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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13. 2019

'전체주의 기원' 입문하기

한나아렌트 스터디_철학아카데미

20190514_참여연대 느티나무아카데미
한나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_김만권
1강 전체주의의 기원 입문하기




들어가기

연대기적으로 보면 전체주의의 기원이 가장 먼저 나오고 그 다음이 인간의 조건이다. 인간의 조건에서 나오는 행위, 노동, 작업의 연결고리, 배치가 잘못되면 전체주의가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전체주의의 기원의 마지막에 인간의 외로움에 대해서 나온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외로워지면서 하나로 연결되는 대중이 되고 그 대중이 된 사람들이 전체주의로 빠지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최근 영국에서는 ‘외로움’을 관장하는 장관이 임명되었다. 외로움에 빠지면 담배를 하루에 15갑이나 피우는 효과와 맞먹는다고 한다. 외로움을 아렌트가 어떻게 다루는지 보자. 

아렌트의 질문은 하나다. ‘20세기에 어떻게 인간이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전체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는가’이다. 전대미문의 전체주의를 분석하는 아렌트의 관점은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이 책을 역사책으로 보면 안된다. 팩트 중심이 아니라 의견이나 설득하기 위한 이야기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원제는 ‘전체주의의 기원’인데 내용을 모두 살펴보면 ‘전체주의의 구성요소’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요소들이 필연적으로 전체주의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우연성은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에서도 볼 수 있다. 우연성을 얼마나 잘 다루는가에 따라서 정치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만들어낸다. 비루투와 포르투나를 다루는 것이 정치가의 일이고, 이러한 정치를 중심으로 공화국이 유지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렌트의 글을 읽을 때 아렌트가 시대적 상황에서 던지는 ‘질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관점보다는 철학적 관점, 삶의 깊은 중심에 던지는 질문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 



한나아렌트, 소개

1906년에 태어나서 1975년에 갑짜기 죽었다. 아렌트는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었고 근대성의 병폐인 전체주의와 정치의 상실에 관한 연구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체주의의 기원에서는 급진적 악을, 예루살렘의 아히히만에서는 일상의 악을 연구하여 20세기 철학에서 ‘악’에 대한 연구가 중심축으로 자리잡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왜 이성은 세계대전을 막을 수 없었는가?’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따라서 20세기 이후에는 이러한 고민에 있어서 ‘악’이라는 단어, 개념이 매우 중요했다. 

1906년 독일 린덴 지방에서 독일, 린덴지방에서 독일-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자란다.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하이데거의 지도를 받았으나 후일 하이델베르크로 옮겨가 야스퍼스의 지도로 1929년 ‘사랑과 아우구스티누스’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사실 아렌트의 탄생성의 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나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이데거, 아렌트

하이데거에게서 중요한 것은 ‘죽음’이었다. 종말, 종료, 마지막에 대한 철학을 강조한 하이데거와 다르게 아렌트는 탄생함, new-comer인 새로운 세대에게 집중하고 있다. 스승과 제자가 완전히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렌트는 실존주의를 스승과 다르게 자신의 앞에 놓여진 실존주의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인간이 도저희 넘을 수 없는 어떤 지점에서 그것을 뛰어 넘는 인간의 의지와 도전에 더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 



악, 급진성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악의 급진성’은 설명할 수 없음으로 정의되는데 이 개념을 계속해서 책 속에서 찾아보자. 

전체주의는 대중에 의해서 탄생했다. 대중의 외로움은 급속한 가속화의 결과이다. 가속화가 되면 시간 위에 있는 존재는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 버린다. 그래서 자신의 속도를 가지기 위해서 어떤 지점에 멈추고 싶어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바깥에 정지에 있어야 하는 어떤 혐오의 대상인 것이다. 혐오의 대상은 멈춰져 있고, 자신은 그 가속화를 벗어나고 싶기 때문에 어딘가에 닻을 내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아렌트, 시기

프랑스시기는 1933년부터 1941년까지를 이룬다. 1933년 프랑스로 건너가 남편 귄터스테른의 사촌이던 발터 벤야민과 친분을 쌓았으며 유태인 난민을 위해 일한다. 1937년 독일 시민권을 박탈 당한다. 1940년 독일 시민이자 철학자인 하인리히 블뤼허와 두번째로 결혼을 한다. 아렌트에게서 사실은 ‘시민권’에 대한 트라우마가 매우 컸다. 아무도 의지할 데가 없는 권리없는 권리를 살아가는 내내 이러한 시민권, 정치, 인권, 국가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게 된다. 

시민권과 같은 주제로 고민하던 사람은 주디스슈클라이다. 슈클라도 라트비아계 유대인이었고 망명하고 미국으로 가게 된다. 그래서 슈클라와 아렌트는 미국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다. 슈틀라는 ‘평범한 악덕들’을 쓰고 악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개념을 지었다. 로티나 롤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슈클라는 인간에 대한 잔혹함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유주의자’라고 말한다. 매우 철학적으로 뛰어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1941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친독일정권인 비시레짐에 의해 적국외부인enemy alien으로 분류되어 수용소로 보내졌으나 탈출하여 불법으로 만들어진 비자를 들고 미국으로 이주한다.  

미국시기는 1941년부터 1975년까지이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독일로 돌아가 홀로코스트의 여파로 인해 생겨난 어려운 처지의 유태인 어린들을 구하는 데 앞장 섰으며 팔레스타인 지구에 이들을 정착시키는데 기여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화해에 적극적이었다. 1950년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다. 버클리, 프린스턴, 노스웨스턴에서 방문교수직을 지낸다. 1959년 프린스턴 최초의 여성 전임교수가 된다. 이후 시카고대학교와 뉴스쿨에서 교수직을 지낸다. 




악, 아렌트

근대 세계에 악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근대가 기반하고 있는 이 세계가 이서적으로 이해할만한 것이다라는 기본전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악의 존재가 인간의 이성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잔인함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을 위협하는 근대 악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잔인함, 그리고 아우슈비츠는 그 잔인함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잔인함이 제기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죄없는 자들이 악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 세계는 과연 우리가 살만한 곳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근대에서 악의 움직임은 어떤가? 리스본 대지진 이후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였던 악은 자연의 악natural evil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묻고 궁금해 하는 것은 인간의 악, 바로 도덕적 악이다. 이런 움직임이 근대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근대의 우리가 악을 비난하는 것은 신의 책임을 비난하는 데서 벗어난 인간의 책임을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악의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악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이해해야만 하는 것일까? 혹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만약 이해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악을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악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그것은 악마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아니면 악마의 치장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만약 악마의 모습이 아니라면 그럼 왜 그렇게 등장하는 것일까? 

거대한 악의는 계산되지 않음에서 나오는 것일까? 만약 계산되는 것이라면 이런 악의를 향한 계산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악에는 어떤 본질이라도 있는가? 악에는 공유된 본성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왜이고 만약 없다면 그 이유는 또 무엇인가? 

왜 우리는 악에 대해 좌절하는가? 우리가 악행에 대해 좌절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없는 악의 형이상학적 본질 때문인가? 아니면 무엇이 악이고 악행이라는 것에 대한 정치적 조작 때문인가? 예를 들어 악의 축에 대한 정치적 조작을 생각해 보자. 



전체주의, 기원

1951년에 출간되어 아렌트를 뮤여하게 만든 작품이다. 반유대주의, 제국주의, 전체주의 세 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는 삼부작으로서 전체를 아우르는 서문과 각부의 서문이 따로 쓰여져 있는 독특한 구조를 취하는데, 원래 아렌트는 이 작품을 각각의 독립된 작품으로 쓰려고 했다. 제 1판에 대한 서문은 1950년 여름, 제 3부 전체주의에 대한 서문은 1966년, 제 1부와 제 2부에 대한 서문은 1967년에 썼다.

전체주의의 기원은 아렌트를 뮤영하게 만든 작품이지만 우리말 제목에서 영어제목으로 인해 많은 오해를 일으킬 여지가 있다. 영어제목은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인데, 이 말은 전체주의의 기원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가지라는 것이다. 독일어판에서는 element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전체주의의 기원이라기보다는 전체주의를 이루는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쓴 책이다. 기원이 원인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 어느 곳에서도 전체주의의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 책의 진정으로 전체주의 기원을 다루고 있는 책이 아니다. 대신 이 책은 어떻게 그 요소들이 전체주의 속으로 들어가 견고해졌는지에 대한 하나의 역사적 견해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이 개념은 crystalliz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주의, 요소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근대성을 병폐의 결과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전체주의가 역사적 필연성, 불가피성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오히려 역사의 급진적 우연성에 주목한다. 아렌트는 필연주의를 거부한 대표적 이론가로 인간이 노력을 통해 파괴적인 역사를 피해갈 수 있다고 보았다.

아렌트가 말하는 전체주의의 요소들은 그 자체로는 전체주의가 아니며, 어느 사회이든 그런 요소들을 사회 내에 내재해 있다면 전체주의를 만드는데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요소들이 잘 활용된 것이 나찌즘과 스탈린주의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체주의의 요소들이 존재하는 한 전체주의의 가능성은 항상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반유대주의나 인종주의 또는 제국주의가 분출될 때마다 마치 전체주의와 동일시 될 수 있었듯이 전체주의를 그 요소 및 기원과 단순하게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오류는 역사적 진리의 탐구를 오도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판단에도 유해하다’

전체주의적 정치는 (단순히 반유대주의나 인종주의 또는 제국주의나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데)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요소들을 이용하고 남용하여 결국 실제적 현실의 토대, 즉 이데올로기가 원래 그 힘과 선전 가치를 이끌어내는 실제적 현실의 토대를 모두 사리지게 만든다.


전체주의, 문제

아렌트가 전체주의를 문제 삼았던 이유는 전체주의가 만들어재는 이니간에 대한 고통이나 희생자의 숫자가 아니었다. 지구 위에 늘 존재해왔던 고통은 문제가 아니다. 그 희생자의 숫자도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인간 본성 그 자체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인간 본성의 파괴는 다음과 같다. ‘전 세계를 정복하고 총체적 지배를 달성하려는 전체주의적 시도는 난국 타개의 파괴적 방식이었다. 전체주의의 승리는 곧 인간성의 파괴와 일치할 수 있다. 전체주의는 지배하는 곳마다 인간의 본질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우리 세기의 이 파괴적인 세력을 애써 무시한다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렌트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고의 본성이 ‘자발성’이라고 보았는데, 전체주의가 바로 이런 인간의 자발성 자체를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전체주의는 인간 본성 그 자체를 파괴하는 체제이다. 이런 인간의 자발성에 대한 파괴는 언제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에서 시작한다.

제 3부 전체주의의 에피그라프 ‘평범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다비드 루세의 말에 대한 인용문은 이런 아렌트의 사상을 집결시켜 보여주는 것이다. 단순히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유대주의, 단순히 정복이 아니라 제국주의, 단순한 도


반유대주의, 1부

유럽에서 반유대주의는 19세기 이전에는 없었다. 어째서 반유대주의가 생긴 것인가? 반유대주의의 유대인이 동원되었음을 지적하며 유대인에게 책임을 동시에 물어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전체주의


제국주의, 2부

자본주의와 맞물린 19세기 제국주의를 ‘팽창을 위한 팽창’으로 분석된다. 자본주의의 성장과 더불어 나타났는데, 자본주의가 바로 끊임없는 이윤의 추구라는 속성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적 이윤추구는 경쟁과 연결되고 이것이 국가적으로 팽창되면서 인종차별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쇠퇴 속에서 민족국가가 쇠퇴하게 된다. 아렌트에게 민족국가란 시민들에게 법적질서와 권리를 보장한는, 문명화된 인간제도를 말한다. 프랑스 대혁며에서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의 중요성을 말한다. 시민권이 보장되지 않는데 인권이 보장될 리가 없다.


제 9장, 국민국가의 몰락과 인권의 종말
아렌트의 뮤영한 권리를 권리는 무엇일까?
국민국가의 세계에서 보편적 인권에 내재된 근본적인 딜레마는 무엇일까?


10장, 계급없는 사회

계급이 사라진 것이 왜, 근대 사회의 문제가 되었을까? 대중은 누구이고 폭민은 누구인가? 폭민을 만드는 것은 전체주의적 요소들을 만드는 자본주의의 체제가 만들었다.  
전체주의는 리더가 만드는게 아니라 대중이 만든다는 이야기를 아렌트가 하고 있다.


11장, 전체주의 운동

전체주의는 어떻게 선전하고 어떻게 조직화되는가?
전체주의는 왜 과학을 신봉하고, 통제의 수단으로 군대가 아니라 경찰을 무기로 삼는가?
왜 경찰이었는가?


12장, 권력을 장악한 전체주의
전체주의는 어떻게 인간의 자발성을 사라지게 만드는가?


13장, 이데올로기와 테러

왜 사람들은 이 세계의 역사 발전 과정에 주목하는가?
왜 우리가 그 발전의 중심에 있고자 하는가?
왜 외로움이 문제인가?


아렌트, 인사이트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악의 급진성’을 이야기하지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는 ‘악의 평범성’을 다룬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변화의 원인은 스승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야스퍼스는 ‘악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아렌트에 대해서 그렇다면 너는 악에 대해서 신비함과 중대함을 심어주면서 오히려 악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를 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아렌트는 야스퍼스의 이야기를 듣고 급격하게 악에 대한 고민을 더 깊게 시작한다. 악을 탐구한 것은 역사상으로 ‘칸트’가 잠시 다룬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악을 정치적 영역에서 다룬 사람이 아렌트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악에 대한 연구’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수잔 노만이다. 악의 역사적 전개와 발전에 대해서 논의하는 책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악에 대한 고민들이 정리되어 있다.

‘혁명론’에서 아렌트는 폭력과 단절된 혁명이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여기서 아렌트가 폭력을 싫어하고 증오하면서 연구를 하는데, 그 이유는 폭력이 혁명으로 연결되면 그 다음부터 정치, 민주주의, 공화주의는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외로움’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16세기가 지나면서 가끔씩 이것을 다루게 된다. 17세기 지나고나서야 조금씩 외로움을 나누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것은 자본주의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이후 외로움으로 인해서 대중으로 전락하게 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nationality와 citizenship은 다르다. nationality는 국민국가이다. 그러나 citizen은 civil과 politics와 social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시티즌 자체가 이미 평등권을 기반을 하고 있고, 한 배에 탔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리바이어던의 핵심이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나아렌트는 시티즌십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두고 전체주의와 국민국가를 이야기한다.


아렌트, 프로젝트

아렌트의 프로젝트는 결국 how to establish a common world in the dark time of modernity에 있다. 여기서 정치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치존재론적으로 인간존재를 plural beings in between relation 속에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인식론적으로 진리는 근본을 둔 플라톤적인 앎이 아닌 의견에 기반을 둔 앎이다.

정치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활동 가운데 명백하게 더 나은 삶의 형태인 the good life가 있으며 아렌트에겐 정치가 그 good life를 달성하기 위해 그 자체로 목적이자 수단이다. 타자가 필요하고 타자와 함께하는 삶others as fellow이 중요하다.


아렌트, 근대세계 문제들

공유한 세계의 상실이 가장 큰 문제이다. 아렌트가 마주한 근대세계의 문제들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이 다른 인간과 함께 짓고 공유하는 세계the common world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men으로 살 수 있는 세계의 상실이라는 것이다.

공유한 세계의 상실은 그 공유한 세계를 지을 수 있는 공통의 세계를 함께 짓는 공적 영역public realm의 상실로 인해 생겨났다. 이 공간을 상실했기에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사적으로 남을 뿐 아니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세계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아렌트는 개인들이 이런 공적 세계에 속할 수 있는 조건을 박탈당한 상황을 worldlessness라고 부른다. 이런 worldlessness의 상황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 상황이 바로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아렌트의 그 유명한 권리를 가질 권리right to have rights는 바로 이런 공적 세계에 속할 수 있는 조건을 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한 권리를 말한다.

이런 공적 영역을 상실하고 함께 짓는 공통된 세계 없는 이들의 사회가 바로 대중 사회이다. 대중사회의 구성원들은 정치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없으며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고 하지 않기에 정치적 무관심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대중사회는 공유된 세계의 상실이 일상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공유한 세계에 관심이 없는 계급없는 사회로서 대중사회의 구성원들의 유일한 관심은 공통된 기반 없이 나의 몫이 얼마인가 뿐이며, 이런 관심은 사적 이익의 공적 이익에 대한 압도, 더 나아가 사적 이익의 공적 영역에 대한 우월성으로 귀착한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런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대중이야 말로 전체주의의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씨앗이라고 본다.


공적영역, 상실

공유된 세계를 잃은 결정적 이유는 근대 세계가 자본주의와 함께 발전하며 활동적 삶의 서열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활동적 삶의 세 요소는 노동과 작업, 행위로 구성된다. 노동은 labor로서 animal laborans, necessity에 기반하고 있다. 작업은 work로서 homo faber, worldliness이다. 행위는 action으로서 zoon politikon, speech라고 한다.

근대 세계의 문제는 고대 도시국가나 로마에서는 공통의 세계를 짓는 homo faber와 zoon politikon이 필요를 충족하길 원하는 animal laborans보다 늘 우위에 있었으나 근대에는 자본주의, 대중사회의 발전과 맞물리며 animal laborans가 homo faber와 zoon politikon을 압도하며 공적 영역을 만드는 활동들이 힘을 잃어 버린다.

전체주의의 문제는 이런 공적 영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같이 지을 공통의 세계가 없다는 데에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민네이션, 생각

‘악’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내가 악을 품지 않는다고 해도 누군가 악한 의도를 가지고 다가오고, 나를 속일 때 나는 어떻게 그 악에 대해서 대응하고 반응할 것인가? 이런 고민이 점점 깊어진다.

‘과거와 미래’사이에 틈입해오는 것은 인간이라는 플래폼이다. 인간의 사유가 바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준다. 인간은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기대한다. 그 사이에 새로운 탄생성이 나온다.

지속적인 사유의 연습을 해야 한다. 시간, 장소, 개념, 사람, 플래폼, 정치, 공화주의와 같은 단어들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포와 외연을 왔다갔다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새로운 시작을 만들기 위해서 새로운 탄생을 마주하기 위해서 나를 막고 있는 벽을 넘어야 한다.

아렌트에게서 역사는 우연한 역사, 우발성때문인것이지 그것이 어떤 의도적인 발전에서, 개발에서 오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지심리학적으로 볼 때 텍스트모델이 아니라 상황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우연성 속에서 만져지는 상황의 조각들을 모아서 하나의 크리스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렌트의 ‘조건, 기원’에 대한 설명이다. 인과성자체가 없기 때문에 가능성, 잠재성만 이야기하지 a라면 b가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악의 기원이 아니라 악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렌트가 증명하지 못함이 아니라 오히려 증명할 수 없음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히만의 사례는 악이 만들어지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시대적으로 그러한 과정이 많이 보여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도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아렌트가 말한 것과 연결되어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 인간이 있고 인간은 매번의 결정에서 여러가지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를 예상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우연성이 우연하게 나오는 경로가 비슷한 것은 알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구조주의를 반대하고 그 구조를 만들어내는 우연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더 깊게 들어가면 인간의 의지, 자유의지 때문에 악도, 인간의 조건도, 아이히만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필연주의의 비판은 사실 역사를 좀 더 진실하게 보는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전체주의는 그 집단에, 사회에 ‘누군가 혐오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때 더 발전한다고 아렌트가 말한다. 누군가에게 무제한적으로 , 무비판적으로 공격을 받고 혐오를 받게 될 때 전체주의는 더욱 강력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전체주의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전체주의로 구성되어서 묶여진 그룹들에 대한 공격보다는(이럴 때는 폭력적이 된다 동시에) 혐오된 사람들이 혐오에서 벗어나게 될 때 그 사회는 전체주의가 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나아렌트에게 권력은 우리들 가운데 있는 개념이다. 누군가가 소유할 수 없고 집단이 있어야만, 행위할 때만 생겨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론을 넘어서 행위론으로 빠르게 넘어가는 것을 볼 수 있고 악의 기원을 존재론으로 보지 않고 행위론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악인은 처음부터 없으며 악한 의도를 실천하는 그 과정에서 악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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