한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서도록 이끌었다.
이와 함께 미국은 개발도상국들 가운데 냉전에서 미국의 동맹국들이어던 많은 권위주의 체제의 보호무역주의적 저항을 무력화히키기 위한 의도된, 또는 의도되지 않은 결과로서 민주화 촉진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세계화-민주화 프로젝트가 21세기의 전환기에 미국 세계 유일 제국적 순간을 조성한 시기에, 이 프로젝트의 아이러니한 기초가 되었던 것이 미국의 권위주의적이고 국가-자본주의적인 중국과의 준-동맹이었다.
이동맹은 자본과 무역의 미국중심적 흐름을 공공히 하는데 기여했고 미국 군사력의 세계적 패권을 보장했다. 미국자본과 중국의 국가 자본주의,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 유지 능력, 더 이상 민주정치로 정당화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화 속에서 극심해진 지구적 북반부와 남반부 사이의 불평등 사이의 모순은 세계주의-민주주의 프로젝트로 좌초시키고 있다. 이 프로젝트를 대신하여 제국간 경쟁 체제가 등장함으로써 강대국들 사이의 세계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민네이션, 생각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생각은 과연 맞는가? 민주주의는 낙관적으로 체제적 승리를 거두었는가? 민주주의 내부에서도 많은 분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포퓰리즘도 성행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방법론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체제경쟁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이념경쟁, 실제적인 변화의 경쟁에서 우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체제경쟁을 넘어서는 ‘보편성’에 따른 새로운 세계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민주주의 기획이 필요하다. 이것을 위해서는 정치적, 사회적, 과학적 전제에서 시자갛는 주체 개념이 필요하다.
3.마크브래들리(시카고)_연대와 정치적 프로젝트로서의 지구적 남반부
우리가 지구적 남반부라고 부르는 상상과 그로부터 도출된 정치적 용어들과 개입들이 21세기 초반 십수잔 간 어떻게 문제시되어 왔는지 살펴보자. 지구적 남반부라는 표현이 맞는가? 그것을 개념짓는 것이 옳은가? 지구적 남분부는 제국의 유산과 제3세계라는 개념에 포함되면서도 거리를 두고 있는 방식, 그리고 지구 정치적 기획의 확산을 통해 지구적 남반부가 단순한 기술어의 위상을 넘어 중심적인 것이 되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탈식민지주의적 시점에 대한 향수와 집단적 형태보다는 개인적 형태의 자기 정체성 확립을 향한 지구적 남반부의 동시적이고 현재적인 전환에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폭넓은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세계 유산 문화정치와 세계 에술시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1919년의 삼일운동은 비폭력 시민봉기였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주체적인 운동이었다. 삼일운동은 희생자를 기억하는 승리이며, 폭력자들에 대한 비폭력 운동의 전형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치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화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871년 전쟁부터 지속ㅈ거으로 프랑스와 독일은 오랫동안 전쟁과 반목이 있었고, 그에 따라서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후 민족적인 화해를 바탕으로 유럽연합이 형성되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분쟁과 오해가 해결되면 그에 따른 화해의 결과는 보편적인 평화가 실제로 구조적인 자리를 잡는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두번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학살을 기억한다. 바르샤바 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제국주의 폭력의 정점을 찍었고, 전쟁 후에도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었다. 그러나 빌리브란트 총리는 폭력의 현장에 찾아갔고, 역사적 폭력에 대해서 세계적인 사과를 했다. 이것은 민족들 간의 거대한 화해의 도화선이 되었고 사람들은 전쟁의 상처를 어느정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세번째는 동서독의 통일이다. 통일독일을 위해서 독일국민들은 비폭력 비전쟁을 외치면서 시위를 하고 기도회를 하였다. 당시 당국에서는 폭력적인 제압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동서독의 통일은 한 국가 안의 민족적인 화해가 이루어져 있다.
화해라는 것은 과거적이고 회고적인 것이다.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다른 미래가 다가온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가지고 올 수 있는 미래는 과거의 어떤 사건에 대한 화해가 필요하다. 앞에서 살펴본 정치적 화해는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냈다.
유럽의 화해가 가져온 유럽연합의 미래는 ‘공동의 민주주의’가 가능한 역사의 장이 되었다. 우리는 그냥 현실을 지나치거나 문제를 묻어두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를 그대로 놓아두지 말고 화해를 통해서 미래의 희망들을 현실에 풀어놓아야 한다.
민족주의, 새로운 민족주의
새로운 민족주의가 좋은 뉘앙스는 아닌 것 같다. 1990년 소련의 해체로 인해서 새로운 민족주의의 갈래가 만들어졌다. 독립국가들이 여러곳에서 생겨나게 되었고, 민족들 간에 싸움으로 번져가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자국중심주의에서 자국민중심주의, 민족우월주의까지 발생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국가간에 평화를 담지할 수 있는 것은 국가들 간의 국력이 아니다.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인간애에 기초한 정의와 협력이다.
민족, 인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보편적인 민주적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국제적 조약에서 시작한다. 국제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의 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 지구정치의 실현이다. 지구정치라는 장에서 인류의 보편성을 해치는 것들을 제거하는 일들을 해야 한다.
민네이션, 생각
‘우리는 서로에게 속해있다’ 빌리브란트 총리는 말했다. 우리는 통일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민족들의 화해가 가지고 오는 인류의 평화는 어떤 변화를 맞게 되는가? 이런 고민들을 해보자.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하나의 변화가 다른 나라와 민족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행성적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지구라는 공동체 안에서 폭력, 화해, 번영, 변화, 전쟁은 각각 어떤 것을 추구하든지 간에 상호영향력을 주게 되어 있다. 물론 당사자들에게 더큰 피해를 주지만 동시대 뿐 아니라 후대의 시대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해석학적으로 볼 때, 어떤 사건에 대해서 책임을 전가하게 되면 그 당시는 넘길 수 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구멍이 나게 된다. 엉성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시켰던 경험이 많을 것이다. 삶이 살이 꽉찬 상태로 밀도있게 구성되는 것은 자신의 행동, 시간, 언어, 생각에 실제로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살아갈때만 가능하다. 누군가 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되었고, 누군가 때문에 내 삶이 망쳐졌다고 하면 실제로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황을 다르게 볼 수 있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으며,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책임전가로 놓아 두었던 과거의 사건들을 결자해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 우리의 의도, 행동, 관계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은 나의 역사도, 타자의 역사도 아닌 무중력의 시간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제에 해석을 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의미한 것들을 남겼는지 회복해야 한다.
삼일운동을 지구적 차원에서 다시 해석해볼 때 이러한 해석은 우리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 노동주체와 자본주체로 찢어진 민족의 주체성이 다시 보편적인 주체성으로 만날 수 있겠는가?
참고자료 1. 희망의 신학_위르겐 몰트만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세상을 도피하지 않고 미래를 열망한다는 사실이다. 믿는다는 것은 한계선을 넘는 것인데 그렇다 해서 당장의 억압적 현실이 전복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여전히 죽음이고 부패는 여전히 부패이며, 죄악은 여전히 죄악으로 남아 있고, 고난은 고난으로 늘 남아 있다. 오로지 신앙이 그 것을 넘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모든 희망을 무너드리는 한계선이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 속에서 깨어질 때, 신앙은 희망을 향해 열려질 수 있고 또 당연히 열려지게 된다. 신앙은 담대한 확신(παρρησία)이 되고, 인내(μακροθυμία)가 된다. 신앙의 희망은 '가능한 것을 향한 열정'(Kierkegaard)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가능하게 된 것을 향한 열정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중세기의 속담이 말하듯이, 바로 그 희망 안에서 위대함을 향한 영혼의 팽창(extencio animi ad magna)는 열린 지평을 인식한다. (p26)
희망은 신앙의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이다. "만약 이 희망이 없다면, 비록 우리가 신앙에 관해 제아무리 재치 있고 점잖은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희망이란 신앙의 확신에 따라서 하나님이 참으로 약속하신 것들을 기대하는 행위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확신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이 땅 너머의 세계, 즉 천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새로운 미래를 인식하고 기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희망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다.
신앙한다는 것은 미리 취한 희망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로 말미암아 무너진 그 한계썬을 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이 점을 고려한다면, 이 신앙은 세상 도피와 체념, 책임 회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희망 가운데서 영혼은 탄식의 골짜기를 벗어나서 상상 속의 행복한 하늘 나라로 날아가지 않으며, 이 땅과 결별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Ludwig Feuerbach)가 말했다시피, 희망은 "우리의 무덤 너머에 있는 하늘의 피안 대신에 우리의 무덤 너머에 있는 이 땅의 피안, 즉 역사적 미래, 인류의 미래를" 지시하기 때문이다.(Das Wesen der Religion 1848)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희망이 인식하는 것은 하늘의 영원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가 서 있는 이 땅의 미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은 그가 죽기까지 사랑한 바로 그 인류의 미래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인류에게 십자가는 이 땅의 희망이다. 그러므로 이 희망은 몸으로 순종하기 위해 투쟁한다. 왜냐하면 희망은 몸의 부활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희망은 파괴된 땅과 고통을 당하는 인간들을 온유하게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인류에게 땅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 십자가는 유일한 희망이어라!(Ava crux-Unica spes!) (p28)
이런 희망은 현식의 율법과 강요와 죽음과 악과는 도저히 화해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희망은 지금의 고난을 위로하는 역할을 하는 것 뿐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게 하며, 이 세상에서 안도하며 정착하려는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신앙은 불안한 마음(cor inquietum)을 진정시키기보다는 인간 속에서 스스로 불안한 마음이 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더 이상 주어진 현실을 참아내지 못하며, 그 현실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그것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세상과의 불화를 의미한다. (p28)
희망은 인간을 나그네 상태(statu viatoris) 속에 두고,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해 세계를 향해 열려 있게 한다. 이 희망 때문에 교회는 공의와 자유, 인간성을 실현하도록 새로운 자극을 받는 원천이 된다.
이 교회는 자신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책임"(벧전 3:15)을 지고 있다. 이 교회는 "죽은 사람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때문에"(행 26:6) 심문을 받는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교회는 항상 자신의 진리를 대변하며, 그리스도의 미래의 증인이 된다. (p29)
지난 70년 동안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갈등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일부의 주장 대로 이 갈등 자체의 독특성 때문인가? 아니면 여기에는 리더십과 시민 사회 수준에서 먼저 고차로디고 분석되어야 할 많은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인가? 이 글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두 적대세력 사이의 평화와 화해에 대한 주요 장애물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지난 수십년동안 초래된 잘못들에 대해서도 논의하려고 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The exclusive elements within Zionism which forbid recognition of the other, the Palestinian, as an equal individual and nation in his/her homeland
Lack dof readiness by Israel to recognize responsibilities for the ramifincations of the Nakba, the refugee issue.
Building a matrix of control that is security driven which created facts on the ground that add to the complexities of the conflict and hinder credible possibilities for a Palestinian state on 22 per cent of mandatory Palestine.
The PLO inability to develop clear unifying vision and effective stategies in combating the Israeli policies of control and exclusion, Thus the Israeli policy of division and separation won, whith Palestinian consent, especially after the singing of Oslo Accords. The PLO gave up quickly the inclusive vision of a united democratic state solution, a state for all its citizens.
이에 대한 해법은 다음과 같다.
Ability of both sides to recognize their towards their own people and the other address them. Time has proved that power politics will not solve this conflict and unless both sides reach the conclusion that no side can win it all, possibilities for a settlement are minimal.
It is essential that the Palestinian side invest in empowering itself politically, econmically and legally in order to be able to create a shift in power that allows for serious negtiations between equals to take place.
There is a need for a structural change in the political system of the state of Israel : one that will goive up the exclusive elements for inclusive ones.
종속적으로 부터의 해방은 로마 공화정과 그 역사적 적용에서 이론적 배경을 찾는 공화주의 정치철학자들에게 규범적 이상으로 받아들여져 온 비지배로서의 자유 개념의 핵심을 이룬다. 그러나 종속으로부터의 해방은 비지배로서의 자유와 그 제도적 함의에 대해서는 공화주의 정치철학자들에 의해 상대적으로 이론화되지 않았다.
이글은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첫 째로 무정부주의적 자기-해방과 민족 해방을 구분함으로써, 나는 종속으로부터 자유가 반드시 ‘무-지배’의 옹호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려 한다. 둘째로 1919년 삼일운동을 종속으로부터 해방을 위한 공화주의적 시도로 분석함으로써, 나는 비지배로서의 자유가 제도적 경로 밖에서 일어나는 집합적 행위의 패턴을 수반함을 논증하려 한다.
이글은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정치적 변화를 향한 대중적 불만에 기댄 포퓰리즘적 호소를 비판하며, 법률을 넘어서는 집합적 행동의 잠재적인 공화주의적 패턴을 보여주고, 또한 헌정주의에 대한 포퓰리즘적 거부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민주주의적 공화주의를 제안하려 한다.
민네이션, 생각
지금도 가시지 않은 의문은 ‘삼일운동’이라는 테제가 봉기 혹은 저항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제 오늘 새롭게 제시된 패러다임은 ‘민주적공화주의’의 이상이 삼일운동에서 독립선언서에서 드러나고 실제로 비폭펵저항의 운동이 비지배 자유를 확대시키는 상태로 나갔다는 것이다.
대표로 안창호 선생님과 여운영, 김규식 선생님이 많은 부분 독립선언의 기초를 놓았으나 인민으로 대변되는 일반 시민들도 그에 따른 공화국의 이상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어진 임시정부의 이상과 헌법 그리고 해방 이후에 대한민국의 건립과 역사적 집단행동들은 ‘민주적 공화주의’라는 큰 테두리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고민은 국민들, 인민들, 시민들, 신민들이라는 주체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일제 이전에도 이러한 잠재력과 가능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분석해야 하는데, 이런 관점이 부족한 것은 역사학자들의 친일적 경향 때문인가? 아니면 실제로 그렇지 않아서 그런것인가?
한가지 우려스러운 것은, 삼일운동이 미화된 측면이 아니라 삼일운동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죽음이 잘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 자신의 목숨을 전제로 해서 다음 세대들이 100년동안 새로운 미래를 꿈꾸게 되었는데,
한나아렌트의 저작에 대한 관심이 최근 한국의 지적 공동체 내에서 급속도로 증가해 왔다. 이러한 현상은 부분적으로 1990년대 냉전의 지정학적 질서가 해체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구적 변환이 한반도에서는 아직 실해오디지 않았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아렌트는 근대 정치이론의 발전 과정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인간의 정치적 삶에 관한 그녀의 저작들은 냉전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쓰여졌으면서도 시대적 한계를 넘으려는, 즉 냉전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강렬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한국 근대정치의 기원을 보다 넓은 시간 틀 속에서 이해하는데에도 적절성을 가진다. 아렌트는 1958년 저작 인간의 조건에 제시된 정치적 행동 개념을 한국의 이전 역사적 경험, 특히 1919년이 격변인 삼일운동을 살펴보며, 우리는 행동 속에서 나타나는 활동적 삶 사상과 이와 관련된 민주정치적 주체성 이슈를 목격할 것이다.
근대 역사에서 1919년의 중대성에 관한 개관을 포함해서 유럽의 파괘, 미국의 부상, 러시아 혁명 그리고 이러한 사건과 발전들이 한국과, 보다 넓게 아시아 각지에서 어떻게 탈식민지화 정치와 좌우대결을 초래했는지를 함께 다룰 것이다. 결론에서 한국의 1919년 3월을 세계 역사의 공간 속에 위치시키고, 아렌트의 공적 세계 개념을 세계사적 공간에 대한 비판적 이해에 가져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볼 것이다.
광장, 남녀노소
남녀노소와 평화라는 두 요소는 좀더 이론적인 조명을 요구한다. 삼일운동이 현성한 광장은 20세기 정치이론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학자 중의 한사람인 한나 알렌트가 그녀의 1958년 저작에서 논한 ‘공공세계the public world’와 아주 흡사하다. 남녀노소가 평화적 방법으로, 그들의 언어 행위를 매개로 자신들의 주권을 주장하는 행위, 그러면서 광장이라는 공간을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적 광장으로 만들면서, 그 공간을 그들의 자발적이고, 평화로운 행위를 통하여 국가와 제국의 점유물에서 그드르이 자유로운 정치적 행동의 장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아렌트가 상상하고 주장했던 ‘정치적 행동’, 악타폴리티카에 아주 가깝게 접근한다. 여기서 ‘말’, 말을 하는 행위가 중요하다. 이때의 말이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인지능력으로서의 말이 아니다. 소통의 수단으로서의 말, 누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자 한느 수사학적인 말과도 다르다.
이 때 말이란 현실을 재현하는 의미의 말이 아니라, 말을 함으로써 그 현실을 그 내뱉은 말을 따르고 그 모습으로 변화하게 하는 지극히 능동적인 의미에서 근대 민주정치의 이론적 근간이 되는 정치적 인간의 기본조건을 구성하는 말이다.
1917, 갈림길
1917년에 역사적 갈림길이 생긴다. 러시아에서는 비지배를 거부하기 위한 폭력적인 방식이 볼세비키 혁명을 일으키고,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로 본격적으로 변신하기 시작한다. 세계 속에서 점점 평화가 아니라 폭력과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고, ‘비지배의 자유’가 아니라 ‘지배를 위한 폭력’이 동시적으로 발생했다.
1919년의 시공간에서 좀더 전진해보면 이 기억이 어떤 모습을 갖는가 엿볼 수 있다. 글로벌 역사 속의 1919년의 러시아 혁명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는 비유럽, 비서구 세계에 더욱 그러했는데 한반도의 민족해방의 역사에도 그러하다. 주지하듯이 민족해방운동이 ‘자유주의’ 세력과 ‘혁명’ 세력 두 갈래 흐름으로 갈라지는 것은 1919년의 봉기가 폭력적으로 억압되어, 결국 실패하는 것과 직접적인 인과관계에 있다.
제주, 1947
제주의 1947년 삼일기념식은 1919년 삼일이 그랬듯이 평화로운 시위였다. 평화의 ‘말’ 포력의 권력에 대정하는 형국이었다. 이것은 중요한데 1948년 4.3이 폭력의 수단으로 폭력의 권력에 대항했던 것과 차별되기 때문이다. 평화의 요소와 더불어 1919년 삼일이 그러했듯이 1947년 제주의 삼일은 그 역시 ‘남녀노소’ 모두 ‘말’로써 광장에 진입하는 아렌트적인 정치행위였다. 이때의 국가폭력 희생자가 소년, 어린아이를 업은 여인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상기하면 이는 명확하다.
삼일운동, 세계사
1919년에서 1947년까지 이어지는 삼일운동의 역사는 세계사의 여영겡서도 심중한 의미를 갖는다. 1919년 글로벌 역사의 지평에서 탈식민정치의 시작이라면 이 해방의 첫 걸음이 폭력이 아니라 평화적인 모습으로, 남녀노소 대중이 모두 함께 참여해서 그들만의 광장을 이루는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 경이로운 사실이다. 이 놀라운 ‘사실’이 아직 글로벌 역사 담론에서 제대로 조며오디지 않았고 이론화 되지 않았는데 이는 앞으로 한국학에 주어진 책임다.
비교사의 영역에서 1919년은 폭력과 평화의 투쟁사이다. 유럽의 환경에서 이는 1914-1918 엄청난 폭력이후 18세기의 영구평화의 이상이 전면적으로 복귀되면서 더는 이런 폭력을 겪지 않기 위한 노력의 시작이었다. 또한 이러한 노력이 좌절되면서 1939-1945의 폭력으로 진행하는 실패한 평화의 역사이다. 1919년 파리에서 권력세계의 지도자들이 국제적 평화를 논할 때, 한반도에서는 가장 사회적으로 평화롭고 민주적인 모습으로 광장을 형성했었다.
베르사이유의 평화와 종로 탑골 공원 혹은 제주 관덕정의 평화는 동시대의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 모습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우리는 이를 위로부터의 평화, 아래로 부터의 평화, 혹은 외교행위로서의 평화와 사회적 실체로서의 평화로 차별할 수 있다.
폭력의 주체자들이 그들의 얼굴을 바꾸어서 이제는 평화르 ㄹ노한느 그런 평화가 아니라 ‘말’로써 광장르 만들고 그 광장ㅇ르 평화의 힘으로 만드는, 18세기 계몽주의의 전통(특히 루소)에 전자와 비교해서 더 가깝고 오히려 그 전통에 적자의 모습을 보이는 평화였다. 오늘날 국제교육, 문화, 과학, 조직인 유네스코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세계시민적 평화 혹은 ‘평화의 문화’로서의 평화와 흡사한 평화였다.
결론, 한나아렌트와 삼일운동
1919년 광장의 평화는 열린 광장이기에 남녀노소 모두가 거기에서 자유로운 정치적 주체로서 자신을 발현했었다. 반대로 1919년 베르사이유의 평화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로운 말로써 만든 평화가 아니라 국가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국가의 말을 쓰는 행위자들의 평화 담론이었다.
그런데 제주의 관덕정, 혹은 경상북도 안동의 구조흥은행 앞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언어화하면서 그 순간 자신이 세계시민임을 선언한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 아주머니들의 말의 세계가 오늘날 우리에게 역사로 전해져 있는가?
읻ㄹ의 말 속에 주권의 당위와 함께 평등의 당위가 있었음을, 즉 국가와 제국은 물론 민족의 틀 조차도 제대로 담을 수 없는 존재적 지평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그들의 정치적 주체의 지평을 어떤 정치이론의 언어로 자리지움할 수 있을까?
부엌에서 아궁이 불을 지피다 뛰어나와 얼떨결에 광장에 참여한, 그러면서 그녀 자신이 광장이 된, 또 실천하는 한나 아렌트가 된 그 여인에게 우리는 삼일운동 백주년을 맞아 오늘날 어떤 경의를 표할 수 있을까? 그 여인의 자유로운 혼, 환희로운 표정을 어떻게 재현하여 이 땅의 나아가서 인류의 소중한 자산으로 간직할 수 있을까?
민네이션, 생각
유럽인들의 관점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은 국가간 전쟁으로 보지 않고 내전으로 보고 있다. Civil war인것이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민족, 하나의 형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문화인류학적인 입장에서 본다는 것은 현재 우리의 인류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과거의 역사적 흐름에서 본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 속에서 삼일운동이 무엇있었는지?와 삼일 운동 안에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세계 안에 삼일운동이, 삼일운동 안에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비폭력의 평화운동의 시작은 삼일운동에서 보여지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녀노소’로서 모든 사람들이 공유한 시민의식과 시민정신이었다. 여기서 신공화주의가 가지고 있는 ‘시민적 견제’의 잠재성들을 끌어내 볼 수 있다.
이른반 제 3의 민주화물결을 포함한 전후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세계화는 거대한 경제적, 지정학적 변화들을 수반하면서 이민의 증가, 국내적 격변과 사회적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포퓰리즘적 운동의 흡인력과 통치의 권위주의적 형태를 강화하고 있으며, 유럽에서는 안정적 미래를 위한 유럽연합의 행동 능력에 대한 시노리를 낮추고 있다.
이 상황은 더욱 긴박하게는 세계화된 세계에서 평화와 자유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국가적 경계와 이기심으로의 퇴보를 향할 것인가? 반대로 연방주의의 철학적 원칙의 심층적인 발전과 국가적, 지역적 존재로부터 세계시민으로서 공유된 책임서을 지닌 코스모폴리탄적 존재로의 관점의 변화를 향할 것인가?
한나 아렌트의 다양성 개념과 아프리카와 아리상 철학의 사례들에 기반한 이 발표는 세계시민적 관점에 대한 사유를 제공하려 한다.
아렌트의 공화국의 위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폭력과 전체주의적 방식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세계시민주의와 세계통합을 생각해보자.
보편성, 공통성
보편성은 특수성들의 합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모두가 실존적인 공감과 경험을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보편성의 출발이 시간성으로 볼 때 하이데거에게서 오는 현상학의 미래에서 도래하는 죽음 앞의 시간으로 아렌트는 보지 않는다. 현재 내 앞에 주어진 실존성을 중심으로 시간이 현재성을 계속 유지해간다. 그리고 창조성을 바탕으로 보편성이 계속해서 탄생하는 것을 보여준다.
공통성은 포용과 배타를 넘어서서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다. 나눠어져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원래부터 하나로 나아가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민네이션, 생각
분석의 수준을 개인에서, 민족, 사회, 국가, 권역, 대륙으로 나누어보면 지금까지 우리는 보편적이지 않은 폭력과 지배에 서로 싸우기도 하고 죽이기도하고 전쟁을 벌이거나 해체되거나 했다. 이것보다 더 큰 단위로 인종적으로는 흑인과 백인과 황인이라는 구분과 함께,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은 서로를 나누고 서로 적대시하는 문제점들을 만들어 냈다.
생각해보면, 정말 생각해보기 시작하면 이러한 분할된 세상에서 평화를 말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어보이기도 한다. 또한 평화 가운데서 통합과 화해를 추구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화해는 일어나지 않고 어떤 이들이 상상하지 않으면 평화는 도래하지 않는 것 같다.
오늘 알아본 수 많은 사례와 문제들에서 보여지는 지배와 비자유와 폭력과 배제에 대해서 어떤 식의 나름의 변화를 고민하고 추구해야 한다는 고민들이 생긴다. 세계화는 더 확장되고 있는데 여기에 묶여 있는 수 많은 문제들도 확장되는 양상을 보인다. 마찬가지로 평화와 공존, 협력도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역사의 우발성’을 이야기한다. 그 당시의 상황, 이익집단, 사태의 흐름에서 어떤 우발성들이 발생하고 이것이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어떤 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해석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대비할 수도 있고, 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들을 미리 찾아낼 수도 있다.
아렌트와 몽테스키외를 생각해보자. 공화국이라는 영역에서 겹치는 부분들이 있다. 비지배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 ‘법’의 지배를 선택하는 시민들의 공론장을 기대해보자.
다시 주체 개념과 민족성의 연결을 해보자. 오늘 이야기가 나오는 것처럼 주체 개념이 설정되면 그 주체들의 합을 민족성으로 초청하기도 한다.
중요한 함의가 있다. 삼일운동에서 여성들이나 학생들이 광장에 나갈 때는 새로운 주체성과 정체성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속해있는 집에서는 자신들은 소외받고 비주체로, 비자유의 속성을 가지게 되지만 광장으로 나가는 것은 세계시민으로서 새로운 광장의 주체성을 부여받는 것이다. 그럼 주체적으로 해방을 생각한다면 삼일운동 자체가 조선 안에 부여된 민족적 정체성을 뚫고 나오는 세계시민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것이 바로 보편성이지 않을까?
민족대표들 중에 여성이 없었다는 것은 성적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하지만, 삼일운동에서는 여교생들이 앞에서 나서서 운동을 주도했다는 것은 중요한 ‘보편성’으로서의 ‘패미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주체의 역사성을 고려하고서 광장으로 들어가는 것과, 현상학적으로 그냥 광장으로 들어가는 것과 완전 다른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된다.
민네이션, 고민
왜 지금 우리는 아렌트를 호출하는가? 아렌트가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그것은 아마도 아렌트가 말한 공감, 참여, 공공성과 같은 ‘공화국’의 위기가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아렌트의 정치저 기획이 1975년 아렌트 사후에 공개되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잡은 것은 아닐까?
참고 자료, 공화국의 위기(김항 연세대 교수)
이 책에 실린 세 편의 글과 한 편의 인터뷰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 시대의 뛰어난 사상가가 눈앞의 현실과 마주하는 태도가 어때야 하는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혼란 속에서 비관하거나 낙관하지도 않고, 스스로의 사상을 억지로 증명하려 하지도 않으며, 거리를 두고 훈수를 두려 하지도 않는다. 아렌트의 눈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인간의 실존성을 향한다. 그 시선은 매우 냉철하다. 그는 전 세계적인 학생들의 봉기가 어떤 제도나 법으로 귀결될 것인지를 묻지 않는다. 아렌트가 주목하는 지점은 이 봉기가 ‘정치적 행위’라는 점에서 공적 행복을 경험할 수 있게끔 하는 드문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봉기는 미합중국을 변혁하려는 혁명이라기보다는 공화국 창설의 정신을 거리에서 재확인한 사건인 셈이다.
그래서 아렌트가 말하는 공화국의 위기란 바로 창설의 정신이 거리에서 확인되어야만 하는 사태를 뜻한다. 그 정신이 정부와 사법부와 의회에서 끊임없이 갱신되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와야 할 정도의 위기이니 말이다. 물론 거리를 바라보는 아렌트의 시선이 고운 것만은 아니다. 학생들의 봉기가 공적 행복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그 행복의 조건까지를 파괴하는 무의미한 폭력으로 변질되는 상황도 예리하게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렌트 특유의 시니컬하고 예리한 분석이 왜 이렇게도 현장감 있게 다가오는 걸까? 책 서두를 장식한 논문에서 미합중국 정부의 꼼수와 거짓말을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롭게 파헤쳤기 때문이리라. 또 유명한 폭력론 속에서 권력과 폭력 사이의 본질적 구분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기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미합중국을 가리고 읽으면 지금 이 땅의 상황에 대한 냉소로 보이는 것은 아렌트의 말대로 정치적 인간의 시계란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음을 새삼 환기시켜준다. 진보의 환상에 갇히지 말고 이 무시간의 실존성 속에서 공적 세계를 개시하는 일, 지금 이 땅의 정치적 사유가 한번 쯤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논제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