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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pr 22. 2020

친구와 걷는 길

베르톨트와 김수영 사이


이러니깐 제가 영어를 못하죠 ㅠ


aisle이란 단어를 연이어 영국식 발음과 미국식 발음으로 들려 주었더니 인이 하는 말이었다. 인이가 오늘 가지고 온 책은 영국 아일랜드에서 출판한 책이라서 영식발음으로 적혀 있었는데, 발음기호를 공부하면서 다른 점을 발견하면서 인이는 멘붕에 빠졌다.


지난 시간 "선생님 왜 영어를 배워야 하나요? 영어는 미국의 언어 아니에요? 굳이 우리가 왜 배워야 해요? 다른 사람들은 성공하려면 배워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별로 성공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라며 영어에 대해서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는 인이는 오늘 아버지에게 혼났다며 영어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영어 문제집을 3개나 가지고 왔다. 그 중에 하나는 시원스쿨꺼였다. 심지어 시원스쿨에서 발행한 영어단어집에는 발음기호도 없었고 한국어로 '아일'이라고 써 있었다.


빈이와 함께 시원스클 대표의 프로필을 찾아보면서 캐나다에서 공부를 했다는 것을 찾아보고 자신이 가진 다른 책과 발음이 다른 이유를 찾아냈다. 빈이는 태권도를 8년이나 했는데 눈이 아주 빠르고 의욕적이었다. 특히 태권도를 할 때 상대방에 대한 유형을 빨리 파악해야 피하거나 가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핵심을 잘 파고 들었다. 지난주까지 불과 world라는 단어를 못 읽었지만 오늘부터는 제법 여러 단어를 읽기 시작했다.


선생님 이거 그럼 애드벤쳐~라고 읽는거죠?

이상한 발음기호를 그래도 꾸역꾸역 읽던 인이는 금새 다양한 곳에 적용해보기 시작했다. 지난주까지만해도 아동센터에서는 인이는 영어를 잘 못하고 학습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 1시간동안 이렇게 성장한 것이다. 사람의 잠재력이란 정말 놀라운 것이다. 다만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지.


영어공부를 하다가 아일랜드를 찾아보고 동유럽과 서유럽의 기준을 알아보 뒤에 산토리니를 갔다가 알래스카에 도착해서 이글루를 살펴보고 미국 국기에 별이 53개라는 것과 그 중에 하나가 알래스카 주라는 것, 미국이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져 있다는 것과 이스탄불은 동서양의 접접이지만 아랍어를 쓴다는 TMI를 나누고서 즐겁게 헤어 졌다. 그래도 숙제는 좀 힘들겠지?라는 말에 "선생님 사람이 목표가 있어야 열심히 하죠~ 제가 해볼께요!"라는 씩씩한 대답을 하며 인이는 태권도 도장으로 떠났다. 다음주는 사회혁신으 포럼을 진행해야 해서 수요일에 못온다고 하니 다른 때 다 된다면서 결국은 금요일 5시에 만나기로 했다. (다음주 금요일은 아침 7시에 출근해야 한다! 결국)




선생님 오늘 8도에요 팔도! 팔도 비빔면


인이와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빈이는 즐겁게 인사를 하면서 들어왔다. 내가 목말라서 2+1 우유를 사서 들고 들어왔다는데 빈이는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았다. 간식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우유를 꿀꺽꿀꺽 삼켰다. 저녁을 못 먹은 탓인지 아니면 큰 소리를 TMI를 연발해서 그런지 배가 많이 고팠다. 이윽고, 빈이와 수업이 시작되었다. 지난주에 시를 읽고 서로 즐거워하던게 생각이 나서 오늘도 시를 읽고 서로의 감정을 나누어 보기로 했다.



김수영의 '풀'과 베르톨트 베르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서로 낭송하면서 배경음악으로는 프랑스 샹숑을 틀어 놓았다. 그렇게 낭만적일 수가 없었다. 베르톨트의 시를 여러번 읽고 느낌을 물어보았는데, 빈이는 무엇인가 슬픈 느낌이 들긴 하는데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베르톨트의 일대기와 나치에 대해서, 그의 망명길에 들렸던 덴마크-러시아-미국을 찾아보다가 결국 매카시즘까지 갔고 2차 세계대전과 냉전질서까지 다녀왔다. 그러는 사이에 샹송은 곧 다른 오페라로 바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치의 의해서 죽은 자신의 연인이자 동료인 스테핀에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빈이는 정말 슬픈 이야기라고 연신 뇌내였다.



살아남아 있는 것은 강한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죽어서 생긴 결과였다. 문든, 빈이와 이야기를 하다가 이 시대에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죽어간, 죽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시간을 내서 아동센터도 방문하고 아이들의 미래를 보는 사람이야~라는 위풍당당한 '잘난사람' 대열에 서서 돌아오는 '뿌듯함'으로 인생은 역시 보람있어!라는 위안을 할 때, 여전히 지하철에서 쓰레기를 분리하며 하루를 마감하는 우리 어머니들과 영하의 날씨도 아닌데 꽁꽁얼어 붙을 것 같은 저녁 비린내나는 생선을 정리하며 장을 마감하는 할머니의 주름가에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자기스스로 잘했다고 칭하는 사이에 '나는 강한자'가 되었고 '살아남은 자'가 되었고, 나름 글도 쓰고 철학자들도 강의하고 멋드러지게 말도하는데 왜 응암오거리를 걸어오면서 이렇게 슬픈 것인가? 30년전에 살았던 이 동네에서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인이와 빈이가 살고 있는 곳, 나는 무엇인가 책임을 느꼈고 가식같이 나를 둘러싼 삶의 패딩들을 벗어버리고 싶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생각나고 한나아렌트도 생각나고 쓸쓸한 가을에 생을 마감한 옛날 친구도 생각났다. 긍정이 넘치는 나의 인생 속에서 부정성은 항상 삶의 속도를 급격하게 줄이고, '잘 살고 있니?'라고 물어보는 오래된 친구 같았다.


"자 그럼 김수영의 시에서 바람은 무엇인지? 풀은 무엇을 대표할까?"라고 묻자 빈이는 풀의 속성과 바람의 모짐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내가 낸 문제에 기가 막히게 답변을 냈다. "그럼 김수영의 시에서 풀을 보통 민초라고 하는데, 민초들을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민트초코!!!



너무 웃껴서 말이 안나와서 한참을 웃고 서로 떠들고 밀치고 난리가 났다. 말은 된다. 말은! 민트초코라니 너무 웃겼다. 한바탕 신나게 웃고 나서 빈이와 70년대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 시가 읽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40년대 일제치하에서 이 시가 읽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고민해 보았다. "그럼 독재자들이 엄청 이 시를 없앨려고 노력했겠지요? 이건 정말 위험한 시인데요~이거 읽으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겠어요~" 빈이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독재의 역사와 시민들의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오늘 하루를 닫았다.


다음주에는 마찬가지로 수요일에 사회혁신포럼을 준비해야 하기에, 금요일 인이와 만나고 나서 빈이와는 불광역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빈이는 마치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했던 말을 생각해냈던지, 아니면 나의 투사인지 모르겠지만,


아~그럼 금요일이 너무 기다려지겠는데용



사람은 누군가의 기대를 먹으면서 산다. 허풍이나 교만이나 가식 가득한 질문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진정 기대하는 것으로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산다. 그래서 자기 혼자서 스스로를 정의내릴 수 없다. 우리는 서로가 있어야 정의되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서로 여우가 되어서 금요일이라는 어린왕자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8도보다 더 떨어진 6도의 바람이 칼날처럼 휘몰아치는 저녁길, 처음으로 빈이를 집에다 대려다 주고 집에 가는 길, 아까 했던 고민들이 온 마음과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 그래서 더 이상 행복이라는 것을 추구하지 않아도 일상이 되는 삶이면 좋겠는데 말이다.


내일부터 80%세일 행사가 진행되는지 5톤차량에서 짐을 내리는 분들의 한숨 섞인 표정을 스치면서 지나가는 6호선 새절역 근처에서 나는 그렇게 기쁘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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