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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Sep 01. 2020

39-2

후반기를 지나면서 보이는 것들

0. 오랜만에 도착한 곳


어제 태어난 것 같은데 벌서 39-2를 지나고 있다. 언젠가 죽겠지?했는데 점점 성장호르몬이 사라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생각은 또렷해지는 것을 느낀다. 죽음이라는 것을 항상 가까이에서 보고 자랐는데, 막상 나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향기는 맡기가 싫은 것 같다. 살고 싶어서 매번 글을 남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한 지점에서 내가 느꼈던 숨결, 호흡, 향기, 냄새, 색감, 정취, 아름다움, 서러움, 아픔, 두려움들을 내려 놓는 것이 가벼운 마음으로 한발짝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오랜만에 속마음, 보이는 것들, 두려운 것들, 하고 있으면서 느끼는 생각들을 써보려고 한다.



1. 이제야 보는 것들_주름

 

인생을 39년 넘게 살다 보니깐 그 전에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가장 잘 보이는 건 사람들의 속 마음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보여지는 속마음을 이용해서 장사를 하거나 정치를 하거나, 이용해 먹거나 속이거나 하는데 보수적인 면이 있는 나는 신앙이 있고, 거짓말하면 동공지진부터 오는 부모님의 자식이라 그러기에도 힘들다. 흔히 마케터들이 '한문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을 때, U.C 버클리의 언어인지학자 죠지레이코프의 프레이밍 이론이나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론이나, 미쉘푸코의 체계점담화분석이나, 자크라캉의 욕망의 그래프를 가지고 충분히 분석하고 합성해서 무엇인가를 해볼 수 있겠지만 '할수 있음의 없음'을 선포한 상태라서 쉽게 '한문장'을 만들기가 힘들다.


힘든 것 같다. 속마음을 이용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일이.사람의 속마음이 보일 때 내 속마음을 꺼내서 맞추어 보는 일이.


진정성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캘시퍼'처럼 지지지익~하고 꺼져 갈 것만 같아서 불안불안하다. 세상살이가 힘들어지는 만큼, 의지할 사람이 없는 만큼, 속마음을 꺼내서 누군가에서 보여주고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은 것. 그러니깐 한번 꺼낼려고 치면 몇 단계의 방어기제를 뚫고서야 겨우 나오는 것이겠지. 진실을 말해야할 때,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소시오패스 같은 마인드패스가 되어가는 일상을 본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해야하지?라는 '우유부단함'의 경계에 서 있다.



나이가 40이면 불혹이라고 하는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40이면 불혹이라고 하는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들에 반응하는 나의 마음이 얼굴로 그대로 나타날 것이니깐 이제 되돌릴 수도 없다. 수 많은 세월을 흘러갔던 마음들이 겹겹히 쌓여서 주름이되고 그 주름을 타고 눈물이 흐르기도 하고 땀이 흐르기도 한다. 더 깊이 보일 수록 나의 마음도 더 깊이 내어 놓아야 한다. 그걸 내려놓지 않아서 얼굴과 속마음이 따로 노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끔은 영악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게슴츠레한 눈빛과 그에 맞는 음흉한 눈빛으로 남들을 흘겨보는 사람들도 보인다.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해서 얼굴과 마음이 뒤틀려 버렸을 때 나오는 주름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80정도되신 할아버지들의 인자한 주름이 보일 때도 있다. 그들의 주름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보조개처럼 보면 볼 수록 아름답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80년동안 저런 미소와 마음을 어떻게 유지했을까? 마음이 지나간 길로 삶의 고통도, 인생의 시름도 지나갔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아름다운 주름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내가? 불연듯 낯설다. 항상 이런 삶을 꿈꾸었는데 지금은 가끔 생각나는 수준이라니.



2. 두려운 것들


사실 '명예'가 중요한지 전에는 미처 몰랐다.


사실 '명예'가 중요한지 전에는 미처 몰랐다. 어른들이라고 부르는 나와 차이가 나는 분들이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정받고 있는지 너무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서 허례의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가 않다. 두려운 것들은 내가 그렇게 행동할까봐서가 아니라 나이가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가지지 못한 것들은 가진 것들보다 귀중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로 가지고 싶은 것들을 바꾸려고 하는 것.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은 '젊음'이 아닐까? 젊은 시절에는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라는 젊음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무엇이든 가질 수 있지만 가질 수 없는 것은 '젊음'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년 전부터 '젊음을 질투'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이상하게, 지나치게, 심심치 않게 젊은이들에게 짜증을 내고 계획을 틀어 버리고, 윽박지르면서 그들의 기죽어하는 모습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을 만난다. 처음에는 그들의 심보가 고약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 그리고 가끔 사색에 젖어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무엇인가를 그려내는 것을 보면서 깨달았다. 그들은 젊은 시절의 자기였다면 이렇게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내가 지금 가진 지식과 열정과 지혜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아예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깐 '나때는 말이야~'라던지 '내가 젊었을 때는~'이 자주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음을 질투하고 있을 것이다. 질투까지는 아니여도, 시기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러니깐 이러한 인생의 구조는 잘 빠져나갈 수 없다. 내가 안 늙을 수가 없고, 이 젊음이 유지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데 그것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생과 문명과 역사의 큰 구조이다. 남는 것은 결국 자신이 그 젊은 시절 언제쯤 했던 '영광스러운 일들'이겠다. 그럼 지금 내 앞에 있는 '자리', '위치', '담당해야할 일', '칭찬'에 목을 멜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두렵다. 나는 지금은 조금은 젊지만 이제 곧 젊음을 부러워할 나이를 지나서, 질투를 하는 나이가 올 것이다. 그럼 그 나이가 되었을 때, 질투하지 않는 사람이 될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의 젊은 시절을 시간과 공간들을 어떻게 지나가야 할까? 나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이런 두려움들이 있다. 이렇게 쓰다가 문득, '두려움의 반대가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생각은 계속해서 발전해 간다.


이렇게 쓰다가 문득,
'두려움의 반대가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젊은 시절에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 없던 순간에 더욱 사랑한다면, 시간이 흘렀을 때 나의 기억에는 아쉬움 보다는 아름다움과 훈훈함과 '이전에 행했던 어떤 사랑'의 결과가 남지 않을까? 그랬을 때 젊은이들을 보면 오히려 나는 그들의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역사의 저편으로, 인생의 가장자리로 자연스럽게 물러나지 않을까? 명예욕은 사실 인생의 중심에 서고자 하는 욕구의 다른 이름이니깐.


브래드피트의 '흐르는 강물처럼'



0. 다시 흘러가야할 때


잠시 멈춰서 생각해보았지만 눈물이 앞을 가린다. 지금이라도 나의 인생이 사랑에 달려 있다는 듯이 온 힘을 집중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아주 잘, 멈춰섰던 것 같다.


한가지, 요즘 생각하는 것만 남겨야 겠다. 요즘은 '이미지 인문학'을 읽고 있다.


진중권의 미학강의는 최고다. 정치논평과는 다르다.

 

자연과 분리된 인간은 처음에는 자연을 모사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곧 문자를 발명해서 자연을 표현했고, 어느정도 지나자 자연을 숫자로 분석했다. 그리고 그런 관점을 가지고 이미지와 문자와 숫자를 합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원래 하나였던 것들을 다른 관점들로 쪼개고 분할해서 다시 합성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생명이 사라지고 어느 것이 기능적으로, 부분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시간이 지나자 원래 인간은 생명이 없었고 원래 기능도 우연히 생긴것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제 남은 것은 가상과 미래다. 마르크스가 틀렸다. 세계를 해석하기보다 변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외쳤지만,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세계는 가상이 현실이 되는 파타피직스의 세계가 될 것이다. 나의 고민은 이런 파타피지컬한 세계에서 인간이란 무엇이고, 신앙이란, 삶이란,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밝혀내고 발명해내는 길이겠다. 빌렘 플루서와 헤겔의 싸움을 관조하는 한병철(피로사회, 심리정치)은 이 둘 모두를 부정하면서 '프로젝트'로 변화하는 인간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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