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쌓였던 기억들이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시간
오랜만에 새벽이다. 우두커니 앉아서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다. 눈동자는 게슴츠레 뜰듯말듯하고 적당히 바깥의 바람이느껴지는 새벽이다. 새벽의 오만 잡다한 것들이 도라에몽 가방에서 나오는 것 같다. 머리속에 오늘 하루 만났던 사람들, 잠시 스쳐갔던 생각들, 서운한 감정들, 미안한 마음들, 행복의 표면에 살짝 미끄러져 갔던 것들이 다 몰려 나온 마당에서 춤추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났다. 자신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의 경험을 도배해 버리는 사람, 사람들. 무엇이 그렇게 맞다고 확신하는지 모르지만 남들보다 우월한 감정에 지적 유희를 즐기고 있는 사람의 경험에서부터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듯 빠르게 말을 뱉어내는 사람의 표정까지. 말로도 도배하고, 경험으로도 도배하고, 목소리로도 도배하고, 얼굴표정으로도 도배한다. 여백의 미는 참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하루는 말을 더욱 아꼈던 것 같다. 나도 안다'라고 말하고 싶어서 말이다.
살아오면서 몇 가지 싫은 유형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에서 내가 조금은 증오심을 가지고 보는 사람들은 '자기도 안하면서 남도 못하게 하는 사람'이다. 보통은 자기가 하면서 남을 못하게 하거나, 자기는 안하면서 남을 하게 하는데, 이 사람들은 '자기도 안하면서 남도 못하게 한다' 그것이 말이든, 혁신이든, 도전이든, 싸움이든. 그런 사람들 곁에서 하루종일 있었더니 전지적 무능력 시점에서 살다온 것 같았다. 그러면서 그런 사람들은 왜 그렇게 살게 되었을까?라며 그 사람의 방어기제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어릴적의 환경도, 자라오면서 친구들과의 관계도, 성장해서 맞이하게되니 일의 방식도 모두 그 사람이 경험하고 나름대로 해석한 것들이다. 그런데 유독 '남도 못하게 하고, 자신도 안하는 사람들'은 방어기제가 잘 안보인다. 한 세겹 정도는 파고 들어봐야 알게 되는 내면의 공간을 본다. '부족한 것'들을 채우기보다는 있는 것을 지키려는 그 사람들의 행동에서 나는 어떤 것을 보았을까? 나의 모습을 보았던 걸까? 그럼 그 나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인가 아니면 과거의 모습인가? 이런 혼란한 생각들이 춤을 추는 사이에 시간은 점점 흘러가서 새벽을 더 나이먹게 만든다.
오래된 새벽이다.
원래 오래전에 이런 시간을 가졌어야 했는데, 가지지 못하고 묵혀두었던 오래된 새벽. 삼라만상이 춤을 추고 마음에서는 빛이 조명처럼 비추었다가 사라졌다가 한다. 달도 떠서 기울었다가 다시 그뭄달이 되었다가 한다. 오래된 새벽에 오래된 기억들이 일어나서 악수를 건넨다. 내가 만났어야할 새벽인데 이제야 만났기 때문에 그 때의 서운함과 미안함 그리고 그리움이 묻어나는 시간들이다.
왜 어릴적에 경험했던 것들은 그렇게도 오래가는 걸까? 어릴적에 먹었던 것, 어릴적에 만났던 사람들, 어릴적에 만들어진 습관들, 어릴적에 공부했던 것들은 그리도 오래가는 걸까? 오래된 습관들은 그런데 왜 오래된 새벽에는 드러나지 않는걸까? 이건 의식의 작용일까 아니면 무의식의 작용일까? 마흔이 되어가는 나이에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문제들이 있고, '아 그 때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 이런 생각들이 묵은지 김치처럼 잊을만하면 생각난다.
12살 때까지 살았던 산동네에는 비탈길을 내려오는 어귀에 우리 집이 있었다. 길보다 낮은 천장을 가진 우리집은 마치 천장에 창문이 나 있는 집들처럼 창문이 하나 있었다. 어느 예술가의 집과 같은 느낌이 아니라 약간 유령의 집에 나오는 그런 빛이 비추는데 누군가 서 있는 것 같은 작은방에서 나는 자랐다. 새벽이 되면 누군가 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 새벽들이 쌓이니깐 가위가 눌렸다. 한참을 가위가 눌리다가 어느순간 그것이 없어졌는데 생각해보니 이사를 와서 그런것 같기도 하다. 자가 방에서 쥐가 나오기도 하고, 지네나 벌레들은 항상 득실 거렸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가난은 오래된 새벽에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어떤 사람들과 걷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면 사람들이 행복할지를 생각하는 것의 단서 말이다.
한겨울은 더 춥고 한 여름은 더 더웠다. 추위와 더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겨울에는 상수도와 하수도가가 얼어 붙고 여름에는 벌레들이 정글처럼 우글우글 거렸다는 것이다. 조그만 언덕만 넘어가면 감옥에나 가 있을 전직 대통령들 둘이 거대한 저택에서 기생하면서 살고 있었지만 산동네의 삶은 0.5평인데도 전쟁과 같은 인구밀도 때문인지 항상 자극에 노출되어 있었다. 물리적인 노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나의 정체성'이 형성되어가는 지점에서 사회적으로 주어진 나를 정의하기에는 계절과 장소가 주는 입김이 너무 컸다. 그러다가 새벽이 오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로운 희망이 가슴 속에서 솟아 올랐다. 어리릴적부터 어머니의 장난처럼 '내일 너네 진짜 엄마가 태우러 올꺼야. 다리 밑에서 주워왔으니깐, 다리 밑에 버리니 너네 부자 엄마가.' 하신 말씀이 진짜인 줄 알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은 것처럼. 소중한 기억은 아니더라도, 이런 기억들을 초라하거나, 누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나이. 나는 오래된 새벽을 들쳐내고 있었다.
인생의 어둠이 몰아내려서 막막한 삶의 커튼처럼 드리울 때 '아직 아침이 되지 않았다. 새벽 어스름 동틀 무렵의 가장 깊은 어두움이 있는 법이다'라고 하면서 혼자서 나 자신을 가늠해 보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났을까? '다시 깨어나야 한다. 밝은 아침이 다가왔으니, 이제 이불을 개고 일어나야 한다'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이제 정오의 햇빛이 따갑게 쬐이는 시기가 왔다는 생각이 든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 어른들이 그렇게 말했던 불혹이 얼굴의 주름을 남기고 스쳐간다. 나는 이제 따가운 햇볕을 응시하면서 책임져야 할 사람들과 풀어야할 역사적 과제 앞에 서 있다. 아무도 시키지 않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지만. 그 옛날 오래된 새벽에 고이 간직했던 자신과의 약속, 그리고 쉽게 지나치지 못해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라며 뒷걸음질 쳤던 이들에게 응답할 때가 다가오는 듯하다.
새벽에는 눈물이 많아진다. 오래된 새벽을 꺼내놓은 지금도 그렇다. 다시 이 새벽의 느낌을 꺼내기까지 열심히 달리다가 멈춰섰을 때가 오겠지. 그 때는 50일지 60일지 모르겠지만, 새벽마다 다짐했던 것들이 어느정도는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끄적이다 보니 이렇게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