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렉쳐 연재시리즈_소설
인간은 언제 연민을 느끼는 걸까? 연민은 나쁜건가? 우리는 언제나 연민이란 터널을 지나서 공감에 도달해야만 하는가? 연민을 넘어서 공감은 우리가 하는 건가? 우리가 한다'는 의지를 발휘해야만 하는 영역인가? 연민이란 감정이 생기기까지 과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일단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알아야 하니까. 그런데 그런 앎이 삶으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연민은 오히려 장벽이 될 수도 있다. 연민이란 감정은 항상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다르게 두고, 선을 그어야만 생기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요즘들어 그런 생각이 든다. 연민이 아니고 공감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오히려 연민이 아니라 공감이라면 공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라고 할 때 결국은 연대함이 먼저이다. 관조적인 대상으로 보고 연민을 느끼거나 자신이 하지도 못하고, 경험도 다른데 공감하려는 허상이 아니라 일단은 '연대'함으로 함께 하고 그 다음부터, 그 다음시점부터 경험하게 되는 것은 공감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 연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로기완에 대한 연민으로 그의 발자취를 일기를 따라서 그려내는 브뤼셀의 거리 풍경이 그려지기는 한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그러한 상상은 상상일 뿐 일상은, 삶 자체는 매우 무색에 무미에 무취한 것과 같다. 거기에 어떤 감정과 어떤 이미지, 어떤 기억과 어떤 사람들을 떠올리고 혹은 함께 하는가에 따라서 삶의 캔버스는 다른 색깔과 다른 구도, 다른 재질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겠지. 그러므로 로기완을 따라가는 여정은 로기완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작가의 정신에 대한 이해가 맞겠다.
이야기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왜 인간은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이야기들은 무엇인가? 이야기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의 모든 삶은 이야기로 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두뇌자체가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뉴런조직의 하나일 수 있겠지.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들을 이야기로 만들 수 있고, 또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항상 어떤 이야기의 맥락에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각자는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듣고 있고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를 꺼낼 때는 '타자로서의 자기자신'이 되어야만 한다. 내면에서 무의식을 꺼내 놓는 작업 이기도 하면서 의식은 계속해서 무의식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물론 무의식의 영역이 아직 규정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드는 진동과 주파수는 이야기를 하는 화자의 내면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로기완의 일기는 로기완의 내면세계를 알려주고 그것을 읽고 움직이는 이야기를 하는 작가의 내면세계를 알려주는 것이겠다. 거울이론처럼 이러한 이야기에 비추어 인간은, 나는 다시 나의 이야기를 생각해내고 나도 그랬을까? 이러고 있지 않을까?
어쩔 수 없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작가가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는 타자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동일자의 논리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는 미명하에 그 사람을 정지한 사물로 생각하고 내가 주는 것을 달갑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도와주는 것은 도와주었기 때문에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인생은 현상학이고 기억은 해석학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기억을 통해서 이미지와 감정을 가지고 여러가지 해석들을 더해간다. 인생 자체, 그러니까 현실 자체에서는 아무런 해석을 할 수 없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으로 바로 현상학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내면에서는 매우 많은 감정과 기억들이 한꺼번에 현실 속으로 쏟아져 나오지만 말이다. 이것을 잘 정제하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하고 이것을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사람은 어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로기완에게서 보여지는 관점은 항상 옆모습과 같은 것. 그의 여정에서 우리는 뒷모습 혹은 옆모습을 계속 보고 있는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때 항상 이런 관점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험들에 대한 상처를 가지고 나름의 해석을 가진다. 그리고 그 해석은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사람들에 대한 일정한 투시를 하게된다. 나의 감정괴 기억들, 이미지들을 앞에 보이는 사람에게 투사하고 그 사람이 진짜로 그럴것이라고 믿게 된다. 투사의 효과 때문에 이것이 연민이라고 믿거나 공감이라고 믿게 되는 것은 아닐까? 투사하지 않고 정직하게 바라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런데 있는 그대로 당신은 인정합니다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되는 것이다. 사실은 모든 것이 투사의 영역이 아닐까? 그 투사의 영역에서 하나하나 자유를 선포하는 과정이 어쩌면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투사 후에 오는 것은 동일시이거나 혹은 저항이다. 투사했는데 그것이 나의 이미지와 겹친다면 그것은 나와 동일시가 되고, 만약에 겹치지 않는다면 저항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투사를 잘 고민해야보아야 하지 않을까?
로기완에게 작가가 투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겪었던 슬픔과 아픔을 투사하고 또한 자신의 삶을 투사하고 있는 것이겠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보는 독자들은 다시 작가에게서 우리의 삶을 투사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리고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자신의 삶을 내 삶이 담긴 글에 투사하고 있겠지. 동일시한다면 공감하는 의미에서 좋아요를 누를려나?
인간의 존엄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가? 아니면 개인으로부터 나오는가?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아니 사회가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존엄이나 가족의 존엄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 존엄의 출처는 어디일까? 개인에게서 나온다고 한다면 더욱 큰 문제는 그 존엄의 내면적 출처는 무엇인가? 기억인가, 자신이 공부한 학문인가? 자신의 지위 혹은 자신이 읽은 책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주는 소속감인가? 존엄이 인간 자체로 주어진다고 할 때 그걸 무시하는 사람들의 존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이 계속될거라고 생각하면 우울증에 걸린다. 그러나 내가 그 상황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 연민에 빠진다. 우울증의 절반쯤이 지나면 내가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함께 내일도 오늘과 같은 일상의 지옥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누구나 우울함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세상 자체가 아니 우리의 일상 자체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울을 그냥 무시하거나 지나처 버리지 않아야 한다. 우울은 우리의 취약한 부분이면서 여기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도, 인간에 대한 애정도 나올 수 있는 텃밭이 되기 때문이다.
로기완에게서 느껴지는 우울함에서 우리는 어떤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어떤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 원래 그래!'라고 하는 안정감 같은 것. 그리고 나도 그런 환경에 있었다면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우울함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예술은 어떻게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예술이 하고 있는 사회변혁의 방법은 무엇일까? 예술은 예술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프랑크프루트학파가 말한 예술의 승화는 진정한 사회변화의 원동력이 되는 걸까?
로기완의 삶을 예술로 바라보는 과정에서 '기호와 상징' 사이에서 풀려나서 돌아다니는 로기완을 만난다. 누군가 정의내릴 수 없고, 어떤 사람의 슬픔은 우리가 공감할 수 없고 인정할 수 밖에 없음을. 다시 말하면 다른 이들의 상황을 상징화할 수 없고 기호로 그냥 놓아 두어야 하는 것이겠지. 그런의미에서 예술은 투사를 멈추게 하기도 하고 우울을 잠시 정지시키기도 하고, 공감보다는 연대로 나아갈 가능성을 만들어놓는 작업들이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