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흥사단 전국청년위원들과 아카데미아'라는 철학모임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을 한 명씩 섭력하기도 하고 주제별로 보기도 하면서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이 어떤 기반에서 시작되고 어떤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자리였다. 지난달에는 '노동'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에세이, 소설, 이론, 철학들을 살펴보았고 나는 '비물질 노동과 다중'이라는 주제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하트가 다룬 '비물질 노동'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1 비물질 노동의 등장
노동의 역사는 길고 길다. 인류는 태어나면서 부터 몸의 에너지를 외부로 방출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노동을 하면서 산다. 걸어다니는 것도 먹는 것도 어떻게 보면 노동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농경사회에서는 당연시되던 노동이 산업혁명을 거친 후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생각과 정신으로 하는 노동의 출현이었던 것이다.
에너지의 방출과 함께 우리 몸에서는 땀이 난다. 땀이라는 메타포는 언제나 노동과 길항적으로 존재하는 메타포였다. 그러나 비물질 노동에서는 정신을 방출하거나 감정을 방출하는 방식으로 땀과는 다른 것들이 외부로 나간다. 그러다 보니 이것이 진정으로 '노동'인가?라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실재로 우리는 많은 부분 감정노동과 정신노동을 하는 화이트칼라 세대를 지나왔고 우리 중에 대부분이 이러한 노동을 하고 있다. 물론 물질노동도 같이 가고 있다. 산업군으로 보면 1~4차까지 다양한 노동의 형태들이 등장한다.
비물질 노동과 다중의 관계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이 있는 책
#2 비물질 노동과 이데올로기
그런데 이제부터는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노동이 분할되는 것은 인정할 수 있는데, 언제부터 우리는 비물질노동(감정노동보다는 정신노동)이 물질노동보다 우위에 있게 된 걸까? 삶을 영위하는 단계에서는 당연히 땀을 흘러야 하는 노동이 우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근본적이고 실재적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마케팅, 홍보, 기획, 전략을 짜는 사람들이 더 높은 가치의 일을 한다고 여겨지고, 월급도 더 많이 받는다. 고등교육을 통해서 정신의 작용으로 생산해내는 것들이 더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래서 이러한 가치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직업을 갖기 위한 '대학서열'이 매우 중요하고, 그것은 직간접적으로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삶의 질과도 연결이 된다.
다시 그런데, 이게 맞나?라고 생각해보면 맞다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러나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가장 많은 땀을 흘리는 사람이 사실은 가장 하층민이 되고, 가장 적은 땀을 흘리는 사람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 비물질노동이 가장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네그리와 하트의 이론이다. 물론 이들은 급진적 마르크스주의자들로 분류되곤 한다. 그러나 다시 곱씹어 보면 일리가 있다. 비물질 노동이 권력을 잡고 그 권력이 세상을 다시 만들기 시작하면 푸코의 말처럼 지식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시간이 축적은 한 나라와 한 조직과 한 사람의 생각의 구조를 만들기 때문이다. 생각의 구조는 곧 현실과 조우하면서 실제적인 세계의 구조를 만든다.
안토니오네그리와 마이클 하트
#3 사이비과학과 사이비 종교
이데올로기가 다시 문제가 된다. 한나아렌트의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사이비 과학이면서 사이비종교이다. 합리성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는 과학적인 것 같지만 그 합리성은 '물질과 비물질'이 '자본'에 의해서 교환될 수 있다는 전혀 근거없는 논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비과학이다. 또한 모든 것들을 초월하고 통일시킨다는 의미에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종교의 대상 자체가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이비종교가 도니다.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사이비종교와 사이비과학의 합성체인데, 이 중간에 무엇을 넣어 놓던지 종교적 효과와 과학적 효과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
비물질 노동의 우위가 이데올로기라면, 혹은 아니라면 사이비과학인지 사이비 종교인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비물질 노동이 물질노동과 우위에 있다는 것은 합리적인가? 합리적이라는 것을 설득할 수 없다. 물론 그 만큼의 노력을 들였기 때문에 비물질 노동은 물질 노동만큼 시간의 속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다른 것으로 치환되는 것일까? 시간의 속성은 흐름이고 장소의 흐름은 멈춤인데, 장소 위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축적인 비물질 노동을 어떻게 다른 어떤 것보다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반대로 물질노동도 시간이라는 의미에서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온다. 그러면 결국은 서로를 비교할 수 없게 된다. 비교할 수 없는데 가치의 우열이 존재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는 종교와 같이 이것을 진리로 믿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또한 종교적 속성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믿는 것의 실체는 없음으로 결국 사이비 종교가 된다. 비물질과 물질노동의 우열은 결국 사이비 과학이면서 사이비 종교가 된다.
자본과 국가를 넘어서는 공통체는 가능할까?
#4 대중과 다중
이데올로기의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을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mass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 대중은 권력자들이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능력이 없다. 혹은 능력이 있어도 이것을 전복시킬 의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는 계속 사회를 지배하게 되고, 지배층은 시간이 지나면서 진격의 거인과 같이 자신들의 성을 쌓고 살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이론이다. 그래서 이러한 성들이 전세계로 수출되면서 거대한 제국이 만들어 진다는 것이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제국'이라는 책이다.
그럼 이데올로기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어기서 바로 주체개념으로서 '다중'multitude 개념을 제시한다. 다중은 이데올로기의 비과학적, 비종교적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들이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 간다. 다중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계획으로 제국을 전복한 계획을 세운다. 이러한 제국을 전복하기 위한 모임을 '공통체'common welth라고 한다. 그리고 공통체는 그람시의 말처럼 전세계적인 헤게모니싸움을 할 수 밖에 없다. 알랭바디우의 말처럼 '진리를 맛본 자는 진리의 투사가 될 수 밖에 없다'라고나 할까?
그래서 결국은 다중은 자유를 대중은 복종을 선택하게 되고, 다중들의 싸움으로 제국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 네그리와 하트의 큰 그림이다. 그럼 의미에서 비물질 노동과 물질노동의 가치체계가 허위라는 이데올로기적 구상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다중이 되는 것이다.
다중은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5 관조적 삶과 활동적인 삶
면역학적 세상에서는 모든 이질성들은 퇴치해야할 것들이지만, 성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이질성들은 차이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이러한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이미 구조화된 성과사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것은 세상에 열려진 피로, 이웃을 위한 헌신으로서의 필요, 이데올로기에 반대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위한 피로이다. 이러한 피로는 바로 오지 않고 바로 가지도 않는다. 일단은 가속화되어 있는 시간의 속도를 멈추고, 정지한 상태에서 방향을 새롭게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방향에 대한 관조적인 삶vita contemplativa가 있는 후에야 활동적인 삶vista activa도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네그리의 말을 어느정도 동의한다. 비판하기 시작하면 그 빠른 속도의 인생이 멈추기 시작하면서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묻게 되니깐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사실은 그를 만남 모든 청년들이 삶의 속도를 멈추고 앉아서 생각하기 시작하니 상업도시 아테네가 멈춰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비판하고 멈춰선 이후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필요하다. 전복하려는 계획도 새워야하지만 사람들도 설득해야 하고, 비판의 증거들도 찾아야 하고, 계속 가면서 이 방향이 맞는지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 일반적인 삶을 살 수 없을 때가 많다. '이상한 사람, 미친 놈,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부적응자들!!'이런 소리를 들을 테고.
이상과 경험 속에서 나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그리고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삶의 속도는 많이 느려졌는데, 느려지니 보여지는 것들이 있고 멈춰보니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아직 준비할 시간은 남았다. 문제는 어떤 준비를 할 것인가?이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많은 이상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준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