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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r 06. 2019

축복과 역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_축복의 시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 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심경을

신은 빛을 잃은 이 눈을


책들의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네
꿈들의 도서관에서 새벽이 건네는


촛점 잃은 구절들밖에

읽을 수 없는 이 눈을


낮은 헛되이 끝없는 책들을
이 두 눈에 선사하네


알렉산드리아에서 소멸된 필사본들처럼
읽기 힘든 책들을


그리스 신화에서는 어떤 왕이
샘과 과일나무들 사이에서 갈증과 허기로 죽었지


나는 이 높고 긴 눈먼 도서관의 이곳저곳을
길을 잃고 헤매네


벽들은 백과사전, 지도책, 동방과
서방, 모든 세기들, 왕조들,


상징들, 우주와 우주 이론들을
건네지만 모두 무의미하네


도서관을 낙원으로 상상하곤 하던 나는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나의 어둠에 싸여 천천히
공허한 어스름 속을 탐색하네


단지 우연이라는 말로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이 일들을 주재하리니,


다른 누군가가 또 다른 어슴프레한 날들에
수많은 책과 어둠을 건네받았지


느린 복도를 걸어갈 때
나는 성스러운 두려움을 느끼네


내가 그 다른 사람이며,
나는 이미 죽고 없는 것이라고


내가 내딛는 발걸음은 그의 것이라고

그 여럿인 나와 하나의 어둠인 나,


둘 중 누가 이 시를 쓰는 것일까
어차피 저주가 같은 것이면


내가 어떤 이름이든 무슨 상관인가

내가 그루삭이든 보르헤스이든,


나는 이 소중한 세상이 형태를 잃고
그 빛이 밤의 잠과 망각을 닮은 창백하고


불확실한 재로 꺼져 가는 것을

응시하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_축복의 시





역사의 무게만큼

고민의 깊이가 책에 묻어난다


그 많은 이들의 고뇌가

한문장으로 담기는 날에는


내가 보는 것은 구텐베르크의

은하계가 아니라


알타미라동굴 벽화를 그리고 있는

옛 사람들의 눈시울일 것이다


순간의 두께를 아는 이는

과거와 현재를 조금은 멀리 밀어내고


현재 속으로 들어오는

온갖 현상들을 받아들이노니


누군가가 옛날부터 상상해오던

빛의 조각들이 현실의 빚이 되어


오늘의 아침을 밝히고

어두운 재를 떨쳐내버리노니


밤은 밤에게 말하고

낯은 낯에게 말하며


자연은 인간에게 말하는

사이에 가이아가 탄생하노라


큰 대지의 흐름에서 태어난

땅의 주인들이


오늘도 한걸음 한걸음

그들의 길을 걷는다


누군가가 걷는 모양이

과거의 어느 책에서 보던 것과 같다


어떤이는 이것을 보고

호모에렉투스와 호모사케르라 부르는데


나는 하나의 인생이

처벅처벅 걸어가는 듯 하다


너무 역사에 무게를 믿지 마라

오늘을 사는 이들의 등불이 꺼질라


다른이를 보는 순간

내 안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불안이라고 생각하지말고

그 공백에 진리가 번쩍임을 기다리다가


언젠가 내 안에 환하게

빛이 밝혀 오면


그 빛을 따라서 나 역시

역사의 거인이 되어서


나의 길을

하나의 길을 가겠노라


민네이션_역사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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