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Oct 01. 2019

좋겠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세상을.

고민과 고민 중에 끄적이는 중

1.

자라면서 생겨난 마음의 생채기는 잘 회복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싸늘한 시선이 가슴에 박혀서 비수처럼 계속 피를 흘리는 것 같기도 하고, 친구들이 비웃는 웃음소리가 40이 넘어서도 계속 귓가에 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이 한 사람에게는 인생 자체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람은 이렇게 텅 비어 있다. 채워지는 이미지와 기억들의 조합들에 다른 첨가물이 섞이면 완전히 다른 향과 촉감으로 마음의 피부가 채워져버린다. 그러고 나면 그 피부 아래 곰고 있는 상처들은 다시 세상에 나오기가 어렵다. 이런 상처들을 사람들이 집중하기 시작할 때 바깥으로는 방어기제를 발산하고 내부로는 자기기만에 빠진다. '나는 괜찮아! 나는 이정도쯤이야!'라거나 '제내들은 잘 모르니깐~ 아이고 오히려 너네가 불쌍하다!'이렇게.


2.

요즘들어 불혹의 나이에 다가가는 사람들, 친구들을 본다. 사회 속에서 어른이 되어 있고, 아이들이 아빠와 엄마를 바라보고 있는 환경에서 아침에 눈을 뜨는 사람들이었다. 불혹이라면 얼굴에 세월의 길이 나기 마련인데, 내가 그 나이 즈음에 다가가보니 그 말이 얼마나 슬푸고 어려운 말인지가 실감이 간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들은, 나를 포함해서 어른이 아니라 아직도 아이와 같았다. 어른이 어떤 기준에서 30이 넘으면 혹은 40이 넘으면. 이렇게 말하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삶 속에서 항상 처음으로 모든 아침을 맞이해야 하는 '아마추어'들이었고, 우리 뒤를 따라오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그럼에도 프로로 보이도록 해야 했다. 그게 슬픈 일인 것 같다. 우리도 모르는 것들을 아이들에게는 안다고 말해야 하는 게 말이다.


3.

시간이 집을 짓고 인간은 그 집에 들어가서 산다. 집을 지어가는 동안에 인간은 무엇이나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만들어지고 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져 버린 자괴감에 '희망'을 포기한 삶의 반나절을 살게 된다. 내일의 희망이 사라져버린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투영되지 않는다. 자신의 과거도 자신의 미래도, 오직 지금 현재 내가 쏟아내고 있는 것들만 가득해 진다. 예전에는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잘못된 것들을 비난하기에 바빴는데, 요즘에는 '그럴수도 있지'라는 생각과 함께 그럼 어떻게 해야하지? 그럼 남은 시간은 평생 희망없이 살아야 하는건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4.

시간을 집을 잘 짓고 그 시간의 집 자체가 자신의 몸과 영혼이 쇠약해질 수록 잘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어주는 사람들도 본다. 그 그늘 아래서 남은 여생을 살아가는 이들의 눈동자에는 과거만 어리운 것을 본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인생에는 깊이가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다. 마흔 즈음이 되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차이가 점점 명확해 진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다른 이들도 못 보는 것이었다. 삶의 이유라던지, 인간이 왜 늙는지? 이런 것들이다.


5.

실존주의적으로 생해 보았다. 나에게 의미있는 것들이 있는가? 그 의미있는 것들의 지속성은 언제까지인가? 지금 공부하고 고민하는 것들이 답은 있는 걸까? 더욱이 그 고민들이 처음부터 답이 없는 상태로 셋팅된 것은 아닐까?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문득, 그럼 나는 내일을 어떻게 살아가지?라는 느낌에 '예언자적 비관주의'가 되어 가는 나를 본다. 계속 무엇인가를 추구하도록 셋팅된 사회에서 살아온 것이기 때문일 것인가? 성과가 없거나 남는 것들이 없는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것들 말이다.


6.

다시 눈을 돌려서 나의 눈에 비추이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이어간다. 삶에 바짝 다가가면 생각할 시간이 없어지는 것일테니 삶에서 조금 떨어져서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가,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내가 만들어낸 것일까? 이 사회가 만들어 낸 것일까? 누군가의 욕심으로부터 이렇게 크게 파생된 체계가 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우연의 연속이었던 것일까? 이런 고민들을 잠시 해 보았다. 끝도 없는 고민들이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느껴지는 것은 사람들이 이제는 잘 고민하지 않는 다는 것.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이런 고민들을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고민에 대해서 답을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도 해 본다.


7.

울고 있는 이들에 눈망울에 희망이 어리우면 좋겠다. 웃고 있는 이들의 웃음 속에 선함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가 소중했으면 좋겠다. 역사의 수 많은 아픔들이 이제는 다시 재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난과 빈곤이 과거가 되면 좋겠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즐거운 변화가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내일을 고민하지 않아도 아침에 불안하지 않고 일어날 수 있는 시간들이 찾아오면 좋겠다. '복지국가를 추구하자!'라는 고민자체가 없는 모두가 따뜻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좋겠다'라고 말하는 것을 이제는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되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쉽게 쓰여지지 않는 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