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정치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Mar 12. 2020

비그포르스와  잠정적 유토피아

3. 마르크스주의의 해체


https://brunch.co.kr/@minnation/1678





이제 혁명가들에게 남은 선택은 둘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을 것인가 혁명을 계속할 것인가_코르넬리우스 카르토리아디스




3. 마르크스주의의 해체


마르크스주의는 결국 주도권을 잡은지 30년을 넘기지 못하고 1차세계대전을 전후로 해서 몇가지 조류로 갈라진다.

정통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체계가 붕괴하면서 19세기 이후에 보이지 않았던 아나키즘과 국가사회주의의 양대산맥이 다시 국제사회주의 운동을 흔들어 놓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생디칼리슴, 사회민주주의, 볼셰비즘으로 나누어진듯 보였다.

이 세 조류는 1890년 이후 등장한 제2인터네셔널식의 마르크주의로의 회귀를 반갑게 여기지 않았고 일종의 수정주의노선으로 보여졌다.


여전히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동일하게 논의된다


(1) 볼셰비즘



볼셰비즘의 논리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제2인터네셔널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를 배반했다고 판단하고, 이와 조직적으로 분리된 공산당을 새로이 만들어 이로써 제3인터내셔널, 즉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결성할 것을 호소한다. 이들은 나름대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논파할 만한 논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역사의 발전단계에서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은 이유는 '과학성'의 부족이 아니라 '제국주의'로 인한 식민지 확장에 있었다. 식민지확장으로 새로운 노동운동 상층의 '노동귀족'이 만들어졌다.

자본주의가 제국주의의 모습으로 진화한 이상 이제 혁명은 영국이나 독일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라, 세계적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약한 고리'인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 일어나야 하며, 1917년 러시아혁명이야말로 이를 증명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셰비키는 베르슈타인식의 수정주의나 카우츠키식의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모두 배신자라고 했다.

10월 혁명으로 일컫어지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볼셰비즘의 실패


약한고리에서 시작한 볼셰비즘 주도의 러시아 혁명은 사실 역사적 발전단계에 없는 혁명이었고, 러시아를 근거로 해서 전세계적인 확산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던 확신은 1920년이 지나가면서 물거픔이 되었다.

역사적 유물론의 전개과정에서 벗어나서 이론적 힘을 잃은 볼셰비즘은 나름대로의 이론들을 만들어가려고 했지만 러시아 노동계급의 수와 지적역량으로 볼 때 소비에트에 모여든 노동자만으로는 튼튼한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형성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나라 안팎에서 러시아 백군의 반란을 돕는 반혁명 세력이 기세를 올리게 되자 점자 볼셰비키는 바쿠닌이 경고한 것과 같은 폭력정부로 변해갔다.  1921년 크로슈트에서 벌어진 아나키즘의 병사들을 가혹하게 탄압한 '크론슈타트 수병반란 사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럽선진국들의 경제적 지원없이 전시 공산주의에서 신경제정책NEP을 진행하던 십몇년간 소련 경제는 극도의 혼란과 후진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경제학자 콘드라티예프를 고용하는 등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붕괴를 예측하기에 바빴다. 또한 제국주의의 타도를 위해서 인도와 중국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했지만 결국은 극단적인 국가사회주의 방식의 스탈린주의로 몰락했다.


(2) 사회민주주의


사회민주당의 역할 변경


1차 세계대전 후에 독일 사민당이 분리되어 공산당이 떨어져 나갔고 카우츠키의 정통주의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다시 봉합되어 독일사민당 안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 볼셰비키와 공산당이 표방하는 혁명 노선과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제도 정치 내에서 의회 진출을 통해 사회주의의 목표를 달성한다는 합의는 있었다.

그러나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의 결합은 동상이몽 꼴이었고 "교조없는 실천과 실천없는 교조가 결합되어 기묘 꼴"이 되어 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이러한 모순이 어떻게든 해결되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유럽 각 나라에 의회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으면서 독일, 스웨덴, 오스트리아에서 사회민주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지도적 정당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사회민주당은 어쨌든 국정을 책임져야 했고, 사회주의나 노동계급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온갖 문제들에 대해서도 정책과 대안과 방향을 제시해야만 했다.

국민의 정당으로서 '국민정치national politics'전반을 책임지고 통치할 수 있는 정당으로 거듭나야 했었다.


카우츠키의 정통주의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독일 사민당의 상황


전후 독일사민당은 '부르주아 국가권력'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교조는 놓아둔 체, 국정운영을 맡게 된다. 독일황제가 퇴위하고 독일사민당이 새로운 공화국을 수립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아직 자본주의의 붕괴가 무르익지 않았는데 자신들이 권력을 잡은 것에 대해서 당혹감을 느꼈다.

"단지 우리나라와 경제 전체가 붕괴하는 것을 막는다는 하나의 목적에 한해서, 우리당의 대표들은 입각하는 희생을 감수하려 한다"라는 변명을 늘어놓게 된다.

하지만 독일 사민당 안에는 여전히 부르주아세력과 타협하면 안된다는 마르크스주의가 여전히 횡횡하고 있었다.

베른슈타인은 독일 사민당이 협소한 계급적 입장을 넘어 전체 근로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필요에 따라서 자유주의자들과도 적극 협력을 하고 타협해서 질질적인 개혁을 이루는 국민적 정치를 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독일사민당은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3) 생디칼리슴


생디칼리슴의 탄생


볼셰비즘과 독일사민당과 다르게 또 하나의 기류인 생디칼리즘은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기원적으로는 아나키즘의 갈래로 보아야 한다.

제1인터내셔널이 해체된 이후 혁명적 아나키스트들 중 산업 노동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미국, 스웨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 노동조합 운동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생디칼리슴이라는 말이 노동조합을 뜻하는 프랑스어 '생디카syndicat'에서 나온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강했던 프랑스에서 1895년 프랑스노동총동맹Confederation Generale du Travail이 출범하면서 생디칼리슴은 이론적, 실천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운동형태를 가지게 된다.

명시적으로 생디칼리슴을 내걸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노동운동 조직인 '세계산업노동자연맹'도 생디칼리슴의 영향이 강했다. 실제로 많은 나라의 노동조합 운동에서 생디칼리슴의 영향력이 마르크스주의를 능가했다.


생디칼리슴의 논리


생디칼리슴은 전 세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써 스스로를 조직화해 산업을 운영하는 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 현존하는 국가와 자본가들을 일소해버리는 혁명적 행동을 통해서만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요약하자면, 현존하는 사회체제를 완전히 부수어 버리고 노동조합이 실권을 쥔 일련의 산업 체제로 현대사회를 다시 구성하고자 했다. 그 방법으로 생디칼리슴은 정당을 만들고 국가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일체 주장을 거부하고, 오로지 노동자들의 물리적 힘을 실질적으로 조직해 이들의 직접 행동을 통해 그 힘을 행사할 것을 주장했으며, 그 절정의 방법으로 '총파업'을 제시했다.

산업을 장악한 노동자들의 물리적 힘이란 바로 기계를 멈추어 현존 사회를 마비시키는 것 뿐이다. 공연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대로 권력을 잡거나, 협상을 하는 방식은 결국 부르주아들과 같은 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디칼리슴이 원하는 것은 계급 대 계급의 전쟁이며, 그 방법은 총파업이라는 극단적 물리력 뿐이었다.



생디칼리슴의 이론


엉뚱하긴 하지만 생디칼리슴이 마르크스주의의 정수라고 주장하는 '조르주소렐George Sorel'은 라브리올라와 크로체와 긴밀하게 연락하면서 '신화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했다.

역사적 유물론이나 정치경제학과 같은 정통마르크스주의 교조들은 모두 마르크스주의를 억지로 해석한 탁상공론이며 노동계급이 본래 가지고 있는 혁명성을 미리 짜놓은 도식에 가두어 놓은 반혁명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소렐이 보기에 진정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나가는 노동자들의 능동적 행동에 있으며, 생디칼리슴이 표방하는 노선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능동성을 해방시킬 수 있는 '총파업의 신화'의 신화로 작동한다.

그러나 역사적인 경로를 살펴보면 네덜란드의 안톤파네쿡이 세운 평의회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냐 야만이냐'그룹등 다양한 자유지상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실상 전통 마르크수즈의보다는 생디칼리슴에 훨씬 가까운 경향을 보인다.



생디칼리슴의 한계


문제는 생디칼리슴이 주장하는 극단적 노동자 주의주의가 일반 대중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느냐다. 그러나 세상이 노동자들만으로 구성된 것만도 아니다. 또한 총파업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성공적인 대중운동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역사적 유물론이나 정치경제학을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과 사회과학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생디칼리슴은 이러한 필요를 거부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또 다시 종래의 마르크스주의의 자본주의 이론에 기대는 한계를 보였다.

이 흐름은 20세기 전체를 관통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나, 대규모의 현실적인 대중운동 프로그램으로서는 결국 1927년의 스페인 내란을 끝으로 명을 다했다고 봐야 한다.


생디칼리슴의 영향


또한 소렐의 극단주의적 주지주의는 어뚱하게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낳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사회당 기관진 '전진'의 편집장까지 지낸 촉망받는 사회주의 혁명가였으나 소렐의 '끝없은 파괴와 행동'이라는 사회주의 방법론에 영향을 받았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이탈리아 사회당이 보여준 애매모호한 중리붖의에 격분해 스스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 무솔리니는 현존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증오와 과격한 파괴의 행동주의 노선만을 고집했고, 그 둘을 결합해서 파시즘 운동을 주창했다.

독일 나치즘의 중요한 이데올로그인 '슈트라서 형제'도 자본주의에 대한 극단적 행동주의를 결합해 '독일 민족 사회주의'의 이론적 토양을 닦았다는 저메서 무솔리니와 닮아 있다.

또한 약관의 나이로 일본 사회주의의 총아로 떠올라 중국혁명에 투신했던 '기타 이키'가 일본 파시즘의 사상적 지주가 되어가는 과정에도 유사점이 있다.


왼쪽부터 '기타잇키', 나치즘, 무솔리니의 사례를 통해서 생디칼리슴의 영향들을 볼 수 있다




https://jmagazine.joins.com/forbes/view/312573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1&idx=249


http://www.redian.org/archive/19181



매거진의 이전글 비그포르스와 잠정적 유토피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