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에서 느끼는 하루의 단편
오후4시에서 5시가되어 가는 시간은
나에게 삶의 죽음과 절망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는다.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리는 독특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자신만의 리듬을 가지고 살아 간다
다시 유년시절
나는 항상 삶의 이유, 존재의 근본을 고민해야 했다. 끊임없는 폭력과 압박, 그리고 사회적인 소외와 함께 수 많은 이중생활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중생활이란 다름아닌 집안의 사정을 사회적인 나의 테두리에 걸터앉히지 않는 것이다.
우리 가정의 비밀과 내 개인의 비밀,
그리고 부모님의 비밀과
우리 형의 비밀 같은 것들 말이다.
어릴적에는 오후 4시라는 시간이 내게는
영겹과 같은 찰나의 연속이었다.
안그래도 의미없는 시간,
희망없이 지나간 하루의 여정에서 더더욱이 죽음이라니!
12살의 나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항상 오후 4시를 지나가서 5시면 소멸해 버리는 하루살이 같은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어느덧 세상의 시간이 주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수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수 많은 경험들을 축적하면서 인생의 즐거움이 있다는 둥, 희망이 있다는 둥, 포기하지 말자는 둥... 여러가지 이야기를 난발하고 있다
그러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배르뎅씨처럼 나에게 오후 4시는 찬란하고 따듯한 태양이 어느새 작별인사를 하는 쇠락과 죽음의 시간이 되었다.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린 그 때, 아무것도 존재의 값을 내지 못하는 그 때, 비로소 내게 떠오로는 새벽별이 있었다
지금도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4시의 손님으로 인해서 삶의 중심으로
다시 한번 파고든다.
내가 5년안에 죽는다면,
아니 내가 1년 안에,
아님 바로 오늘 죽는다면,
나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내게 다가오는 저 시계바늘의 우렁찬 소리가
곧 4시를 알리고,
객관적인 시간의 그늘 아래서 숨주겨서 태양이 뜨기를 기다리는 겨울아침 이불 속 어린아이처럼 나는 웅크러 든다
시간 개념이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주어졌던 나의 어리시절들에서는 나에게 어떤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그 시간을 내 스스로 인식하고 나서야, 나의 주관적인 시간이 탄생하고 나서야 비로소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오후 4시라는 시간은 아멜리 노통에게도 나에게도 그 손님과 주인공들에게도 역시 익숙하지 않은,
아직은 반갑지 않은 시간이다.
새벽별 이야기는 이 책이 다 끝나갈 때 쯤 나에게 주어지지 않을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