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정치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Apr 14. 2019

아나키즘과 정치

비타악티바 정치해봄시리즈_아나키즘

20190409_정치해봄

비타악티바 아나키즘_하승우




들어가기  

    국가는 큰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 작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 크다. 국가를 단위로 보기에는 너무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 아나키즘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지 체제를 만들어서 몸집을 불리는 것은 아니다.   

    아나키즘의 핵심요소는 자급자족, 자치, 부당함에의 저항, 자유가 있다.   

    우리는 아나키즘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아나키즘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   




목차                    

1장 왜 다시 아나키즘인가


1.오래된 미래, 아나키즘

2.아나키즘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들


2장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


1.왕을 부정하고 대동을 꿈꾸다

2.국가의 중심에서 자유를 외치다

3.세계의 아나키즘


3장 아나키스트의 목소리 - 책으로 만나는 아나키즘


1.프루동의 『소유란 무엇인가』

2.바쿠닌의 『국가주의와 아나키』

3.크로포트킨의『빵의 쟁취』

4.머레이 북친의『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

5.신채호의『조선혁명선언

6.유자명의『한 혁명자의 회억록』


4장 진화하는 아나키즘, 논쟁의 역사


1.내가 선택하는 삶의 중요성

2.공생공락의 삶을 꿈꾸며


5장 아나키즘의 길 아나키스트의 길


국가 없는 삶은 가능할까

이미 실현되고 있는 코뮌의 꿈들





동양, 아나키즘  

    동양에서는 이미 예전부터 아나키즘적인 사상이 있었다.   

    맹자는 평범한 백성이야말로 영원히 갈아치울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노자는 소국과민과 무위를 이야기하면서 국가의 기능을 크게 만들지 아니면서 생활을 영위하려는 노력을 했다.   

    묵가는 강탈, 착취, 정복에 대한 강렬한 저항을 하면서 제국주의 전쟁을 막기 위한 행동을 했다.   

    우리나라의 대동사상은 정여립을 중심으로 신분차별과 남녀차별 없는 대동계를 조직했다. 천하공물설과 하사비군론을 주장했다.   


아나키즘, 탄생  

    프랑스 대혁명 시기인 1789년에 혁명의 과정에서 집권당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해서 처음 사용되었다.   

    고드윈과 프루동은 인간성을 억압하는 정치를 타파해야 한다는 인식과 자연스러운 진리와 상식의 질서를 만들기 위해 과정으로서의 혼란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나코-코뮤니스트는 국가와 시장을 대체한 이상적 코뮌건설을 추구했다. 코뮌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것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모여서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집단이었다.   


    아나코-조합주의자는 노동조합과 길드, 지역과 권력을 쪼개고 이들의 연합으로 국가를 대체하자고 주장했다.   


    아나코-개인주의자는 공동체나 조직도 권력으로 변질된 가능성이 있으므로 개인의 행동을 강조했다.   


    한국에서는 박열, 신채호, 조선노동공제회, 남화한인청년 연맹 등으로 활발하게 아나키즘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민족주의 담론에 묻히고 공산주의자들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탄압을 받았다.   


주요사상, 아나키즘  

    푸르동은 소유는 도둑질이라고 말했다. 공동의사물에 대한 일정기간 이용할 권리만을 인정하고, 인간의 사회적 본능을 최대치로 활용할 것을 추구했다. 공유제 공산주의, 소유제 자본주의를 모두 부정했다.   

      노동은 그 자체로는 자연물들에 대하여 어떠한 전유능력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노동의 이러한 능력을 인정해줌으로써 사람들은 노동의 유형, 생산물의 희소성, 생산능력의 불균등 여부에 관계없이 소유의 평등으로 인도된다.     

      정의의 질서 안에서는 노동이 소유를 파괴한다. 인간은 이 질료를 점유하고 사용할 뿐이며 항구적인 노동의 조건 아래서 일정 기간 동안만 자신이 생산한 사물들에 대해 소유권을 가진다.     

    바쿠닌은 모든 사람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국가는 악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정치권력은 결국 억압과 착취를 가져올 것이므로, 국가는 대안이 될 수 없다. 사회를 바꾸는 방법으로 직접적인 민중봉기나 점진적인 협동조합 방법 두가지를 제시했다.   

      혁명적 독재와 국가주의의 차이점들은 겉모습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그 둘은 소수의 지성과 다수의 어리석음을 가정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지배라는 동일한 원리를 나타낸다.    

      따라서 그 둘은 머지않아 지배하는 소수의 정치적, 경제적 특권과 대다수 민중의 정치적, 경제적 종속을 지속시키고 영구저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전에서 똑같이 반동적이다.   

      이제 현재의 권력과 사회구조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자신들의 독재를 세우려는 목적을 가진 독재적 혁명가들이 왜 결코 정부의 적이 아니고 앞으로도 적이 될 수 없는지 분명해졌다.     

    크로포트킨은 자원과 지식의 공동 소유를 주장하면서 ‘모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중간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제도일 뿐, 자치에 의해 운영되도록 한다면 사람들은 스스로 합의를 통해 길을 찾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면서 상호부조론을 주장했다.   

      문명사회에서 우리는 부유하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빈곤한가? 대중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럽고 힘들게 일하는가? 과거로부터 많은 부를 물려받았고 하루 몇 시간의 노동에 대한 대가로 모든 사람의 안락을 보장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있음에도, 많은 보수를 받는 노동자들조차 내일을 확실할 수 없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소수가 생산에 필요한 모든것, 즉 토지, 광산, 기계, 교통로, 식량, 주택, 교육, 지식등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국가를 사랑하는 사회주의자들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얼마나 자주 읽었던가? “그렇다면 누가 미래 사회의 운하수송을 규제할 것인가? 만일 당신네 아나키스트 동지들 중의 하나가 자신의 거룻배를 운하에 대어 놓고 다른 수 많은 배들을 가로막으려고 한다면, 누가 그에게 이성을 되찾도록 할 것인가?”    

    머레이북친은 사회생태주의를 이야기하며 인간뿐 아니라 자연도 자율성을 누릴 수 있어야 생태 위기의 극복이 가능하고, 생태주의 역시 사회현상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율적, 분권적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신채호 선생님은 ‘파괴가 곧 건설’이라고 주장했다. 일제의 착취에 맞서서 참정권, 자치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식민통치, 특권계급, 문화사상, 약탈제도를 파괴하고 새롭게 건설할 것을 주자했다.   

    유자명은 계급, 이념, 민족을 초월한 상호부조를 주장했다. 폭력혁명 노선과는 거리를 두었으며,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가없는 사회,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 주의는 산업화, 공업화는 필수라고 했고 농촌의 파괴도 발전과정으로 보았다. 대규모 생산체계를 긍정하기까지 했다. 또한 국가권력을 빼앗기 위해 노동자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중의 계몽, 수동성을 인정했다.   


    반면 아나키즘은 과학의 유용성은 인정하지만 농업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공동체를 지향한다. 국가권력을 파괴하기 위해 노동자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사람은 그 사회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사람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적 유물론을 주장하며 사회발전에는 단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전위조직과 민중독재를 주장하면서 중앙집권적 국가 권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피라미드의 서열 변화를 인정했다는 특징이 있다.   


    반면, 아나키즘은 사회발전에 정해진 단계란 없으며 대중의 본능과 연대에 의해 드러난다. 사회구성원들의 직접 행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피라미드를 파괴하고 수평적 네트워크를 수립하려고 한다.   


    연대를 위한 조건으서의 자치와 분권, 자본의 세계화와 국가 권력을 거부하는 연대로서 아나키즘의 특징을 볼 수 있다. 강력한 반전운동을 진행하거나 국가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고 보았고, 불복종, 시위, 도망 등 다양한 행동방식으로 전쟁을 거부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국, 아나키즘 논쟁  

    불교, 유교, 도교 등 지배적 사상이 아나키즘과 일맥상통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민족주의 혹은 외교론의 성장을 가져오기도 한다.   


    조선노동공제회에서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가 대립이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신간회에서 민족주의와의 대립각을 세웠다. 계급, 민족적 차별의 완전한 철폐를 주장했다.   


    아나-볼 논쟁이 있었는데 볼셰비키는 예술의 계급해방 운동에서의 역할을 강조했다. 아나키즘은 예술의 정치적 도구화를 반대한다.   


    사회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독재체제 모두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새로운 세계, 대안  

    국가를 넘어서는 어소시에이션의 세계공화국을 가라타니 고진이 이야기한다.   


    국가를 통하지 않은 다양한 사회적 실천인 코뮌만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아나키즘은 삶의 지혜이다. 다양함과 자치, 연대, 민중적 관점을 전제하고 있다.   




토론, 아나키즘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방식이 사회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에 동의하는가? 혁명을 꿈꾸는 사람은 혁명 이후의 삶과 같은 모습으로 사랑야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과 그것을 이루는 방법은 꼭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배트맨 다크나이트에서 고담시장과 배트맨의 관계는 어떠한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스윤리학에서 ‘목적은 수단의 질과 양을 결정한다’라는 일원론을 이야기했고 플라톤은 이상과 정치는 다르다는 식의 이원론을 이야기한다.     



    정치권은 필연적으로 억압과 착취를 가져오는가? 국가는 타도의 대상인가?   


    국가를 대신할 조직으로, 자발적인 작은 공동체의 상호부조로 충분한가?  


    발전과 생산력 향상, 산업화는 필수인가?   


    아나키즘의 이상을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함석헌과 바탈과 씨알, 장일순의 생협과 신협을 생각해보자  




민네이션, 생각  

    한나아렌트가 말한 ‘노동, 작업, 행위’에서 아나키즘이 놓치고 있는 부분은 작업을 통한 인공물들이 인간들의 생활세계를 식민지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또한 시간 개념에서 볼 때 과거의 노동과 미래의 작업의 틈입을 지금의 이 공론장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막을 수 있는가? 우리는 행위에 얼마나 많은 힘을 싫어주고 있는가?   


    System과 Systematic의 차이가 있는데 아나키즘은 system이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만든거라고 생각했기에 반대했고 자신들은 나름대로의 sytematic한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토피아가 싸움의 시작이 아닌가? 우리는 미래가 우리를 식민화시키도록 자유롭게 허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컨텐스트 통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론, 방법, 생각이 우리가 지킬 텍스트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의 손을 떠나는 작업물들은 그 자체로 시스템이 되면 니클라우스 루우만의 이야기처럼 인간이 없이도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니체도 아나키스트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여기서 연결되는 것만으로도 가능할까?   


    네트로피와 엔트로피의 변증법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엔트로피는 파괴나 폭력이라면 네트로피는 화해와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미래를 항상 정해져있다고 믿어 버린다. 그럼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미래가 바귄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어떻게 바뀌는 미래를 생각할 것인가? 그리고 목적과 수단이 하나라면 그 목적에 맞는 방법은 무엇인가?이런 고민들이 시작되어야 한다.   


    노동의 영혼이 인공물에 수며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서 기술과 연결된 인공물을 습득하는 순간 그 사람의 욕망은 바로 그 인공물의 수준까지 깊어진다.   


    기술, 발전, 생산력, 산업화의 연결고리를 찾아보자. 지금까지 산업은 역사적으로 경로의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은 바로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적인 기원에서 다른 결정과 선택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다른 현재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스케일의 문제가 있다. 렘쿨하스의 말처럼 어떤 건물을 만들 때 1000명이 들어오는 입구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작은 입구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국가 개념에서 소규모적인 반응으로서 역사적인 경로를 바꿀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프렉탈의 입장에서 가장 기본적인 모듈들은 있어야 할 것이다. 핵심적인 모듈이 있을 때 그 공동체가 확대된다고 해도 같은 수준의 퀄리티가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아미쉬 공동체의 큐큐와 같은 것들이 좋은 모듈이 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매거진의 이전글 제도와 이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