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바람피는 것을 알아버리고, 자신이 알아 버린 걸 아내가 알아 버린 동훈은 상념에 쌓인다. 깨진 주먹을 어루만지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형들과 조기축구를 마치고 돌아오는 잠시, 지안을 스치면서 만난다. 10년이 지나도 동네에서 만나면 아는 척 할꺼라고 자기도 모를게 지껄였던 것이 생각나서 겸연적은 미소로 지나가는 동훈,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지안. 말그대로 동네에서 지나가다가 만나는 사이가 된 것. 그러니깐 10년후에도 아는척하려면 지금도 아는척 해야 하는데 말이다.
너 나 왜 좋아하는지 알아? 내가 불쌍해서야
"너가 불쌍하니까 너처럼 불쌍한 사람을 보면 좋아하는 감정처럼 느껴지는 거라고" 그러는 사이에 지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물어 본다. "아저씨는 그럼 왜 나한테 잘 해줬어요?" 뜨끔한 동훈에게 지안은 "마찬가지 아닌가?"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쓸쓸한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 되고, 불쌍한 사람은 다시 제자리에 서서 말한다. "우리는 둘다 자기가 불쌍해요" 불쌍한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를 애처로워 한다.
연민을 느끼고 가끔은 그게 사랑인줄 안다. 그런데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나서, 젊음이 지나거나 고통이 지나가서 '안 불쌍해지는 시간'이 찾아오면 그게 연민인줄 알게 된다. 그렇게 알게 되기 전까지, 연민은 매우 사랑과 비슷하게, 열정적인 사랑과 비슷하게 그 불쌍한 사람에게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진심이고 나의 인생을 다 주어도 그 사람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연민은 불쌍한 타인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에게 느끼는 감정이다. 그러나 타인이 잘되어가면 불쌍한 나만 외로워짐으로 스스로 떠나게 되는 것. 동훈과 지안은 그래서 서로에게 불안한지도 모른다. 둘다 불쌍해야만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는 존재라서. 로맨스가 아니라 존재의 외로움이라고 해야할까?
"너 나 왜 좋아하는지 알아?"
"우리는 둘다 자기가 불쌍해요"
전 빨리 그 나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인생이 덜 힘들꺼잖아요?
정희가 물어보는 말에 무심코 내뱉은 지안의 말. 주위를 둘러싼 동네 아저씨들은 이상하게 처다보더니 이내 그 속내를 알아보고 모른척해주고 걸어간다. 이내 생각을 깊숙히 하고 돌아온 정희는 팔짱을 끼고 지안과 함께 걷는다. 힘들었구나!라는 어정쩡한 말투가 아니라 모른척해주고 함께 걷는 것. 그래서 지안은 얼떨떨하게 자기가 매일 혼자 걸었던 길을 함께 걸어 간다. 혼자 걷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어떤 조건에 있더라도 외롭고 힘든 게 인생인데, 아무것도 없는대도 누군가 함께 걷고 있다는 것 때문에 삶의 희망이 생기기도 한다. 누군가 따뜻한 말 한마디, 팔짱한번, 인사 한번 해주는 것 때문에 인생의 다른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아이들에게는 진정한 어른이 필요하고, 청년들에게는 그래도 내가 그 나이가 되었을 때 괜찮을 것 같은 누군가 필요하다. 우리가 정말 잘 살아 왔다면, 누군가 내 뒷모습을 보고서 아 나도 저 길로 가볼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감사합니다
모두가 나서서 가족과 같이 어두운 길을 밝혀서 지안의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가는 사이에 지안은 겸연쩍지만 인사를 한다. "감사합니다" 동훈은 알아본다. 이걸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깐 이 친구의 마음이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연민이 아니라 사랑은, 강제적이지 않다. 연민은 그 사람을 그렇게 계속 놓고, 그 사람의 지위나 상황이 미래에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야만 가능한 감정인데 반해서, 사랑은 그 사람이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서 무엇인가 희망을 품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에 함께 그 자리에 있기로 일단 결정하는 의지이다. 그러니 사랑은 연민보다 속도가 빠르다.
함께 걷는 것 만으로도 꽁꽁 얼어 붙은 지안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쩌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화가 멀리끝까지 나고, 외로움이 동해바다 보더 더 깊은 수심으로 나를 대려갈 때, 그저 함께 속도를 맞추어 걷는 친구 한명만 있어도 무엇인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지안에게는 친구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조건들 때문에 자신을 정의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함께 걷는 친구. 그런 친구를 만났을 때 마음은 열리고 삶은 새로운 길로 걸어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친구. 같이 걷는 친구.
이제 동훈이 아니여도, 동네에서 만나서 자연스럽게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생겨났다. 이 넓은 세상에 혼자인줄 알았는데 함께 지내는 사람들 때문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지안의 미세한 표정과 떨림. 너무 자신의 과거에 매몰되면 현재는 기억의 궁전에 갖혀 버리고, 너무 현재를 잊어 버리고 미래를 위해서 살면, 미래라는터널에 갖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매물되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신비로 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와 눈빛을 가지게 된다. 불쌍한 사람들은 그렇게 조금씩 스스로가 불쌍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언제나 희망은 절망이 흩어져 있을 때 그 사이에 살고 있으니까, 절망을 너무 안탑까워 하지 말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