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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ug 29. 2019

죽음, 충동, 철학

흥사단 전국청년위원회 아카데미아_철학모임

철학 모임을 같이 하면서 어려가지 고민들을 공유했다. 최근에 라캉의 철학을 듣고 있는 터라서 고민이 더 심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조그마한 생각들부터 큰 생각들까지 끄적거리어 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tpDz9iLN9UE

라깡 칼리지에서 정말 좋은 수업들이 많다.




충동, 본능


충동은 drive다. 어떻게 보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동 affction이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충동’과 ‘본능’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충동은 우리의 자아에 다가오는 세상의 자극이라면 이 충동이 원래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충동을 다루는 것이 정신분석학 중에서도 라캉이 주장하는 대로 정신분석 임상이다.


그러나 '본능'은 정신의학에서 다루는 개념으로 이것은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에서 끌어 나와서 의식에까지 분포되어 있는 정도와 효과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뇌신경과학이나 뇌인지과학적인 접근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생존에 라캉은 프로이트를 다시 독해하고 해석하면서 프로이트의 딸 안나 프로이트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 이유는 안나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정신과학으로 대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의미는 정신의 다양한 작용과 꿈의 다양한 원인들을 '논리와 공식'으로 대체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이 발전해서 정신병원이 된다고 라캉이 주장했다.


아무튼, 오늘 우리는 충동과 본능에 대해서 고민해 볼 것이다. 우리에게 강하게 드라이브를 거는 환경들, 사람들, 그리고 어떤 사건들이 우리에게 어떤 우울감이나 자살, 살인과 미움과 같은 감정까지 만들어내는지 다양하게 알아보자.


이건 사야해~! 그러나 충동의 의한 결정은 실망 혹은 후회를 끌어오는 경우가 많다.


응시, 충동


응시는 관조의 시작이다. 응시를 당하는 사람은 충동을 일으킨다. 순간순간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에 인지적인 충동을 일으킬 수도 있고, 그 당시의 기분에 대해서 충동을 일으켜서 흥분을 일으키거나 우울감을 일으키거나 우월감을 일으킬 수도 있다. 아무튼, 응시는 충동의 주요한 경로가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응시할 때 그 대상은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알아차리고선 그에 대한 무시, 반응, 간과와 같은 충동을 보여준다.


그러나 반대로도 응시를 하는 사람은 그 대상에 의해서 충동을 당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응시한다는 것은 응시하는 대상에 대한 정보와 이미지 후각이나 촉각을 통한 1차 충동이 먼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응시로 발전하게 되고 그러한 응시로 발전하게 된 이후부터는 다시 응시의 대상이 주는 어떤 충동의 결과가 다시 응시한 사람에게로 들어오게 된다.

충동은 조절장애를 일으키고 결국 행위와 연결된다


그러니 응시 이전에 응시를 유발하는 충동이 있었고, 이러한 충동의 결과 서로 충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래서 모든 것들이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은 다양한 충동을 일으킨다. 충동을 통해서 파생상품과 같이 다른 충동들을 연쇄시킨다.


라캉이 보기에 그러한 충동은 실재계에서 일어나지만 그 충동이 상상계를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어떤 상징을 만나서 상징계의 언어로 말로 송출되거나 혹은 내면에 어떤 상징으로 쌓이게 된다. 베르그송은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충동에 의해서 촉발된 것들인데 그것은 처음에는 어떤 인상으로 우리 내면으로 들어와서 감정으로 발전하게 그것이 축적되어 정서로 발전한다고 한다.



그래서 라캉은 이런 말을 했다. 그 유명한 "우리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이것이 바로 주체가 응시하면서 그 응시하게 만든 대상이 우리의 욕망을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욕망이 나의 욕망이 된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충동의 주체이다라는 것이다.


샤르트르, 레비나스


라캉의 이야기도 일면 이해가 되는 것이 실존주의에 와서 '타자'에 대한 관점은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샤르트르와 레비나스를 비교해 보자. 샤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타자를 응시하는 순간 나의 의식은 타자에게로 넘어가기 때문에 존재가 '무'의 상태가 된다고 말했다. 그러니 타자의 충동에 자신의 의식을 빼끼지 않으려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반대로 자신의 주체성 자체가 사실은 '타자'의 존재 때문에 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타자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표현에서 타자의 얼굴이 무한한 신비로 나를 밝혀 준다고 할만하다. 그리고 타자를 보자마자, 응시하자마자 윤리가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에 있어서 철저하게 인간의 인간됨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고 보는 관심이 강하다.  


실제로 샤르트르와 레비나스는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충동, 선동


충동의 원인과 효과를 안다면, 그리고 이것을 선하지 않은 의도로 이용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충동을 조작할 수도 있고, 응시를 끌어낼 수도 있으며,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통제할 수도 있다. 프로파간다로 유명한 에드워즈 버네이즈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베네 이즈는 살아생전에 정말 많은 흔적들을 남겼다. 특히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들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짧은 시간 유권자들에게 충동을 일으키거나, 아래 사진과 같이 담배 소비량을 늘리기 위해서 여성들에게 담배가 가지고 있는 상징을 통해서 충동을 일으키는 광고를 만들었다. 셀 수도 없을 정도 많은 충동을 만들었던 버네이즈는 말했다.

만약 그 사람이 혼자 있다면 속이기가 너무 힘들다. 그러나 2명 이상만 모여 있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물건도 팔 수 있다.


당시만 해도 여성들의 흡연은 금지가 되던 시절, 페미니즘의 상징을 담은 여러가지 광고를 만든다.


이 이야기는 충동 drive가 서로 공명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공명을 통해서 전혀 원하지 않았던 것들을 원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선동'propaganda라고 한다. 선동에 의한 충동, 충동에 의한 선택은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왜 그랬지?'라고 하면서 이불 킥을 날린 우려가 많다. 더 재밌는 사실은 이러한 버네이즈가 이런 선동의 방법을, 충동의 방법을 어디서 배웠냐고 물어보니. "어렸을 때 나는 삼촌과 앉아서 식사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배웠다"라고. 그 삼촌은 다름 아닌 프로이트였다!


(다음화에서 계속 진행할 예정)






     꽃과 뼈    / 신철규



    관을 불 속에 넣고 유족들은 식당에 간다

    두 시간 남짓,

    밥 먹고 차 마시기 적당한 시간이다


    젖은 손수건을 내려놓고 목을 조였던 넥타이를 풀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챙긴다

    검붉은 선지를 입에 떠 넣고 우물거린다


    어쩌면 영혼은 흰 와이셔츠에 묻은 붉은 국물 자국 같은 것

    몇 번 헹궈내면 지워지고 마는


    관에 불이 붙고 수의가 오그라든다

    살갗이 벗겨지고 뼈가 드러난다

    우리는 모두 타는 것과 타지 않는 것으로 분리된다


    의자에 걸쳐놓은 영정사진이 웃고 있다


    그의 손을 잡았을 때 나무껍질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었다

    붕대를 몇 겹이나 두른 배에 꽂아놓은 관으로

    수액이 계속 흘러나왔다

    그는 말라갔다 완전연소를 꿈꾸며


    나는 봉지에 든 귤을 천천히 까먹었다

    손톱이 아릴 때까지

    얼굴이 노란 물풍선이 될 때까지


    뼛가루를 뿌려놓은 듯 하얀 벚꽃이 난만하다

    목말 탄 아이가 팔을 허공에 젓는다

    뭉텅뭉텅, 구름이 지나간다


    몸통이 찢긴 벌레를 이고 가는 개미의 행렬

    앞산 공동묘지에는 화농 같은 봉분이 피어 있고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2017년, 문학동네)      




오늘 모임에서 수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건 다음 화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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