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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17. 2019

칼폴라니 '거대한 전환' 마지막 장

21장 복합사회에서의 자유

자기 조정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전혀 도달할 수 없는 적나라한 유토피아이다. 서구인의 의식을 구성하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이다. 죽음에 대한 깨달음, 자유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사회에 대한 깨달음이다.




1.


파시즘으로 인해 자유가 완전히 좌절을 맞게 된 것은 사실 자유주의 철학에서 나오는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자유주의 철학은 권력과 강제란 사악한 것이며 또 인간 공동체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이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런 일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특히 복합사회complex society에서는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두 가지 뿐이다. 환상에 불과한 자유의 이상에 충실하여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사회라는 실재를 부정하거나, 사회 실재의 현실을 받아들여 자유라는 이상을 부정하든가. 전자가 자유주의자들의 결론이라면, 후자는 파시스트들의 결론이다. (p599)


- 자유주의자들은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시장유토피아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경제적인 판을 짜는 반면, 파시스트들은 사회의 실재는 유지하면서 자유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전국적인 판을 짰다.


2.


시장 유토피아를 벗어던지게 되면 우리는 사회 실재의 현실이라는 것과 맞닥드리게 된다. 이 사회 실재의 현실이야 말로 자유주의를 한편으로 하고 파시즘 및 사회주의를 다른 편으로 갈라 놓는 구분선이다. 그리고 파시즘과 사회주의의 사이의 차이점은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문제이다. (p601)


- 이 두 갈래가 하나로 만나는 지점은 '죽음'이다.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도 결국은 죽는 것이고, 사회주의노선에서 실재를 움직이는 사람도 결국 죽음으로 실재에서 떠나게 된다.


3.


죽음에 대한 깨달음, 자유에 대한 깨달음, 사회에 대한 깨달음은 서양인의 의식을 구성하는 세 가지 사실들이라고 믿어지고 있다. 첫 번째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구약 성경의 이야기 속에 계시된 바 있다. 두 번째인 자유에 대한 깨달음은 신약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서, 모든 개인의 인격 하나 하나가 우주에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라는 발견을 통해 계시된 바 있다. 세 번째 사회에 대한 깨달음은 산업 사회에서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아마도 그러한 계시의 예언자 역할에 가까웠던 이로서 로버트 오언을 말할 수 있다. 이 깨달음은 현대인의 의식을 구성하는 한 요소이다. (p602)


- 죽음에 대한 깨달음 이후 자유주의자들은 시장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확장하고, 사회주의자들은 정당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확장하게 된다. 명확히 경제와 정치로 나누어지는 죽음에 대한 응답은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해서 '소유냐? 제도냐?'로 귀결되었다.


4.


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샘이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그것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를 쌓아 올리는 법을 배웠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은 언젠가 잃어 버릴 수 밖에 없다는 사실, 하지만 죽음보다 더 끔찍한 상태가 존재한다는 진리 앞에서 스스로를 체념했고, 그러한 진리를 자신의 자유의 기초로 삼은 것이다. (p604)


- 실제로 '거대한 전환'에서 폴라니는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대한 암시를 여러곳에 심어 두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 하면서 신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이 결국 자기스스로 영혼을 발견할 수 없게 됨을 보여준다.


5.


'영혼을 잃어버린 상태'가 죽음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폴라니의 논문 '파시즘의 본질'에서 중심적 주제를 이룬다. 여기서 그는 인간이 개성적 인격으로서 스스로의 자유를 자각할 수 있고 또 옆에 있는 동료 인간들과 연대하고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렇게 스스로가 영혼을 가진 존재임을 자각할 때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파시즘의 진정한 문제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이 인간을 오로지 전체의 산업적이고 군사적인 기능을 위한 부품이라고 다룬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임을 부인 하는 것과 함께 서양 문명의 유산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한다. (p604 각주부분)


- 포스트휴머니즘에서 트랜스휴머니즘으로 넘어가는 사이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갈 자리를 잃는다. 일단 포스트 휴머니즘에서는 '영혼'이 확대되는 경향이 있으나 인간 고유의 정신의 능력은 사라지며, 트랜스휴머니즘에서는 영혼자체가 소멸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인간성의 부품들이 잔여해서 인간의 일부를 이룬다.


-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체근대에 특성에서 '쓰레기가 되는 삶들'까지의 연결과정을 보면 산업사회에서 부품이 된 인간이 국가적 차원에서는 파시즘을 실현할 수 있는 개인들이 된다고 말한다. 그 말은 상품화되고 기능화된 인간이 전제된 국가에서는 어디서라도 파시즘은 잠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독재자는 이런 잠재성을 실현시키는 사람일 뿐인 것이다. 유혹과도 같은 것이다.


6.


인간은 이제  자신의 모든 동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풍족한 자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인간이 그러한 스스로의 과제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권력이나 계획과 같은 것들을 도구로 삼아 자유를 건설하려 한다 해도 그것들이 인간의 원수로 변하여 자유를 파괴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복합사회에서의 자유의 의미이다. 이것암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확신을 얻을 수 있다. (p 604 책의 마지막 부분)


- 방향이 문제인 속도는 vector와 양이 문제인 속도는 stella이다. 우리가 사회의 조건들을 바꾸지만 만약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거대한 전환이 필요하다.  



칼폴라니의 대한 홍기빈 선생님의 강의

1강 : https://www.youtube.com/watch?v=zB4bzvEW1gs

2강 : https://www.youtube.com/watch?v=AOHzfiRDj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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