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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un 01. 2019

이미와 아직에서 시간을 앞서지 말아야한다

제임스스미스 특강_IVP

20190530_Ivp 특강
제임스 스미스의와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
두 도시 이야기_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어떻게 참여해야 할까?  
제임스스미스_캘빈칼리지 철학과 교수



들어가기_기독교적 정치 참여의 지형도 그리기

오늘은 5세기 성 아우구스티투스가 그렸던 두 도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지상 도성과 천상도성, 인간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의 정치적 소명political vocations을 통해 생각하게 하는 도구세트’tool-kit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항구적이면서도 시대적인 틀 같은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떻게 정치에 대해서, 정치 참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지 알아보자.

소동과 격변의 시기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의 장군이자 총독으로서 공직에 몸담았던 보니파키우스Bonifce와 지속해서 주고받은 편지를 생각해보자. 이 친밀한 서신 왕래를 통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보니파키우스의 영혼에 관심을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언제나 자기가 출발점으로 삼았던 곳, 즉 사랑에서 시작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도와 선행으로 이 사랑 안에서 진보를 이루고 우리 마음에 널리 뿌려진 사랑의 충만함을 이루기를 권고한다. 죽어 사라질 존재의 왕국이 아니라 하늘 왕국에 들어갈 것을 갈망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보니파키우스에게 책망도 했는데 정치적 환경이 어렵고 부패하더라도 소명에 있어서 거룩한 한가로움은 잠시 미뤄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로마제국이 당신에게 선한 것들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제국은 천상이 아니라 지상의 것이기에 이 땅에 속해 있고 곧 사라져 없을 것을 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제국은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것만 줄 수 있다. 만약 제국이 당신에게 선한 것들을 수여했다면,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라고 말한다. 이어서 보니파키우스가 자신의 노력함에 따라 천상의 왕국이 올 것처럼 보니파키우스가 흥분하면서 자기 의지를 내세우려고 하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에게 주의를 준다. “성인과 의인과만 함께할 시간을 우리가 앞서 살기 원해서는 안된다”

오늘 강의에서는 기독교적 정치참여의 일부분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가 두 도성과 맺는 관계 속에서 어디에 있을지 자리잡아주는 시간이 될 것ㅇ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거기 있을지를 정립한느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기독교의 정치적 지혜는 장소 그리고 시간에 관해 성경적 지향성이고,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는 우리가 ‘시간을 앞서 살려고’할 때 잘못되게 된다. 시간을 앞서 살지 않기가 비변증적unaplogetic 기독교 현실주의의 표어이고, 오늘 나눌 내용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정치나침판political compass

시간과 공간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소명을 생각해보자. 현명한, 신중한, 신실한 공공신학이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계속되고 지속적인 헌신으로 활기를 띠면서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특별한 도전과 기회들로 조율되기도 한다. 전략과 공식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특정한 틀과 자세에 대해서 말해보자.


1.세속secular는 영역realm이 아니라 시대era이다.

현시대saeculum은 십자가와 다가오는 왕국 사이의 시간, 시절, 시대이다. 시간은 평평하지 않다. 우리를 현시대 위에 위치한다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 부활, 승천 이후에 살고 있으면서도 왕국의 도래 이전에 살고 있음을 기억하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원주의pluralism을 기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심각한 불일치에도 충격을 받거나 분개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또라는 중요한 구분을 한다.


2.그 시대에 우리는 두 도시, 지상도성과 천상도성의 뒤섞임permixtum 속에 살아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도성’을 자기가 ‘이 세상의 도성’, ‘지상 도성’, 인간의 도성이라고 여러 단어를 써서 불렀던 바와 구분한다. 이러한 두 다른 도성, 사회,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기준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지상 도성은 육의 기준으로 산다면, 하나님의 도성은 영으로 살아간다.(신국론), 둘을 궁극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다. “우리는 두 도성이 두 종류의 사랑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상 도성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데까지 이르는 자기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천상 도성은 자아를 경멸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하나님 사랑에 의해 창조되었다. (신국론)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지상 도성은 창조가 아니라 타락과 함께 시작되었다. 지상 도성은 창조와 동시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죄로부터 생겼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의 도성을 지성도성과 대조하는 이유이다.  두 도성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사랑에 의해 정의도고 움직인다. 따라서 지성 도성을 단지 ‘현세의’ 도시 혹은 물리적 세계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지상도성은 창조의 영토와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지상 도성이란 창조된 삶creaturely life의 침투적systemic그리고 무질서한disordered 배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물질적,문화적, 피조적 삶을 악한 이에게 완전히 양도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도성은 단지 내세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이 이 세계에 욕망하시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삶을 미리 맛보고 이를 체현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의 ‘사회’, 즉 도시civitas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도인이 이 세상의 문화적 삶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동기를 부여하라고 지상도성을 들먹이지 않는다. 그 역할은 그의 창조 신학이 이미 하고 있다. 그 대신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상 도성 분석은 문화적 시스템들이 종종 근본적으로 무질서하다dis-ordered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자각하도록 압박한다. 이로써 기독교적 노력에서 나온 저항과 새로운 질서 지움이 모든 문화적 움직임에 필요하다고 경고를 던진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편지에서 보았듯, 그는 스스로 이러한 일을 했다. 거기서 여러분은 정치와 시민적 삶civic life의 구체적 현실에 자신을 깊이 연루시킨 주교bishop를 볼 수 있다.


두 도시, 천상과 지상

아우구스티누스가 현실을 천상적인 2층과 지상적인 1층으로 나누려고 지상도성이란 단어를 사용하는게 아니다. 오히려 지상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은 하늘과 땅에 관해 서로 경쟁하는 전망vision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상도성’은 에덴동산이 아니라 바벨론에 더 가깝다.

그러나 이러한 두 도성의 근원적 대조는 거룩한 작전회의huddles를 하도록 현실의 뒤로 물러나는 것을 용납하거나 단순히 지상 도시를 강하게 비판하거나 악마시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예레미야가 조언하듯, 아우구스티누스의 전문 용어에 따르면 자신들이 지상 도성에 유배되어 있음을 아는 하나님 도성의 시민들은 ‘그 도성의 안녕을 구하도록’부름 받았다.

우리는 창조세계를 돌보라는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성에 지상 도성을 잇대려 함으로써 지상 도성의 안녕을 구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창조된 삶을 샬롬으로 새롭게 질서 지을 것이다.

이 두 도성의 이야기를 구별하는 것은 두 도성의 각각 다른 사랑, 혹은 그들이 사랑하는 다른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도시’는 두 관할구역이나 관점이 아니다. 그러한 구분의 기원은 창조가 아니라 타락이다. 그리고 지상 도성은 정치를 ‘소유하지’own않는다. 정치 같은 것이 지상도성에 구현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천상 도성은 또한 정치적political이기도 하다.


지금 여기, 그리스도인의 정치생활


1.좌우진영의 유토피아주의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적인 사람들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 ‘시간을 앞서 살지 않음’은 계속발전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시간이 정해진 종말론적인 시간을 전제한다. 만약 우리가 현시대saeculum, 즉 그리스도의 통치가 충만히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치열한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왕국이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덫에 갇혀서는 안된다.

우리는 준궁극적penultimate으로 절대화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잊어버리게 될지 모릅니다. 종말론적 기대는 천상의 시민권에 있어 핵심적이다.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는 한, 그 왕국이 아직은 여기에 없다. 이것은 왕국의 도래와 특정한 통치 형태나 정부 혹은 정당을 동일시하려는 어떠한 유혹도 약화한다.  

영국의 신학자 올리버 오도노반Oliver O’Donovan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 사건Christ-event의 결과는 복음에 의한 정치의 탈신성화desacralization이다’”우리가 지상에서 행하는 정치적 노력이 비록 정의를 위한 가장 진실한 노력일지라도, 그 노력은 왕국이 오도록 만들 수는 없다. 정치가 모든 것everthing일 수는 없다. 우리는 승천하신 분을 왕으로 예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간시대에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정치적 정체성을 궁극적 정체성으로 여기려는 유혹에 사로잡혀선 안된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확신이 궁극적인 것이 될 때, 시간적인 것을 절대화하려는 경향이 가장 강해진다. 이런 이유로 세속화된 사회에서 정치가 모든 것인 양 다뤄지기 쉽고, 정치적 차이가 마치 궁극적 차이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단지 나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악이다.’ 이런식의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상상이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무관심하지 않으면서도 정의는 궁극적으로 왕과 함께 도래하리라는 것을 안다. 여기에 맞춰 우리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거는 기대와 그들과 맺는 관계가 형성된다.

물론 이러한 자세는 장차 올 샬롬과 연속선상에서 ‘세계를 바로잡아 가는 일’repairing the world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움직인다. 우리의 기대를 단련하는것tempering, 이로써 기독교 현실주의와 이제껏 상실했던 ‘신실한 타협’faithful compromise의 기술이 생겨난다.




2.신실한 타협’은 섭리에 있어서 불확정적인 역사적 결과를 분별하는 일의 중요성을 재평가한다.

입헌 민주제, 개인의 자유와 존엄, 시장경제와 같은 불확적정이면서 계속 변화하는 역사적 사건들을 분별할 때 우리는 ‘신실한 타협’을 통해서 기독교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올리버노도반은 이것을 세상의 정치적 기관과 실천에 ‘복음의 폭발이 남긴 분화구자국crater marks of the Gospel에서 행해지는 의례rites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기독교 예배는 시장과 선거, 기업과 의회의 복도로 들어가는 것을 사명missio으로 삼는 파송된sent 사람들의 훈련장이다. 창조와 새창조를 반복하는 기독교 예배에서 재현되는 내러티브는 창세기 1장과 마태복음 28장의 ‘가라’라는 명령에서 정점에 이른다.

따라서 교회는 우리가 그곳으로 물러나야 할 대조 사회라기보다는, 거기로부터 우리가 파송을 받도록 새로이 중심을 잡는re-centering 실천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복음으로 우리의 사회적 상상이 형성되는 상상력의 장소이다. 즉 교회는 대안적 공간으로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분별discernment의 준비가 되도록 성령께서 교육하시는 공동체이다.

하지만 우리의 분별이란 방어적인 것과는 근원적으로 거리가 있다. 분멸은 우리를 ‘안전’과 ‘순결함’이라는 더 작고 작은 구성으로 밀어 넣으면서, 위협과 위험에 대해 바싹 경계하도록 몰아세우지 않는다. 반대로 기독교 예배 속에서 우리의 사회적 상상은 능동적인 분별active discernmnet을 갖추게 된다. 이는 현시대seaculum라는 더 광범위한 경쟁적 공간들 속에서 참여와 협동, 비판의 기회를 보게 해주는 적극적인 지혜와 신중함이다.




민네이션, 생각

두왕국 도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는 천국과 바벨로 대립되는 것이 맞는가?

시간을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연대기적’ 시간대를 우리의 본질적인 시간으로 여기면 안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카이로스라는 수직적시간, 성스러운 시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오히려 이렇게 카이로스가 현실에 임함으로써 이 땅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로 변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사람만이 성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자체가 성화되는 것은 아닐까?

제임스스미스가 이야기하는 ‘시간을 앞선다는’ 것은 ‘왕을 기다리며’ 서 있는 지금 시간을 무시하거나 그냥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의미이다. 왕을 기다리는 지금 시간도 왕의통치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잠재성과 같은 의미라고 본다, 왕이 오는 방식과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같다는 것이다.

‘신실한 타협’이라는 것은 기독교적 현실주의에 입각해서 ‘원리’의 차원에서 말씀을 가지고 ‘실용적인 대안과 실천’의 관점에서 신실한 타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회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신실한 타협의 핵심은 그 타협을 하는 사람에 있지 않을까?

동일하게 보여지는 미국신학?의 특징은 의식과 행동에 있어서 행동이 의식을 형성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믿고 안믿고를 떠나 행동이 악하면 그 의식이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행동을 셋팅하는 것에 있어서는 의식의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고 그것을 타켓팅하여서 어떻게 바꿀까보다 훨신 쉬운 이야기가 된다. 프로세스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 행동인 performance를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고민해보아야할 문제이기는 하다. 과연 이게 맞을까? 이것은 어떻게 보면 보수적인 기획일 수도 있다.

Ritual에 대한 접근을 하고 있다. 의전은 우리의 사고와 삶의 방식을 정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의 예전이 어떻게 타락하거나 붕괴되는지가 신실한 타협에 있어서 반대의 경우가 될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바깥으로 나가서 교회의 어떤 신실함들을 놓고 타협을 하는 방식으로 조금씩 발전시킨다는 것을 뒤집어서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좋은점, 나쁜점도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신실한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좋은 것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반대로 나쁜 의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제임스스미스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시간적 개념을 넘어서는 좌파와 우파를 비판한다. 좌파는 ‘이미’에 너무 집중해서 ‘아직’을 지워버렸기 때문에 유토피아주의가 되어 버렸고 그 원인은 시간을 앞서버렸기 때문이다. 왕이 아직 안왔는데 온것처럼 산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우파는 이미를 잊어버리고 아직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아직을 앞당기는 것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우를 범한다는 것이다. 시간개념으로 이미와 아직이라는 것은 ing이다. 오고 있으나 아직, 그러나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ing라는 입장에서 우리의 행위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어떤 의미르들을, 왕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것이 될 것이다.


민네이션, 생각

개혁이 아니라 갱신일수도 있고, 혁명이 아니라 혁신일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이미 그 나라가 여기서 확장되고 있는데 그 완성이 어디에 있는가?보다는 확장되는 방식how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겠다.

교회라는 전제를 하고 그것이 확장되는 방식이 될지 아니면 교회는 무형의 교회로 우리 자신이면서 우리의 삶 자체가 확장된 행동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천하는 것인지 등등을 고민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보아야 한다.

신칼빈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사이에서 이원론이 아니라 초월적 일원론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 본다. 우리가 이해를 위해서 두개로 나누어서 위와 아래로, 좌와 우로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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