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커뮤니케이션 이론과 실제 1_강의계획
20150905_한림국제대학원
김헌태_정치커뮤니케이션 이론과 실재
1강, 강의 계획서
정치커뮤니케이션 이론과 실제애 대해서 알아보자.
원래는 수업 1에서는 이론중심으로 2에서는 실습중심으로 진행을 했었지만, 통합시켜서 한 과목으로 만들었다.
교수님은 이론을 중심으로 현실에 적용하면서 경험을 축적해 왔기 때문에 다른 분들과 다른 측면이 있다.
박상훈대표, 김민제 변호사, 이철희 대표 등과도 다른 전략을 쓸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컨설턴트들 간에는 매우 친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론을 중심으로 시작하는 것과 감각에서 시작하는 것은 지속가능성과 퍼실리테이션의 입장에서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직관에 의존하는 정치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1페이지의 기사를 가지고 이론을 대입해 보면 얼마나 많은 글들을 쓸 수 있는가?
그러나 직관에 의존할 때 우리가 1페이지를 가지고 쓸 수 있는 글은 얼마나 되겠는가?
이 수업은 자기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통제하는 수단으로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있는 현상을 분석하고,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이 것을 이론적으로 배우게 되면, 다른 사람의 통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누군가를 통제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 있다.
이 수업은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충격이 있을 수도 있다.
요약과 자신의 비평을 쓰는 연습을 해야 한다.
요약은 최소로 줄이고 비평은 최대한 늘린다.
요약하고 자기생각으로 바꾸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인용을 할 때도 그 인용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
금요일 오후 6시까지 이메일로 제출하라. 글을 읽고 리뷰를 해서 수업시간에도 쓰겠다.
소쉬르(F.D. Saussure)의 기호이론'에 관한 수업을 준비하라.
. 조종혁, “커뮤니케이션학”, 세영사, 1994, pp406-448
참고문헌 : T. Hawkes, Structuralism and Semiotics, University of California, 오원교 역, “구조주의와 기호학”, 신아사
장병기,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 한글학회, 한글 제181호, 1983, 119-142
김헌태(2015), p25-31
위의 범위를 읽고 이에 대해서 페이퍼를 1장 내외로 써 오면 된다.
언어, 소쉬르
shit과 shet을 쓸 수 있을려면 그 용어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그 상황에서 두 가지를 설정해서 어떤 것이 적합한지를 뉘앙스에서 가지고 온다.
또한 이것을 결정할 때 젠더화되어 있는 문제를 어떻게 표출하는가?도 고민해야 한다.
언어는 세상과 사회에, 그리고 타자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엑스터시
소설 그러니깐 만들어낸 이야기는 항상 그 작가의 최고절정의 배설물이다.
소설에서 모든 작가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배설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모방이론으로 자신의 것으로 삼기도 한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소설이 가지고 있는 구조에 통제되는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 라캉 주의
프로이트와 라캉은 모든 인간을 그릴 때 성적충동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이 프로이트와 라캉의 언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사회를 생각해보라, 성적충동으로 무너지는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이 근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정신분석학이 사회과학으로 넘어오는 순간, 학문은 통제의 수단이 된다.
원래 인간의 정신을 치료하기 위한 수단으로 마련된 정신분석학이, 대중을 만들어내고 대중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사회과학은 정신과학을 가지고 왔다.
정신분석학은 근본적으로 인간은 남에게 사랑받고 싶어한다는 욕구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는 성적충동이될 것이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확장되면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다이아몬드와 밥을 볼 때 왜 다이아몬드를 귀중하다고 여기게 되는가?
인간의 생물학적 욕망과 이데올로기적 욕망이 하나가 되었을 때가 있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프로레탈리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욕망은 한계체감이 빨리 오기 때문에 두가지가 일치하는 순간은 정말로 순간적이다.
인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을 위해서 삶을 포기한다_헤겔'의 이야기다. 헤겔은 이것을 인정투쟁으로 발전시킨다.
지젝이 왜 마르크스를 버리고 헤겔로 돌아가자고 했는가? 일시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욕망은 곧 사라질 것이고 헤겔이 이야기하는 근본적인 인정투쟁이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욕망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말하는 빵은 빵이 아니다.
인상, 근본현상
사람은 근본현상을 가지고 있다.
원래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 기본 골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상은 남는다. 그러나 사실은 변한다.
전략, 객관화
전략을 짜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객관적이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주관성을 객관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전략을 짤 때도 객관성을 확장시킬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객관성을 인정받는 순간 그에 따른 주관성의 명징성을 획득한다.
통제, 인간
인간은 자기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해보자. 그가 생각했던 방법론적 회의론' 그것은 과연 가능할까? 여기서부터 사고의 명징성, 그러니깐 내가 생각한게 정말 확실한가?를 고민해보자.
지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지젝은 데카르트란 유령이 떠돌고 있다.라고 말한다.
확실성의 주체에 대한 선언은 다시 말하면 인간 이성에 대한 확실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데카르트 이전에 종교학적인 접근은 인간은 암흑기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암흑기에서 이성을 건져내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주체라는 것으로 인문주의'르네상스'를 연다.
이렇게 진리를 인식할 수 있게 되면 옳고 그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지위를 격상시킨다.
천부 인권이 아니라, 천부이성이 된다. 선천적으로 인간은 이성을 부여받은 존재라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경험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이성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반대한다. 경험하는 것이 인식대상의 전부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것을 받아서 이성을 3가지로 나눈다. 순수이성 비판과 실천이성으로 나누어서 윤리의 문제로 넘어간다. 이 부분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칸트가 이야기한 윤리학을 받아서 막스베버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이야기한다. 의도가 옳아야 하는가? 결과가 옳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오게 된다는 말이다.
헤겔은 이제 절대자의 의지에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세상의 역사는 하나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니깐 헤겔의 사고구조 안에서는 절대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관념이라는 없고, 관념은 물질의 반영이라고 하면서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킨다라고 말한다. 절대자의 의지가 아니라 생산의 역사와 물질의 생성과정을 바꾸는가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사회주의 관점에서 인간문명은 최종적으로 종착점이 정해져있다라고 예측을 하면서 역사의 결정론을 이야기한다.
이 개념이 현대로 넘어 오면서 알튀세르와 푸코로 이어진다.
근복적인 질문, 생물학적인 근본
인간은 왜 공포를 느끼는가? 왜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있게 되는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인 근본적인 부분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이 언제까지, 어디까지 확장되는가?
인간에 대해서, 인간의 현실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필요한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원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생물학적 진실이 가정되고 나면 언어적 진실이 만들어놓은 세상에서 살게 된다. 우리가 소쉬르로 넘어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현실은 언어로 부터 시작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를 표현할 때 언어를 빌리지 않고 개념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가? 생물학적 차원에서의 정의는 무엇인가? 자연적 차원에서 정의는 무엇인가? 정의는 다른 언어개념이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말이 그렇다.
정의를 가져본 적이 있는가? 정의로운 세상을 맛 본적이 있는가? 어떤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도처에서 어떤 세상을 상정하고 그것이 정의로운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북유럽이 정의가 실현되는 천국인가?
언어는 이념이다. 언어와 이념의 마술로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수단이 생긴다. 이러한 방식이 정치적으로 넘어오면 선거전략이 된다.
마지막까지가면 생물학적인 죽음까지간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 그것을 포기하게 되면 상호작용이 중단되면서 이기적이 되거나 포기하게 된다.
인생은 아름답지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 그러나 미학적 측면에서 아름다움을 제시하면 사람들이 따라오게 된다. 그것이 캠페인이 된다.
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수업에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
들뢰즈를 공부하는 이상, 나는 프로이트가 가정하고 있는 욕망과 리비도에 대한 전제를 가장 처음으로 혹은 가장 우선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
시대가 만들어 놓은 사상의 틀인 패러다임 자체를 분석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 패러다임을 벗어나는 이론과 현상은 잘 발생하지 않는다.
메타인지'를 어느수준까지 넓이고 확장시켜야 할까?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기 않고 함께 결정할 수 있으려면, 통제하는 사람들을 통제해야 하는가? 통제하지 못하도록 어떻게 해야하는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진리'를 이루는 것들은 어떤 것일까?
인식은 축적되고 순간순간 인상에 의해서 변화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인식이 축적되면서 그 인식은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칸트가 이야기했던 이성의 작용이며, 라캉이 이야기했던 무의식의 구조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만약에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보다 신으로 부터 받는 사랑이 충만하게 될때 인정욕구, 인정투쟁으로 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깐 충만한 사랑으로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 인정욕구, 성적충동?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다시 칸트, 라캉, 들뢰즈, 프로이트, 지젝, 베버, 소쉬르, 알튀세르'에 대해서 알아봐야할 시간이 왔다.
이전보다 더 깊은 토론과 논의가 시작될 것이다. 이제 다시 업그레이드가 시작된다.
현실에서 이론이 정말로 적용 가능한지를 알아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