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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Jan 04. 2020

39

삶의 한 중간에서

1.

한 80세를 살려나? 이빨은 다 빠지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해도 내일을 희망하려나? 젊은날의 행복은 노년의 지루함을 만드나니. 그러나 젊은날의 고생이 노년의 행복을 만들지는 않으리, 오히려 노년의 허무가 한 평생의 해석을 다시 하게 하지 않으려나?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시대적 망상인가? 나 혼자만의 환상인가?


2.

나이가 먹어간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간다. 100년전 조선 땅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그림자가 내 인생 가득히 드리울 때면 나는 나의 행복을 잠시 주머니에 넣어 놓고서는 한참 동안이나 역사의 뒤안길을 바라본다. 내일을 바라볼 수 없었던 이들의 미래는 얼마나 허무했을까? 그 때 당시에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실재에서 떠난 허영이 아니었을까? 세상이 자신의 질서를 잡아가기 이전에 마음의 인생의 길을 만들 던 때를 돌아보아야 하리라. 우리에겐 너무나 미래에 매몰된 물질의 무게가 크니 말이다.


3.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어차피 해석학의 영역에서만 환하게 빛나지 않을까한다. 지금 내가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에 내가 새로운 해석을 하지 않은다면 오늘의 나는 단지 하나의 사건, 혹은 하나의 시간의 분침 정도 밖에 되지 않을까 하노라. 의미를 부여하고, 지나간 시간들을 꿰어 맞춰서 그 시간에 나의 인생이, 나의 시간이, 나의 관심이 의미있었노라고 말하는 것 같더라고.


4.

시간이 공간과 뜰 떼가 있다. 하나의 공간에 여러가지 시간이 돌아다니거나, 하나의 시간에 다양한 공간이 중첩되는 현상이다. 그 괴리감 사이에서는 오히려 논리적인 결론보다는 감정적인 묘사가 더 현실적이 된다. 논리적이라는 로고스의 특징은 연결이 끊어진 상태에서는 생명을 잃어 버리노니, 오히려 감정의 바다는 분노와 울음과 설음과 외로움과 기다림이 공존하는 공간이자 시간이니, 이 공간에서 우리는 언제나 사랑이 우리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5.

바깥에서 떨고 있는 자아에게 물어보았다. 넌 왜 그렇게 울고 있느냐고. 그랬더니 '너가 너를 받아주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멀리하려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본 모습은 외롭고, 처량하고, 불쌍한 것이니까. 인간은 자기 스스로 절대 행복할 수 없고, 즐거울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진실로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표정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의 언어 속에서 살 집을 비로소 정하게 된다. 기다림 끝에 사랑이 오듯이, 기나긴 물음 끝에서 우리의 고민은 비로소 끝이 나리라.


6.

40여년의 삶을 살고 나니, 보이는 것들이 한 두개가 아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이라고 했던 것들이, 그렇게 추구하고 욕망하고 원하던 것들이 사실은 별거 아니다. 허무주의라기 보다는 단단히 속고 있었다는 느낌이다. 나에게는 아직 생명을 생존에서 끌어내는 미션이 주어지지 않아서 그런지 벌써 60가까운 이들이 느끼는 삶에 대한 물음을 자주 던지는 요즘이다. 그리고 여지없이, 인간은 왜 이렇게 불행한가?라는 고민에 생각을 덧붙이게 된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내가 즐겁게 차 한잔 마시면서 여유를 즐길 때 누군가는 삶의 나락에 떨어지거나, 아직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휴일에 노동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식이 넓어지면 삶은 더욱 힘들어진다.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 생각할 수 없었고 볼 수도 없었던 장면들이 잠시 스쳐지나갈 때도 온 우주가 흔들리듯이 삶 자체가 갈 길을 잃어 버리니 말이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낄려면 누군가는 행복하지 않아야 한다. 비교 대상이 있어야 행복이라고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러니 나는 병이 도진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이야기를 나눌 때 행복함을 느끼는데, 그 사이에 또한 이 행복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지루함, 비루함, 잔인함과 힘겹게 싸우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인생은 더욱 괴롭다.


7.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13살 정도에 처음 주변에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마지막 음성을 들었는데, 요즘들어서 어머니가 아프시면서 다시 죽음이 우리의 주위에, 너무 가까이에 있음을 경험한다. 부활을 믿는 기독교 신앙의 한 가운데서도, 역시 죽음은 현실로 다가올수록 먼가 섬뜻하고,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고민들 가운데 항상 시작에서 '죽음'을 전제로 생각을 했더랬다. 그래서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그렇게 의미있고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졌다고 한다. 나는 어느정도는 동의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의 대부분은 누군가로부터 만들어진 것들이고, 그것들을 이루기 전까지만 작동하는 욕망들이 너무 즐비하다. 속고 속이는 세상에서 속지 않는 자는 방황한다. 나는 속지 않을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방황하는 중이다. 죽음이 조금씩 스쳐가는 자리에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가 목적이 되는 삶을 그리는 중이다.


8.

그럼에도 불구하고 39를 맞는 나는 다시 열정에 불을 붙인다. 죽음을 전제로 하는 하이데거의 전체주의를 뒤집기 위해서 한나아렌트는 '탄생성'을 중심으로 인간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인간의 조건을 내건다. 인간은 언제나 지금도, 어디서나 여기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생각의 시작도, 관계의 시작도, 사랑의 시작도, 물음의 시작도, 언제나 가능하다.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는 이렇게 어느순간에나, 어떤 공간에서나 가능하다. 그래서 자신이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자유의지를 맛보았기 때문에, 여기에 목숨을 건다. 나는 그래서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한다. 사람들과 새로운 모임을 만들고, 허무에 빠진 시간을 구출해 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독서모임을 만들고, 사람들과 자본주의에서 허덕이는 사회를 바꾸어 보기 위한 도전을 해볼려고 한다. 허무를 지나서, 실존을 지나서, 마침내 현상에서의 해석을 시작했다.


9.

스티브잡스의 스탠포드 연설을 다시 들으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항상 배고픔에 거하자. 안주하지 말자. 이런 이야기는 꼭 년초에는 그 영향력이 어마어마한 듯하다. 맞다. 내가 너무 편해진 관계나 일, 생각들에 거하지 말고 계속 배고프고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의욕으로 다시 시작해보자. 2020년에는 사용자경험(User Experience Design) 데이터 분석(Data Analysis), 고차원 퍼실리테이션(회의 만이 아니라 기획과 전략에서의 퍼실리테이션), 해석학(폴리쾨르), 그라마톨로지(데리다의 언어구조 분석과 비평), 브런치북 출간(낭만일기에서부터 추억일기까지), 정책피드백 이론개발(대학원 수업에서 정책형성, 정책집행, 정책형성을 수강예정), 인사이드아웃 컨퍼런스 브랭딩(개인의 내면의 변화가 외부의 변화로 이어지는 컨퍼런스 브랜딩하기), 한국형사회적합의제도 이론화하기(그 시작으로 최태욱교수님의 '한국형 합의제민주주의를 말하다'를 정리), 교육프로그램 개발(나의 본연의 업무인 '해외교육훈련팀'에 걸맞는 Worldwide 버전으로 교육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프로그램단위 개발), 한길그레이트북스 정리(철학과 정치사상의 고전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멘토링 심화(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왜 서울대 갈 생각을 안하게 되었나'라는 질문으로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장벽을 허물기 위한 공부 시작하기), 그로스해킹 입문(조직을 건강하게 바꾸고, 확장하기 위한 전략들 공부하기), 낭만적인 사랑시작하기(그늘의 의미를 알고, 사랑의 깊이를 알며, 눈물 속에서도 열정을 추구할수 있는 사람 만나길) 등을 해볼 생각이다.


10.

죽음을 고민하면서도 다소 거창하게 시작하는 2020년 39살의 도전이다. 오히려 더 덤덤하게, 성실하게 걸어갈 볼 생각이다. 12월에 다시 내가 걸어온 길을 해석할 때 조용한 미소가 흘러 넘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간 위의 존재인 인간의 한계에 도전해 보는 한 해가 되길 원한다. 영혼의 무게만큼, 삶의 깊이도 더 깊어지길 바라면서, 낭만주의자들의 노래가 세상에 퍼지길 원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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