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성경_예언서 머릿말
예언자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정화시켜 준다. 어떻게 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그 동안 세상이 우리에게 심어 놓은 생각들을 일소해 준다. 미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분께서는 이미 말씀해 주셨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간단하다. 이웃에게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베풀고 사랑에 충실하며, 자신을 중심에 두지 말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면 된다" 미가서 6장 8절
기본적으로 예언자들이 행하는 일은 두 가지다. 먼저, 현실로 닥친 최악의 상항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이게 해주었다. 최악의 상황으로만 보았던 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볼 줄 알게 되면, 이제 우리는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선의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판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아니다. 사실은 최선의 상황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결국 세상과 우리를 바로잡아 주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예언자들이 한 일은, 기진맥진해 쓰러진 자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이 열어 주실 미래를 향해 다시 걸어가도록 용기를 북돋은 것이었다. 예언자들이 포로 생활과 죽음과 수치와 죄라는 총체적 파멸 한 가운데에서 다시금 희망의 횃불을 들었고, 하나님께서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하고 계신 새로운 구원의 역사에 사람들을 동참시켰다.
살면서 우리가 아주 일찍부터 갖게 되는 나쁜습관이 있는데, 사물이나 사람을 성과 속으로 이분하는 것이다. 우리는 직업생활, 시간관리, 오락, 정치, 사회생활 등을 '속된 일'로 여기고, 우리에게 얼마간 재량권이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예배와 성경, 천국과 지옥, 교회와 기도 같은 것들은 '성스러운 일'이며, 하나님을 위해 일정한 자리를 내어 드리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겉보기에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 같지만, 이것은 사실 하나님을 일정한 자리에 한정시키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우리 멋대로 하겠다는 속셈에 지나지 않는다.
예언자들은 이런 시도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일이 성스러운 영역 안에 있다고 역설한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전 영역을 다스릴 권한을 가지신 분이다. 이른바 사적영역이라는 우리의 감정과 가정생활을 비롯해, 돈을 벌고 쓰는 방식, 채택하는 정치형태, 전쟁, 재난, 우리가 해를 입히는 사람, 도움을 주는 사람 등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무시하거나, 그 분의 통치 영역을 벗어나 있거나, 그분의 목적과 무관한 것은 없다. 그 분은 "거룩, 거룩, 거룩"하신 분이다.
메시시 성경_예언서 머릿말
얼마전 월터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그것은 예언자들이 가지고 있던 '상상력'은 현실과 상황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로 생생하고 의지적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특히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환상을 본 그발 강가에서의 35세의 에스겔의 상상력이란, 청년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멋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모세의 상상력은 압제당하는 이스라엘이 애굽이라는 제국의 기나긴 통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독특하고도 새로운 모험을 보게 했다. 그 뿐 아니라 다니엘이나 이사야나 하박국이나 미가나 모두 '상상력 공동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상상력으로 하나님이 하실 공간을 미래에 열어 놓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유진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묵상을 하고 있다. 오늘은 너무 신약만 편식하는 것 같아서, 예언서를 집어들고 묵상을 시작하려는데,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머릿말이 기가 막힌다. 예언서 전체의 흐름과 독특한 점 그리고 주의해야할 점들이 모두 들어 있다. 아침에 읽으면서 많은 생각에 잠긴다. 몇가지 적어보면.
1. 21세기를 지나가는 우리의 신앙은 정치적포퓰리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더욱더 '성과 속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신앙'으로 치닫고 있다. 이것은 두려움의 시작이면서 위험한 것들을 회피하는 방어기제이다.
2.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시지만 최근들어서 일어나는 재앙?과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입장이신지 잘 모른다. 사실 이건 신학적, 성경적으로 해석하려고 해도 유명한 목사, 교수들의 이야기와 해석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예언자들처럼 기도하고 상상력을 펼치는 것보다는 논리적으로 내가 수긍할 수 있는 것만 찾게 된다.
3. 우리가 사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질서에서는 '자본'이 내일의 안정과 전망을 준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맘몬'은 실제로 우리의 실재를 사로 잡고 구조화시키고 있다. 이 상황에서 내일을 위한 상상력이란 돈없고 빽없는 이들에게는 몽상에 불과하게 만들어 버렸다.
4. 그리스도인들이 최근들어서 더욱 소유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는데, 위에서 본 것과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구조가 주는 안정감에 동화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오히려 우리 시대에는 콜로세움에서 사자밥이 되는 것이 두려운게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축소하고 자신이 대장되는 삶 자체게 행복이라고 느끼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둘 다 신앙을 포기하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5. 현실 기독교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된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많은 것들을 믿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 빨갱이라고 하는 보구 기독교들은 오히려 그 중심에서는 '유물론'(물질이 이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괴델의 '무모순시스템은 스스로 무모순을 증명할 수 없다'와 같이, 자신들 안에 공산주의 요소가 없으면 공산주의를 비판할 수 없다.
6.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문제가 생기면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책임전가'하는 형태가 된다. 그러니 이 세상이 더 악해지고 나빠진다고 할 때, 그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된다. 그렇게 비판하는 바리새인이 되는 것이다.
7. 다시 예언자적 상상력을. 가질 때가 왔다. 우리는 모두 예언자고 생각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삶 속에서 매번 새로운 삶, 박스를 넘어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실재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가슴이 뛰기 시작하고, '아 저사람처럼 살아보고 싶다'라고 느끼는 삶. 그럴려면 필수적으로 이 구조와 싸울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전문성을 가진 영역에서는 더욱 치열할 수 밖에 없다. 그 이야기는 '소명과 직업'에 대한 접근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8.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라고 할 수 있는 예언자들의 삶과 외침이 필요하다.
9. 지금 우리가 시작할 수 있다.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예언자적 상상력'을 회복해야 한다.
10. 데이브니어(이대귀선배)의 '예언자들'을 공유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예언자들
예언자들의 심장이 울리고그들의 거친 선언이 온 땅에 퍼진다
영혼 가득히 담겨진 메시지를 하나 둘씩 펼친다
주의 공의가 무너진 곳에서 그들의 깃발 들고서 온 땅에 외친다
그의 말씀이 부어진 예언자가 탄식하며 외친다
외치는 자여 그대 두려워 말라
그대가 외친 선포와 선언들은
하나님 나라의 위엄과 영광을 가득 드러낸다
우린 모두 숨어있는 일상 속의 예언자들
우리들의 삶과 말과 글이 그 나라의 정의 드러내고 만다
삶이 묻어난 예배를 말했던가
이제는 진정 삶으로 보여줄 그 시간
거짓 예배와 왜곡된 메시지는 거절하기로 한다
정의가 깨진 바로 그 곳에서
억울한 자의 탄성이 하늘에 퍼질 때
우리 드렸던 예배의 진정성이 시험대에 오른다
세상속에서 분투와 고전 중인 예언자들아
그가 널 부르시니 은혜와 평화의 그 나라 소식을 더욱 외치어라
우린 모두 숨어 있는 일상 속의 예언자들
우리들의 삶과 말과 글이 그 나라의 정의 드러내고 만다
예언자들아 지금 일어나 네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yJu_4ZT3d1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