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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Nov 02. 2019

눈에 멍이 들도록

누가복음 18장_함께걷는 교회


1.


이야기의 시작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하는 것에서부터다. “기도하고 낙심치 말아야 한다”라고 타이르신 예수님은 한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을 해 주신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설교이지만, 항상 그렇듯 함께 걷는 교회에서는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 오늘의 비유는 재판장과 고아의 비유이다. 흔히 알고 있는 비유는 재판장이 간 밤에 찾아온 과부 때문에 결국에는 요청을 들어 준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보통 ‘끈질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결국 들어 주신다는 메타포정도로 해석된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8‬ ‭KRV‬‬


2.


믿음이란 무엇인가? 올바른 정의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런 질문을 굳이 하지 않아도, 우리의 욕망과 욕심을 ‘기도’라는 방법론에 태우기만 하면 무조건 하이패스로 가는 설교로 유명하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렇게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과부의 요청은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라는 것이다. 재판장은 권력의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서 무엇인가를 정하고 무엇인가를 취소하고 사람들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권세를 가진 위치에 있었다. 반대로 과부는 항상 사람들의 결정에 대한 변화를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소외되고 힘없는 약자였다. 그런 과부에게도 요청할 곳이 있었으니 바로 권력의 핵심이었던 재판장이었던 것이다.


3.


재판장이 재판장이 된 것은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누군가 다른 사람들 보다 높은 위치에 있게 될 때는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이 동등하게 가지고 있는 가치를 제도적으로 흡숙한 결과이거나, 타자의 동의를 권력을 변환해서 자신 내부로 흡수한 사람이거나, 가치들을 자본으로 치환해서 소유하는 사람들이다. 첫번째 유형은 공무원이고, 두번째 유형은 정치인이고 세변째 유형은 자본가이다. 반대로 자신의 가치를 빼앗긴 사람들 혹은 잘 모르고 이전시킨 사람들은 이제는 가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가치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4.


과부는 매일 찾아왔다. 그리고 재판장에게 매번 요청을 했다. 재판장은 계속 무시했지만, 과부는 계속 요청했다. 재판장은 ‘자꾸만 귀찮게 해서 못 살겠다’라고 했는데 사도바울은 귀찮게 하다라는 표현을 자신의 서신서에도 동일하게 쓰는데, 이것은 ‘눈에 멍이 들도록’이라는 표현이다. 과부의 요청은 눈에 멍이 들도록 두들려 패는 듯한 요청이었다. 서로 권투를 하면서 싸우는 모습이었다. 과부는 매번 재판장과 권투를 하면서 요청하고 부르짖으며 귀찮게 했다.


5.

다시 생각해보자. 과부가 그렇게 요청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뇌물을 주고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자신의 억울함에 대한 ‘공의의 요청’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공의로운 심판을 요청하는 끊질김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재판장’에 대해서 ‘공의의 요청’에 대답해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요청할 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전제가 먼저 깔려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구하는 것은 헛된 것이 될 것이다. 과부가 상인을 찾아가서 공의로운 요청을 해봤자 상인은 공의에 대한 응답을 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성경으로 돌아가서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기도할 때 당연히 전제presupposition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기도하는 요청이 달라지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불의한 재판장이라면 우리가 불의한 것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 불의한 것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것일 테니까, 우리가 만약 기도할 때 불의한 것을 구하면서 ‘기도’라는 방법론을 사용한다는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면 하나님을 이미 ‘불의한 존재’로 규정하고서 구하는 것이 된다. 반대로 하나님이 공의로운 재판장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공의로운 것들을 요청하는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다시 물어봐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근거하고 있는가?  


7. 좀 더 반전은 심지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재판장은 ‘불의한 재판장이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도 귀찮게 하는 과부의 요청을 들어준다. 그렇다면 공의로우시며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들으실까? 이러한 전제에서 우리의 기도를 시작한다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믿음’을 회복하고 다시 우리의 기도를 시작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끊질기게 기도하는 이유는 이것이 공의에 대한 요청이었기 때문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공의로운 요청을 드리는 기도를 우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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