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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Oct 07. 2020

자유는 상대방 때문에 생겨나는 것

로마서 6장_메시지 성경

내가 이처럼 '자유'를 들어 말하는 것은, 쉽게 우리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지 않습니까? 과거에 자기 마음대로-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은 안중에 두지 않고서-살았을 때, 어떻게 여러분의 삶이 더 나빠지고 오히려 자유에서 멀어져 갔던지를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자유 가운데 사는 여러분의 삶, 거룩함으로 치유받고 드넓어진 여러분의 삶은 얼마나 다릅니까?

 _ 로마서 6장, 메시시 성경


자유를 가끔 착각할 때가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치환해 버리면 걸리적 거리는게 많아지는데, 특히 다른 사람의 존재가 그렇다. 왜냐하면 나처럼 타인도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 역시 자유를 마음대로 활용해서 모든 것을 하고 싶을 테니깐 말이다. 그래서 자유끼리 서로 싸우지 말라고 만든 발명품이 '권리'였고, 그 권리는 '책임'이라는 한계 안에서 발생한다고들 말해왔다. 그리고 그 책임은 '민족국가'가 만들어지던 시기에는 '법'으로 공표되어 법에 정해진 책임과 한계 내애서 자유를 실현해 가는 '근대적 국가'가 만들어졌다.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나니 시스템 안에서 생성되는 코드는 항상 그 시스템을 넘어서지 못했다. 



법에 빗대에 사람을 보는, 법에 비추어 자유를 만들어 내는 방식은 한스켈젠에 의하면 그 원인과 원인과 원인으로 가보면 '텅 비어 있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깐 법의 근원이 어디인가 곰곰히 생각해보고, 기원을 찾아보면 사실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소와 홉스와 로크는 '사회계약'이라는 당시 사람들의 합의를 모아서 '빈칸'을 채우는 방식으로 자유를 만들어 냈다. 그러고 나니 발생하는 문제는 '현실의 변화'가 생길 수록 법도 수정해야 했고, 그 수정한 만큼 책임과 한계도 달려져 갔던 것이다. 그래서 국가마다 자유의 한계가 달라지고, 사회발전의 속도에 따라서 그 범위가 달라졌다.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이러한 원인으로 자유의 경합은 전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지하드와 맥도날드의 싸움이 벌어지고(민족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싸움), 사회적 분쟁이 내전으로 발생하고, 성차에 의한 정체성 정치가 나타나고, 인종차별과 대량학살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근원적으로 '자유'를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내는 방식은 항상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들이 존재해왔다. 최근까지는 법이었지만, 곧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생각을 조종하는 아키텍쳐들이 등장했다. 소위 말하는 인플루언서들 혹은 기획자들이 영화 관상의 '한명회'처럼 복선을 씨줄과 날줄로 여러겹 깔아 놓았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자유란 무엇일까? 우리 시대의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원한 진리가 현실의 '합의'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용할까? 기독교 현실주의는 모든 삶의 형식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한다고 생각한 반면, 기독교 성경주의는 '원리'에서 하나님의 방식은 그치고 그 원리를 실행하는 차원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관점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만나고 그 안에서 수만가지로 분화된 '자유'와 같은 개념들이 떠오르면서 '해석의 갈등'이 '해석의 마비'를 가지고 왔다. 말씀은 그 자체로 화석화 되어 가는 듯했다. 그리고 곧 해석의 마비현상을 깨우질 '해석의 소유자'들이 목사가 되기도 하고, 책을 쓰는 작가가 되기도 하고, 연구원이 되기도 하면서 소위 말하는 '담롬'을 형성해 내었다. 


그 담론이 보수적이면 '낙태 반대, 동성애 반대'와 같은 코드로 사람들을 인도했고, 진보적이면 '사랑으로 용납하기, 다시 생각하기, 다름과 동행하기'와 같은 코드로 사람들을 계몽하려고 했다. 그리고 담론은 항상 그 태동자체부터 찬성과 반대가 있고, 그것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있기 마련이기에 싸움은 더욱 심각해져 갔다. 그 싸움이 한 쪽에서는 광화문에서 소리를 높이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시청 앞에서 깃발을 들게 만들었다. 장황하지만 '자유'를 생각할 때 '해석의 마비'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나만 그런 건 아니것 같아서 끄적이고 있다. 





나도 글을 쓰면서 '해석을 담론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렵기도 하다. 이렇게 쓰면서 내가 더욱 단단해져서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현실의 문제를 외면할까봐서. 그런데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것은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깐 오늘 주제인 '자유'에 대해서도 이러한 확실한 터 위에서 생각해보면 조금은 말끔해지는 부분이 있다. 내가 자유를 행할 때 '권리'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개념에서 자유를 접근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할 수 없으니깐 합의하자'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지만 상대방을 생각하기 때문에 안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기는 것이다. 


한병철의 말처럼 '할 수 있음의 없음'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할 수 밖에 없으니깐 해야한다'는 사실 자유가 아니라 부자유적인 복종이다. 그러나 '할 수 있지만, 스스로 선택해서 하지 않는 것'은 자유의 한 측면이다. 더욱이, '선악과를 따 먹을 수 있지만 따먹지 않음'은 자유의 한 측면이고 '보기에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지라'라는 것은 '욕망에 의한 강제'가 발생한 것이다. 무엇에 대하여서, 마주해서 '자유'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하지 않는 것은 나의 자유를 더욱 증진시킨다.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누리기 위해서 권리를 사용하는 것은 '더 누린다'라는 의무나 욕구의 강제 때문에 자유가 축소되어 버린다. 


아담도 그렇다. 선악과를 따 먹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와가 주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아담의 자유'는 붕괴되어 버렸다. 하와는 '뱀이 주어서'라는 부분에서, 순간일지로도 그 당시의 주인은 뱀이 었다는 것을, 자유의 주체는 뱀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도 안다.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빙빙돌려서 알고 있는 지식을 자랑스레 써 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서 오는 착각. 수 많은 여담 사이에도 한가지는 확실하다. '자유는 다른 사람과 있을 때 발생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것들과 하지 않을 것들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를 처벌할 수도 있지만 하지 않음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무한한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직접 십자가에서 그러고 계셔서, 자유로 십자가를 선택하셔서 오르신 그 손길에 마음의 무너져 내린다. 다른 사람과 권리와 한계로 만들어진 마음의 장벽들이 성소의 휘장처럼 찢겨져 내리고, 나의 마음이 속살이 보인다. '사랑이다' 사람은 사랑으로 만들어졌고, 지금도 사랑으로 유지되며, 사랑의 의해서 자유가 증진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의 자유가 증가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자유를 더욱 증진시킨다. 하이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선물거래 옵션이 아니라 하이리스크 하이 '러브'가 된다. 이렇게 말하고서 참 힘들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도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내가 오늘 구해야 할 것은 결국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 마음 속에 한없이 내려주시기를 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자유 가운데 사는 여러분의 삶, 거룩함으로 치유받고 드넓어진 여러분의 삶은 얼마나 다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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