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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25. 2019

새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향린교회 주일 설교_요한복음 "새개명"

20190519_향린교회예배
주일 설교_김희헌 목사님
"새계명"_요한복음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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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의 공동된 특징은 경천애인이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가부터 교회는 이렇게 되지 못한다. 하나님을 이용하고, 이웃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있다.

오늘 말씀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기독교가 시대착오적인 감정과 정신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왜 시대적인 흐름을 못 따라가는가?

아마도 가장 큰 문제는 성서문자주의에 있을 것이다. 상황을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문자'로 다시 돌아가는 방식은 정확하게 상황화를 위한 성경을 이용하는 결과밖에 없다.

이렇게 문자주의로 빠지는 이유는 정신의 나태에 있다. 의식이 율법에 가두어지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식을 율법으로 제한하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다.


기독교, 어두운 역사

차별과 혐오를 경건의 조건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신앙의 성숙은 율법과 문자 넘어의 가르침을 깨달아가는 것에 있다.

믿음이라는 것은 율법 너머의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시대마다 시대의 과제가 있고, 이러한 과제를 넘어서면서 종교는 발전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는 비로로 진리에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다.

기독교의 어두운 역사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고, 해결 자체를 고민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정신, 삶, 접근법은 무엇인가? 정확하게 오늘날의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혐오의 대상과 배제의 선을 긋는 것처럼 시작되는 것은 아닌가?

서구 기독교의 역사를 보라 십자군 전쟁과 식민지전쟁, 제국주의 확산에 앞장을 서면서 원수들을 발명해 내고 시대를 어둡게 만드는데 앞장 섰다.

이것은 사실 무지와 탐욕이 제도와 국가로 가려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알아가면서 어떤 걸음을 걸을 것인지, 빛을 밝힐 것인지 어둠으로 더 들어갈 것인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혐오, 대상

우리가 혐오하는 대상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럼 잠시 멈춰서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혐오 이후에는 배제로, 배제 이후에는 조건적인 용서로, 용서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죄인과 존재하지말아야할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지않는가?

우리가 쉽게 배제하는, 혐오하는 대상들은 그들 자체로는 주체이고, 그들 자체로는 다를 것이 없다.

죄의 율법의 일부를 어긴 특수한 죄인들로 구성하고, 자신들이 그러한 판단을 하는데 있어서 적용하지않은 율법은 다른 것들로 덮는다.

우리는 그러면 왜 맘몬은 혐오하지않고 사랑하는가? 그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 많은 성경의 비판이 있었는데 왜 그것은 가려져 있는가?


베드로, 제사

사도행전 10장부터 보여지는 베드로의 이방인들에 대한 체험을 집중해보자. 자신에게 주어지는 벌레들을 먹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은 어떤 것이었을까?

베드로는 이 일 이후에 이방인들과 함께식사를 하고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역사를 받아 들였다. 자신들 만이 해방된 존재라는 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깨달음에 도착한 것이다.

자신의 율법을 고집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받아들인 것이다. 사도행전의 공동체는 새로운 길이 열리고 공동체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 새계명

예수님은 새계명을 이야기하신다.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제자인줄 알리라 라고 한다.

예수님의삶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영광은 이 세상이 추구하는 영광과는 다르다. 영광에 대한 설명은 다른 사람의 발을 씻는 예수님에게서 보여진다.

섬김에서 영광이 나온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에 있지 않다. 사람들을 섬기면서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사랑에 그 영광이 있다.

사랑하는 방식 자체를 새롭게 발명해야 한다. 시대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계명을 진실로 새계명으로 드러내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만들어가야 한다.


새하늘, 새 예루살렘

헬레니즘 문화에서는 이분법적인 하늘의 거룩함과 죄악의 땅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하지 않는다.

새로운 예루살렘에서는 만물이 새로워지면서, 새로운 질서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서 이루어가는 것을 말한다.

새하늘과 새땅이 바로 여기로, 이시간에내려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제는 구분되는 양가감정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말한다.

복음과 율범이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시대에 부름에 응답하여 새 사람의 삶을 사랑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민네이션, 생각

우리는 배제와 포용의 세계에 살고 있다. 무엇을 배제하고 무엇을 포용할 것인지는 무엇을 기준으로 두는가?에 있다. 성경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 성경이 나에게 어떤 해석을 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해석의 근거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율법이지 않고, 사랑이면 어떻게 가야할까? 욕망을 옹호해야 하는가? 그럼 옹호라 아니라 보호와 대변이라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정초주의와 합리주의 사이에서 새계명을 받는다. '서로 사랑하라'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이 두가지를 넘어선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판단이나 혐오나 배제 이전에 서로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너가 이것을 하거나 하지않으면 내가 사랑한다'라는 조건은 여전히 율범이다. 항상 새로운 계명이 되기 위해서는 계명을 새로운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으로 사랑의 방식을 새롭게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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