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람 미술관_20190731
베르나르 뷔페 (Bernard Buffet, 1928년 7월 10일 ~ 1999년 10월 4일) 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파리에서 출생하여, 초등 학교를 중퇴하고 나치스가 점령하고 있는 파리 시 야간 학교에 나가며 데생을 익혔다.
18세부터 본격적인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20세 때 크리틱상을 받았다. 1948년부터 파리 화단에서 널리 알려졌으며, 1949년부터 10년간 세계 여러 곳에서 50회 이상의 개인전과 전람회를 열었다. 대표 작품으로 〈소녀 키키〉, 〈어느 화가의 초상〉, 〈나비〉, <물방울무늬 넥타이를 맨 광대>, <에코르셰>등이 있다.
시대는 표현된다. 누군가의 이미지와 감정은 오직 그 사람만의 것이었다. 뷔페는 영감이 오기전에 그렸다. 그리고 그 다음 영감이 그 작품에 어리었다.
생선장수는 우리의 일상 속에 오직 굵은 줄기만 뽑아내었다. 그리고 선끼리 연결한 것이 사람도 되고 생선도 되고 탁자고 되었다.
도시는 회색빛이었다. 도시의 색깔같았다. 뾰족함 참탑과 같은 성당의 꼭대기는 계몽주의의 마지막을 달리는 것 같았다.
무수히 분할된 선들의 향현에서, 그시대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모더니티에 도달한 것 같았다.
직각만이 존재하는 이성의 끝에 도시는 새로운 빛을 발견할 수 없었다.
리얼리즘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는 모든 것을 자연과 연결해서 한 화폭에 담았다.
모더니즘의 시기가 오면서 사진기가 발명되었다. 모더니티는 있어야 할 것들에 대한 정확성을 보증했다. 작가들은 이제 모든 것을 생생하게 그려낼 필요가 없었다.
인간이 중심이 된 화폭 아래로 모더니티의 고체상태는 조금씩 흔들림을 경험하고 있었다. 액체상태로 흘러내리기 전, 베르나르뷔페가 있다.
램브란트의 작품들을 다시 해석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해부학적이다. 이 해부가 끝나면, 고정된 의식과 시선은 표류하기 전까지 무한한 상상력과 감정의 바다를 흘러다닐 것이 분명했다.
허나 그 때는 몰랐겠지. 우리의 몸을 열어재친 시대를 다시 열여제치고 의식의 뼈들을 발라내기 전까지는.
우리는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틀렸다. 당신은 살아 있었다. 당신은 20세도 안되었지만 이미 인간의 고통과 마주하고 있었다.
베르나르는 20세에 얻은 명성에 만족할수도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명성과 영광을 누리지 않았다. 더욱 특별한 것은 그 명성에 대한 무관심이 그에게 영원한 젊음과 지칠줄 모르는 원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린시절 향수는 우리가 흥히 말하듯 불행하지 않으며 그저 순수할 뿐이다. 냄비에 만들어진 빵 조각에서 나온 것 그리고 몇 개의 채소들로 이루어진 이 정물들 속에는 무란한 감동적인 것들이 떠 다닌다. 뷔페의 시간은 거기 그대로 머문 채 시간은 그대로 흘러간다.
당신은 화가로 태어났다. 당신은 우리에게 당신의 외로움, 믿음, 사랑,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자연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물질적, 도덕적 참담함과 마주해 비탄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주 자연스럽게 이미지를 선택했다.
나는 영감을 믿지 않는다. 다만 그릴 뿐
피카소? 그가 아무리 위대한 화가라도 나에게는 아무 의미없다. 마치스는 그저 장식가일 뿐.
사람들은 내가 거만하다 할지 모르지만, 이 캔버스를 한번 보세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에요.
이젤과 자화상 1948
바닷가재 1945
다리미 1947
재봉틀 1949( 가장 인상 깊은 작품, 보자마자 영혼의 깊은 수령으로 빠져듬)
과일그릇 1949
배 정물화 1949
채소 정물화 1947
테이블과 의자 1950
접시위의 계란 그리고 남자 1947
장례식 1949
빨간냄비 1951
주사위 놀이 정물화 1955
남자와 꽃개 1947
닭을 들고 있는 여인 1947(피카소로 유명한)
해변 1947
생선장수 1951(선처리가 미쳤다)
엉겅퀴 1952
실내에 앉아 있는 남자 1953
여장남자 1953
팔을 괸 여인 1956
식기장 1953
비스콘티 갤러리 1954
유언장과 정물화 1963( 유언장을 그림으로 남김)
생선 정물화 1956
숫양 1960(이건 머지? 그로우테스크의 끝판왕같은)
곤들매기 정물화 1955
생선뼈 1963
회화에서 선, 면, 색, 재질, 감정, 시간, 그림자가 기본이 된다. 그런데 뷔페는 선 안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선처리를 할 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그렸다. 직선만 사용하는 방식으로. 그러니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론도 완전히 다른 것이 맞다.
어린시절의 고통은 인생의 끝까지 영향을 미친다. 뷔페가 가지고 있었던 어린시절의 고민과 전쟁 기간에 겪었던 시대가 남겨준 숙제들은 계속해서 그에게 삶의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물어본다.
여백을 살리면서 공간감각을 주는 것이 뷔페의 특징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자신도 새로운 구상을 하면서 이것을 보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구상을 여백에 할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은 아닐까?
참담함을 기억의 실마리에서 뽑아내는 것에서 작품이 시작되는 초기의 형태를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사랑에서도, 아픔에서도 우리는 삶 자체를 지탱해 주는 여러가지 조건들을 찾아낼 수 있다.
인간의 창조성 그리고 인식과 표현의 위대함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미쳤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 하나에도 고통이 느껴졌다. 그의 고통의 근원은 인간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다아있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사람들은 존재하는 것들과 먼저 관계를 규정해야한다. 그는 이미 그 관계규정이 끝난 상태에서 붓을 들었다. 그리면서 발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발견한 것을 전제로 그리는 사람.
투사하고 있었다. 그의 관점에 나의 마음을 투사하고 있었다.
1950년대 이후 베르나르 뷔페의 그림은 기술적으로도 재료의 측면에서도 발전하게 된다.
195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을 오마주해서 자주 그렸다. 구스타브 쿠르베나 바르비종학파(밀레)의 분위기도 일부 볼 수 있다.
광대... 이것은 두려움이다. 그는 그의 얼굴에 그림을 그린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추악함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 슬푸구나.
인류가 자신을 발견하고 자아로부터 벗어나고자 만든 행위 중에서 서커스는 기묘한 특권을 가졌는데,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서커스는 자유의 피난처이다.(Jean Boutrt)
당신은 내 열정적인 사랑을 일깨웠다. 당신이 아니라면 절대모를.
내가 인정하는 프항스 회화의 마지막 거장은 베르나르 뷔페이다.(엔디 워홀)
나를 둘러싼 증오는 사람들이 나에게 준 훌륭한 선물이다.
그림.. 우리는 그것에 대해 말하거나 분석하지 않는다. 그것을 느낀다.
광대는 모든 종류의 변장과 풍자로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다.
서커스, 자전거 타는 곡예사 1955
서커스, 두 광대 1955
자화상 1964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아나벨 1960
에코르셋(벗겨진 등) 1964
빨간마리 1967
칸느영화제의 아나벨 1960
피아제타 베니스 1962
파리의 풍경, 시테섬과 노트르담 1956
만개한 분홍사과나무 꽃 1965
렘브란트 이후의 해부학 강의 1968( 와 이건 렘브란트 오마주해서 해석한 작품! 정말 대단)
해변과 요트 1967( 이건 구도가 미쳤다. 주체가 넘어져 있는 걸까? 길을 열어준 걸까?)
미친사람들 식사 2 1970(이건 정말 미친사람같음)
미친사람들, 커플 1970
생 캐스트, 계곡 1968
몽 생-미쉘 1971
쉬농소 성 1969
타워브릿지, 런더 1972( 구스타프 카유보트와 비슷한 화풍, 내가 좋아하는 구도와 색상이다)
생 말로 연안의 범선 1972
메스놀즈, 슈브로즈 도로 1978
마르크 기차역 1976
성니콜라스 교회, 상트페태르부르크 1992
브로타뉴 브레아섬의 클로 항구 1990
이탈리아의 추억, 밀라노 대성당 1991
이탈리의 추억, 아말치 대성당 1991
브로타뉴 여인과 갑각류 1994
그레코 이후의 추기경 심문 1987
퐁뇌프와 베르갈랑, 파리1988
에펠탑 1988
오딧세이 율리시즈호 1993
오딧세이 세이렌 1993
해저2만리-너틸러호의 거대한 현창 1993
두 눈이 슬퍼보인다. 광대들의 얼굴에 자유가 아니라 삶의 두려움이 있다.
어땋게보면 베르나르뷔페와 에곤쉴레는 비슷한 면이 있다. 그리고 체코의 아르누부와는 완전 다르다.
보는 게 달라지는 건, 그리는게 달라지는 것이겠지. 1960년대 그리고 68혁명 이전까지 그의 그림에서 나오는 이질적인 그림들은 그 시대가 가진 감상이나 한계, 모순이 아니었을까?
그의 많은 면모를 본다. 자연에 대한 감상과 사람에 대한 감상이 다르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리는 그림에서 나는 혁명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 인생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보여지는 것들이 인식적으로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자신의 영감이 아닌 다른이가 불어넣어준 영감은 얼마나 참을 수 없게 가벼운가?
작품이 모든 것을 설명해줄 필요는 없다. 과학이 발전해서 달나라 여행이 가능해지고, 추상미술이 도래하더라도, 내가 페인팅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삶에 지쳤다.
손을 든 광대 1989
드래그퀸 1998
기타와 광대 1999
음악광대들 1991
음악광대들 여가수 1991
나의 원숭이 고릴라 1997
복장도착 해골 1998
죽음 10 1999
브로타뉴의 폭풍 1999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무엇을 표현할 수 있을까? 부패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인생이란 다시는 그 때로 돌아가지 못하는 시간들이 있다. 뷔페의 그림도 예전에 전쟁 직후레 자신이 봤던 그 현장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지금 그릴 수 있는 것들은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이겠다.
시간이 지나면서 뷔페는 20세때의 영광이 사라지는 것과 같이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2차대전 이후에 인간의 비참에 대래서 깊게 고뇌하던 뷔페는 말 그대로 너무 다양한 회화를 막뿌려재는 듯한 '뷔페' 같았기 때문이다. 상업성이 너무 깊다는 평가도 있고 그래서 그러한 비판을 못 이기고 71세에 자살한 것이 아닌가라는 오명도 듯는다.
글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확실히 20세 즈음의 작품들과 70세즈음의 작품들은 차이가 많이난다. 파킨슨병에 걸려서 한 쪽 팔을 못 쓴 것도 한 이유가 되겠다.
나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말을 기억한다. 세상에는 영감이 오면 그리는 작가와 생각해낸 것을 쓰는 작가가 있다고. 나는 영감이 올 때 그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 영감은 현장에서만 발견된다. 함께 맥락 속으로 들어가야만 발견된다. 어쩌면 삶의 흐름에서 자기 흐름에 매몰되었을 때 진부한 그림과 작품들이 나오는 게 아닐까 한다.
타자와 함께 경험하는 것에서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그 앎으로 쓰고 그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