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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pr 11. 2020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친구들을 만나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해봐요~다른 사람한테요!

빈이는 웃으면서 넌지시 나의 표정을 살폈다. 가느다른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로 아직은 시린 초봄의 바람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흥미진진하게 대화하는 사람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중이었다.


"어릴 때 병원에 많이 있었는데, 할 일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혼자서 생각을 많이 했는데. 그게 아마도 지금 처럼 되게 만든게 아닌가? 생각해 봐요."


누구나 어릴 적이 있고, 어릴적에는 사람과 물건사이의 구분되지 않는 경계를 왔다갔다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가득한 곳에서 지낸 빈이에게는 인간이 추구하는 욕구나 목적 자체가 무의미했다. 모두가 죽는다!라는 진리가 아니라 시간은 사실 누구에게나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중 3의 생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로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빈이의 머리속에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볼 수 있었다.




노량진 근교의 지역아동센터 아이들하고 2년을 만났다. 함께 등산도 가고 무수한 삽겹살을 뒤집었으며, 서브웨이 샌드위치 몇미터를 먹었고 볼링공도 여러번 던졌다. 아이들은 딱 그런 때가 있다. 외로움에서 주체로 가는 터널과 같은 시기. 그 시기는 어둡고 두렵고 무엇인가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하늘인 것 같은 인생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어느 곳 하나에도 발 붙이지 못하고선 나그네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시기. 그럴 때 친구 한명만 있어도 그 길은 외롭지 않고 오히려 더 밝게 빛날 것이다. 그런 친구가 되고 싶어서 찾아갔던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벌써 헤어질 시간이 다 되었다. 이제는 자신의 인생 가운데서 우뚝 서서 즐겁게 카톡을 보내면서 나의 월급걱정을 하는 아이들.


"선생님 진짜? 유학갈꺼에요? 선생님이요? 무슨 돈으로요?"


라고 외치면서 은근 나를 응원하는 아이들. 이사를 가는 형제 중학생과 이미 고등학생만큼 커버린 친구. 아이들과 만나면서 오해하던 것들이 많이 무너졌다. 내가 시간을 내서 만나주고 나의 돈으로 맛있는 것을 대접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오롯이 인간 대 인간으로 아무런 격없이 '친구'로 만난다는 것. 오히려 여러가치 출처의 의도들로 '이 사람이 나한테 왜 이러지?'라고 오해하지 않는 친구들 앞에서 나는 한 없이 순수하고 예전처럼 어린이가 되었다. 매번 무한리필 고깃집에서 10인분 넘게 삼겹살만 구울 때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서로에게 바라지 않고 그저 있는 시간을 함께 걸어가는 그런 친구 말이다.


 




학교 후배가 일하는 지역아동센터에 영어공부와 국어공부를 하고 싶은 친구들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언제나 그렇지만 가는 길은 매우 쪼잔하고 진부하고 몸이 천만근이나 되는 것처럼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것보다는 중2병을 이제 막 벗어난 중3친구들과 만나서 과연 나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이런 고민들이 버스를 2번이나 갈아타고 지하철에서 내려서 또 걸어가야 하는 내내 몸무게를 몇킬로그램이나 더했다.


"안녕하세요~!! (새로오셨나봐~)"


저녁 7시가 안되었는데도 이미 아동센터는 20여명의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공기놀이를 하기도 하고 댄스를 추기도 하고, 목공을 배우기도 하는 아이들 사이에 태권도를 8년이나 하는 친구와 이 글의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던 빈이가 있었다. 매주 수요일마다 두 친구를 교대로 영어와 국어를 가르치기로 했다가, 가르치는게 아니라 함께 놀기로 했다. 영어공부는 팝송과 굿모닝 팝스, 명연설을 들으면서. 국어 공부는 감명깊에 읽었던 시와 그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서로 시를 써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나는 온전히 경청하고 있었다. 오로지 이 만남에 모든 인생의 관심이 쏠려 있는 것처럼. 진실로 궁금해하고, 정말로 질문하고 싶어서 질문을 했다. 아이들은 천사같이 자신의 하얀 마음을 다 열어 재끼고선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가장 처음 밟아보는 이야기들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서로 집에 가기 싫을 정도로.




지역아동센터를 방문하면서 주위 사람들은 '대단하다! 멋지다! 정말 짱이다!'라고 하지만, 사실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누군가를 변화시킬려고 하는게 아니라 '함께 걷고 싶어서'니까.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 말이다. 변화는 스스로 해 나가는 것이다. 물론 촉진할 수는 있겠지만, 변화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응어리 졌던 물음들이 삶의 표피를 입고 의지로 방향을 잡았을 때에야 비로소 꽃이 피는 흐름이다. 그러니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교육학에서는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은 '변화'이고, 학습은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선생님 다음주에 봐요~"


90도로 인사하고 돌아가는 빈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여리고 어린 육체 속에서 누구보다 강하고 여유로운 정신이 살아 숨쉬는 것 같은. 거인과 같은 빈이의 뒷모습이 초라함이라고 붙여논 꼬리표를 길거리에 달아 놓고 낭만적으로 걸어가는 것 같았다. 이것은 물론 나의 투사였다. 함께 대화하고 눈을 마주치면서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끼는.


 




인생 망했다! 그러니 되는대로 살자


가 신앙 안에서는 그러니 내가 계획한 것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시니깐 그냥 처음부터 하나님한테 맡기자가 된다. 인생은 망했다. 내가 혼자 살기로 해서 나와 다른 사람의 벽을 만들고 스스로 소외되면서 주체를 지키기로 한 인생은 망했다. 그러나 이제는 온전히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함께 방향을 정하면서 천천히 혹은 빠르게 걸어가는 것 밖에는 없는 인생이 되었다.


행복은 언제나 추구하지 않아도 관계 안에서 결과적으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목표로 삶을 때 이미 선물의 의미는 사라지고 경쟁해서 얻어야만 하는 낡은 지폐가 되어 버린다.


빈이와 만나기까지 나는 또 시를 읽고 감상하고, 진짜 나일 때 나오는 시적 혁명들로 스스로 벽을 쌓았던 바스티유 감옥을 헐어 버려야 한다. 스스로 속박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팔을 벌려 타인의 얼굴을 맞아 들일 때이다.


 


함께읽고 인생을 음미했던 시_


나는 가시나무가 없는 길을 찾지 않는다
슬픔이 사라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해가 비치는 날만 찾지도 않는다
여름 바다에 가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햇빛 비치는 영원한 낮만으로는
대지의 초록은 시들고 만다

눈물이 없으면 세월 속에
마음은 희망의 봉우리를 닫는다

인생의 어떤 곳이라도
정신을 차려 갈고 일군다면

풍요한 수확을 가져다주는 것이
손이 미치는 곳에 많이 있다

인생의 선물_사무엘 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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