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커뮤니케이션 이론과 실재 2강
20150912_한림국제대학원
김헌태_정치커뮤니케이션 이론과 실재
2강_소쉬르, 일반언어학강의
들어가기
피어스는 소쉬르의 이론을 이어받아서 객관적 실체가 있는가?를 고민한다. 코딱지는 객관적 실체가 있는가?(다소 엽기적인) 꼬딱지는 자체만으로 더러움을 가지고 있다고 하긴 보다는 꼬딱지를 파는 행위자체가 더러움이라는 것을 표징해낸다. 이것은 사회적 의미가 발생한 것이다.
왜 아이들은 코딱지를 파 먹는가? 코딱지는 먹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데, 왜 자라면서 사회적행위로써 코딱지를 파면 안된다는 관념을 가지게 되는 걸까? 우리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는 거의 기억과 의지에 의존하고 있다. 실체는 잡히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개념틀 안에서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쉬르, 객관적 실체
소쉬르는 상징에 의해서 만들어진 의미를 분화시켰다. 모든 기호는 자연적인 무엇인가를 과대 표상하고 있다. 과대표상은 언제나 현실 속에 있다. 사람, 정의, 민주주의, 참여' 같은 것들은 언제나 과대표상이다. 과대표상화 되어 있는 개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는가?
예를 들면, 나라는 실체하는가? 그렇데 어떻게 나라를 보고?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가? 모든 언어는 어긋난다. 기의와 기표는 서로 연결이 안된다. 표상하는 문제가 발생하면서기의는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다. 기표는 표상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텍스트는 컨텍스트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개인발화(빠롤)의 목적이 있다. 개별적인 기호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빠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랑그의 법칙을 따라야 하지만, 그것 자체로 새로운 의미들이 만들어진다. 랑그는 언어체계, 빠롤은 발화를 이야기한다.
구조주의 모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구조 안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상대적 개념을 구조적으로 안착시켜 놓은 것이 구조주의라고 할 수 있다. 도교에서 태극이라는 것은 상대적 개념 속에서 구조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실 소쉬르의 언어체계모형과 비슷하다고 알 수 있다.
소쉬르, 구조적 모델
기호학적 접근의 일차적 관심은 인간의 의미생성 과정을 표징과 표징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일이다. 표징구조의 연구 혹은 구조적 모델에 의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주의 관점의 현대 기호학에서 구조적 모델이라는 개념은 수용자의 문화적 상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개념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표징관계에서의 이미생성이란 그러한 표징관계의 주체자인 수용자의 역할을 동시에 강조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수용자는 전통적 연구에서와 달리 리시버가 아닌 리더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수용자란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읽는 사람인 희미의 협의자인 것이다.
표징이란 항상 자신이 아닌 다른 그 부엇을 지칭함으로써 인간의 사회적 의미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자극이다. 표징은 대부분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인간의 행동을 포함한다.
언어, 담론
언어는 남들이 그렇게 쓰는 것이라고 한다면 담론은 그 언어를 가지고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똑같이 따라가는 것이 담론이다.
푸코의 담론에 대한 이해는 알튀세르가 상부구조, 인간주체가 이데올로기 현실을 구성한다는 부분에서 일정수준 유사하다.그러나 이데올로기 내부에서 작동하는 권력 자체를 계급적 억압개념, 또는 수직적 권력관계로 이해하는 것과는 상이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라캉, 사회적 관계
사회적으로 아버지'라는 이데올로기를 빼고나면 생물학적으로 우리에게 남는 가족이라는 개념은 해체된다. 아버지같다'라고 할 때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결국 과잉표상된 아버지의 개념이지 않는가?
경찰이 내 자식을 죽였다고 생각해보자. 그 경찰은 다수로써 국가를 표징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 광주의 80년의 일이었다. 국가에 의해서 자신의 가족이 죽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리더, 리시버
리더와 리시버의 차이는 무엇인가?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차이는 무엇인가? 히틀러가 연설을 하면 리시버는 그것을 수용한다. 커뮤니케이션 삼자효과는 자신이 선동되면서 다른 사람이 선동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해독자는 엄밀하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 때 3가지의 방법으로 듣는다. 지배적dominant, 협의적negotiated, 거부적 수용형태oppositioinal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랑그와 빠롤의 차이는 무엇인가?
구조주의, 언어모델 변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상부구조, 그리고 소쉬르의 언어로 이뤄진 상징체계로서의 외부세계, 그리고 푸코의 권력이 내제된 언어로서의 담론에 대한 논의들은 하나씩 시사점을 제시해준다.
인간주체가 놓이는 외부세계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는데, 즉 외부세계가 주체를 어떻게,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사회적 주체로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일련의 설명과정인 것이다. 인간주체와 외부세계의 매개는 언어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 그리고 이와 같은 언어는 궁극적으로 담론이란느 의미체계를 지칭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담론에는 사회적 권력관계가 언제나 작동한다는 점을 설명한다.
이와 같은 주체에 대한 구조주의적 논의는 주체를 근본적으로 언어와 담론,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개념으로 본다. 따라서 인간주체가 외부세계와 상호 정립적으로 생성된다고 할 때, 인간주체는 곧 언어와 담론구조에 의한 본제물과 같은 위상을 가지게 된다.
김헌태교수님, 지론
자식을 챙기는 사람은 매국노일 가능성이 크다. 자식을 챙기는 것, 내자식프리미엄은 언제나 내 목적 프리미엄의 과대표상이다. 우리는 왜 옳아야 하는가? 옳으면 어떤 효용이 있는가?
인간은 언어적 세계 안에서 안정감을 누린다. 그러나 언어체계 안에서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곧, 마음의 변화가 생기고 신체적으로 반응하게 된다.언어에는 진실이 있을 수 없다. 발화하는 순간, 발화의 대상자만 그것을 알 수 있다.
민네이션
과대표상'은 결국 인간들의 욕구를 불러 일으키지 않는가?결국 라캉으로 가게 되면 두가지의 예화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안티고네와 오이디프스 컴플렉스이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사회적인 맥락안에서 우리의 선택은 어떻게 되는가?이다. 생물학적으로 풀어내는 것을 오히려 선호하는 방식으로 프로이트는 설명하고, 그것을 욕망이론으로 라캉이 발전시킨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 중에 하나는 들뢰즈는 앙티오이디프스 컴플렉세에서 다른 이야기를 한다. 목적론'이 설정되어 버린 인간의 정신세계는 어디서나 수단화'를 강조하거나 실행하게 있게 된다.
성경은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 강권적으로 다가오는 개념은 아니다. 익숙해진 기대'가 만든 언어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기대하지 않은 것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민네이션_이슈발표
인간은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는 체계가 있고, 사회적인 맥락이 있다. 체계는 랑그라고 할 수 있고, 사회적인 맥락은 빠롤이라고 할 수 있다. 기표와 기의의 연결은 랑그와 빠롤 안에서 사회적으로 연결되어서 문법을 이룬다. 어릴 적, 처음 한글을 배울 때 너무 어려운 것은 직관적으로 생각했던 사자의 모습과 '사-자'라고 발음하는 단어 사이의 괴리였다. 그래서 한글을 익을 때 매우 힘들었고, 초등학교 1학년이 끝나갈 때쯤 겨우 기본적인 한글의 문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언어의 저변에 깔려 있는, 언어를 만들어내는 권력에 대해서는 푸코의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지식과 권력은 연결되어 있고 언제나 권력은 지식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지식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고, 그 언어의 지향성의 축적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인간의 의지가 먼저인가? 언어가 먼저인가? 이미 언어 안에 이데올로기, 방향성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잠시 현상학자들의 근본테제를 가지고 오자면, 인간의 의식과 시선, 몸은 항상 시간 위에서라면 어디로든 향하게 되어있다. 이러한 지향성은 때론 한 사물에 축적되기도 하고, 관계를 만들어내기도 하며, 몸에 축적되어 근육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삶에는 지향성이 있기 때문에 그 지향성의 방향이 중요하다. 그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결정하는 것은 경제적인 조건들보다는 문화적인 조건들이라는 것이 아마도 알튀세르의 주장일 것이다. 지향성의 방향설정 말이다.
험한 꼴을 보였던 2009년 지상파 방송에서는 아는 선배가 국회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 때 그 선배는 국회의원의 보좌관이었고, 나는 그 선배가 지키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해 보았다. 미디어법이 통과되면서 종편'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겼다. 조중동이라는 보수적 언론들이 만들어낸 방송국에서는 주로 정치적인 뉴스와 달콤한 드라마, 그리고 엽기적인 예능프로그램을 내 보냈다. 누구도 검증해주지 않았고,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당하는 일이 절대 없어야 겠다'라는 의지가 반영된 듯이 지상파가 가진 한계를 시장의 힘으로 극복한 것으로 보였다. 어머니는 '이제만나러 갑니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전해주는 북한에 대한 정보가 진리'라고 생각하신다. 그리고 썰전에서 나오는 토론내용이 모두 진짜라고 믿는다.강남에 살고 있는 아는 후배는 지금까지 김어준의 '나는 꼼수다'를 들어본적이 없다고 한다. 밀양 송전탑 사건, 제주 강정마을, 세월호 사건까지 여러이슈를 나누다가 보면 서로 참고하고 있는 미디어가 달랐다. 말이 통하지 않았고, 설득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만약 우리가 공부할 것처럼, 소쉬르에서 부터 푸코까지의 전문적인 이론을 공부하고 그것을 대중들을 유도하는 전략으로 만든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에드워드 버네이즈와 괴벨스와 같은 사람들의 전략은 탄탄한 이론에 바탕을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적 외삼촌인 프로이트와 식탁에서 하던 대화가 버네이즈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산업심리학'이라는 과목명을 들었는데 매우 의아해했는데 프로이트와 라캉과 같은 정신분석학을 통해서 소비를 늘리는 방식이라는 것을 듣고 점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든지 한국사회를 살아간다. 한국이라는 장소와 시간대를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한국 사회에서 학교를 다니고 밥을 먹고, 교회를 다니고, 신문을 본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노무현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매우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가 우선하는가? 한국의 정치가 어떻게 현실을 규정하는가? 그러한 정치의 방향성은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이번학기에 고민해봐야 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Ht_tj8etLlo 진중권 선생님의 명강의
https://brunch.co.kr/@minnation/675 철학아카데미 라캉강의는 아래를 참조
생애
출생
요제프 괴벨스는 1897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라이트(Rheydt)에서 출생하였다. 괴벨스의 할아버지 콘라트 괴벨스는 농부였으나, 그 당시 농촌의 사람들은 도시의 노동자로서의 삶이 자신들에게 더 나은 삶이 될 것이라 믿고 공업 도시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콘라트도 이중 한 명이었는데, 공업도시 라이트로 이주해서 결혼하고 요제프 괴벨스의 아버지인 프리츠 괴벨스를 1867년에 낳은 후 평생을 노동자(프롤레타리아)로 살았다. 요제프 괴벨스의 아버지 프리츠도 심지 공장에서 단순 노동자일뿐 이였으나, 부지런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후에는 공장 지배인이 되어 소시민(프티부르주아) 계급이 된다. 프리츠 괴벨스는 1892년에 카타리나 오덴하우젠과 결혼하여 아들 세 명과 딸 두 명을 낳았는데 요제프 괴벨스는 그들의 셋째 아들로 1897년에 태어났다.
성장
그는 어릴 때 폐렴을 앓아 죽을 고비를 넘긴다. 폐렴으로부터 살아났으나 대신 몸이 허약해졌다. 또한 골수염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었다. 그의 가족은 그를 치료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수술 또한 실패로 돌아갔고, 그의 다리는 활처럼 굽어졌다. 그는 후에 그 굽어진 다리 때문에 친구들은 그를 놀렸고 괴벨스는 자기 자신을 열등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고, 내성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런 신체적인 결함을 지식으로 만회하려고 했기 때문에 후에 그가 지식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상급학교에 가서는 그런 성향이 더욱 더 강하게 되었는데 괴벨스는 상급 학교에서도 최상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 때문에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여러가지 도움을 청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는 그 과정에서 우월감을 느꼈다고 한다. 후에 그는 가톨릭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본·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박사 학위를 받은 뒤에는 자기 자신을 항상 박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죽음
1945년 히틀러가 자살한 후 나치의 총리에 올랐으나, 이튿날 총리 관저의 대피호에서 부인 마그다 괴벨스와 자살하고 6명의 아이들(1명의 아들과 5명의 딸)을 독약을 먹여 같이 자살하였다. 그리하여 전쟁후에 남은 가족의 유일한 사람은 하랄트 크반트(Harald Quandt)였다. 하랄트 크반트는 마그다가 그녀의 전 남편 크반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는데, 1944년 전쟁 중 공군 중위로 이탈리아에서의 비행기 추락으로 부상을 당하고 적에게 붙잡혀 포로로 있었어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활동
1차 대전
1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에 그는 그의 조국을 위해 출정하여 전선에서 싸우기를 바랐다. 그는 그것을 1년 자원 복무 능력 증명서를 마련해둘 정도로 그 행동을 고귀하고 숭고한 행동으로 보았지만 그 증명서는 효력이 없게 되었고 그는 그저 대체 복무를 하게 되었을뿐이였다. 그는 전투원은 아니었지만 비전투원으로서 활약함으로써라도 소속감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전쟁 중에 그의 형제 한스가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혔고 그의 여형제 엘리자베트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 와중에도 그는 아비투어에 합격하여 진학하였는데 독일어 실력이 최고였기때문에 졸업사를 낭독하게 되었다. 졸업사가 끝난 뒤 교장은 그에게 유능한 웅변가가 될 재능은 가지고있지않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조국구호사업회의 행정병으로 소집되어 잠시 근무했었으나 상관들은 그의 다리와 군인답지 못한 외모를 보고 머지 않아 괴벨스를 다시 집으로 돌려 보내버렸다. 한편 괴벨스의 기대와 믿음과는 다르게 전쟁은 독일의 항복으로 끝이나고 괴벨스는 그 결과로 그의 신앙을 잃게 되었다.
2차 대전 전 정치 활동
1922년부터 그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을 관심 있게 보게 되었고 그 후로 부터 3년 후인 1925년 나치에 입당했다. 그는 자주 연단에 섰다. 1925년 7월 11일 바이마르에서 열리는 회의 전날 괴벨스는 처음으로 히틀러와 만나게 되는데 그 후로 그는 더 히틀러를 신봉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괴벨스는 당 지도부에서의 독재를 저지하기 위하여 독일 북서부의 나치세력을 결집하였다. 그 결과로 그들은 국가사회주의 서한을 발간하였는데 그레고어가 발행인이 되고 괴벨스가 편집을 맡았다. 그들은 그 잡지로 인해 그들의 뜻을 히틀러에게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괴벨스는 히틀러와 자신의 뜻을 해명할 수 있는 대화 자리를 가지기를 원했는데 히틀러가 독일 북서부 나치를 순방하게 되었다. 11월 6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히틀러와 괴벨스가 두 번째 만남을 가지게 되었는데 괴벨스는 오히려 히틀러에게 완전히 매료 당하고 만다. 1928년 국회의원, 1929년 당 선전 부장으로서, 새로운 선전 수단을 구사하고 교묘한 선동 정치를 하여, 1930년대 당세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잡자, 국민 계몽 선전부 장관·문화회의소 총재로서 문화면을 완전히 통제하고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였다.
2차 대전
1939년 2차 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략으로 발발되었고 괴벨스는 국민들에게 분노를 심어 주기 위해 폴란드가 폴란드의 독일소수 민족들에게 잔혹한 행위들을 한다고 보도하게 하였다. 폴란드 침략중에 히틀러는 외무부의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에게 해외 선전을 맡겼다. 리벤트로프는 소련과의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었기 때문인데, 결국 리벤트로프가 괴벨스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얻기도 했었다. 괴벨스는 이 지시를 거부하며 무력화 하려고 노력했다. 그후로 리벤트로프와 괴벨스는 서로에게 큰 반감을 가지게 된다. 줄어드는 괴벨스의 권한을 다시 찾기 위해서 괴벨스는 고위 관료와 국장들을 회의에 소집해 각 담당자들에게 언론, 라디오, 뉴스 등의 선전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 괴벨스는 전쟁을 위해 국민들의 분노를 이용하기를 원했고 폴란드가 독일계 소수 민족들을 탄압한다고 보도하게하여 그 분노를 이끌어내었다. 폴란드를 점령한 뒤 히틀러는 서방의 강대국들에게 평화를 제안했다. 괴벨스는 영국의 답변을 기다리며 은근히 평화가 다시 찾아오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은 폴란드가 당한 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거절했고 히틀러는 평화의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하고 영국에 대한 선전을 괴벨스에게 지시하였다. 그에 따라서 10월 14일에 귄터 프린 함장의 독일 잠수함이 영국의 로열 오크호를 격침하여 883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그 즉시 괴벨스는 처칠이 시한 폭탄을 이용해 배를 침몰시키려했고 그 안의 수백 명의 미국인들을 익사시키려고했다는 등의 주장을 라디오 등의 매체를 통하여 그를 맹공격 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영국 국민과 영국의 지도자들을 분열시키는 선전 활동을 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L8SkpjmsINA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년 11월 26일 ~ 1913년 2월 22일)는 스위스의 언어학자로 근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조로 불린다.
빠른 사실: 페르디낭 드 소쉬르 Ferdinand de Saussure, 출생 ...
언어학에서 사용되는 중요 개념 중 공시 언어학(synchronic linguistics)과 통시 언어학(diachronic linguistics)을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소쉬르의 제자들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편집하여 그의 사후(1916년)에 출판된 《일반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가 있다.
젊은이 문법학파의 제자였으나 그들의 이성과 존재론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전근대적인 접근 방법을 취하였다. 언어 현상을 전체로서 체계 속에서 고찰하였다. 드 소쉬르의 최초의 논문이자 가장 중요한 저작인 1878년의 Mémoire sur le système primitif des voyelles dans les langues indo-européennes (인도유럽어족 원시 모음체계에 관한 논문)가 바로 그것이다. 이 논문에서 인도유럽어족의 음성체계에는 이미 알려진 음 이외에 소멸한, 음가를 알 수 없는 한 음이 있었다고 가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941년 헨드릭센(Hendriksen)이 히타이트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드 소쉬르가 언급한 바로 그 위치에서 어떤 후두음을 발견함에 따라 드 소쉬르의 이론의 정당성은 확고해졌다. 이 이론은 후두음 이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소쉬르의 언어세계
소쉬르는 언어 세계를 랑그(langue)와 파롤(parole)로 나눈다.
파롤은 개인적이 언어 사용, 개인적인 언어 스타일을 의미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말하는 스타일이나 각 지방의 사투리가 이에 해당한다. 또한, 개인적 발화에 의미를 부여해 주고 발화 행위를 가능케 해주는 추상적 체계를 랑그라고 했다. [1] 예를들어 장미라고 한다면 장미라는 단어 그 자체는 랑그이며, 붉은색을 띄며 정열을 의미하는 것은 파롤인 것이다.
기호의 자의성
기호의 자의성(arbitrary)이란 기표와 기의 간 연결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이라는 말이 나라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기표인 음성의 연속과 그것이 나타내는 개념과 아무런 자연적·내적 관계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므로 자의적이다. 또한 기표는 시간의 선상에서 전개된다. 기표는 청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정한 음의 길이를 가지고 있고, 이 음의 길이는 시간의 선이란 차원에서 헤아릴 수 있다. 언어 기호는 언어 연쇄의 선상에 놓이는 순서와 위치에 따라 변별적 단위가 되고 의미 변화를 가져온다. 이와 같은 언어 기호의 성질을 선조성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기호의 특성은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기호의 제1의 원리와 제2의 원리로 설명된다(소두영, 1991).[2]
언어의 가치
기호의 의미는 그 자체의 고유한 어떤 내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단어들과의 관계속에서 '차이'에 의해 규정된다. 이는 의미가 긍정적으로(positively)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는 관계에 의해 부정적으로(negatively) 규정된다는 것이다. 기표와 기표의 차이로 인해 기의가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