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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Dec 17. 2020

도망가자

도망가고 싶은 늦은 저녁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벌써 늦은 저녁이다. 새들이 벌판에서 무엇인가를 듣고 날아가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간은 반쯤가려진 커튼 사이로 언제나 자기자신을 숨겨 놓고서 산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날 때는 그 반만 내 보이고서는 이게 마치 자기 모습인 것처럼 화려한 척, 도도한 척, 있는 척을 한다. 그게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의식이 있고 정신이 있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에서 자신의 욕망으로 굳이 현실을 빚어내려고 하지 않으니깐 그렇게 된거라고 생각한다. 


정신이 혼미할 때는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것 처럼 보이다가, 정신의 지평선 위에 커다란 보름달 같은 지성의 빛이 떠오르면 어느덧 나의 과거의 선택들이 낮낮이 보이는 것 같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했던 선택들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의 절반을 얻어 오고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으로부터 나머지 반을 얻어 온다. 나이가 먹으면서 자신이 결정해지는 것이 많아지면서, 조금씩 생각한대로 살지 않고 결정한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조금더 울리가 어렸을 때는 어떤 생각을 붙잡고 살면서 그게 나라고 생각한다. 아직 결정하지 않은 여백의 공간에 그런대로 희망을 쏟아 붓고 살다고 그 여백이 자신의 결정으로 채워지면서는 대부분 아쉬워 하면서 산다.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그렇게 살고싶었지만 한번도 그렇게 살지 않았던 삶을 살고 싶다. 


주위에 보면 다른 사람보다 한 30년은 먼저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같은 나이인데도 벌써 30년은 족히 넘는 세월을 살았던 것 만큼 경험이 축적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살아보지 못하고선 살아본 것 같은 패턴을 발견하는 이들이지만 이러는 사람들도 몇가지로 갈래로 나누어진 길을 간다. 자신의 문맥에서 펼쳐진 패턴만 보고 그 패턴을 만들어내는 한땀 한땀의 선택을 못보는 사람도 있고, 그 선택을 보았지만 다시 패턴속에 숨는 사람도 있다. 물론 간혹가다가 패턴 자체가 바뀌는 시점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 그런 사람들의 말은 그 당시에는 듣기 거북하거나 허황대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말이 맞아 들어가는 기분이란. 가끔이 내가 그러고 있는 거


어떤 때는 열정가득한 단어들을 떠올리다가, 또 풀이 죽어 우울한 단어들이 영혼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한줄 한줄 잘 배열되어 있던 문장들이 서로 싸우더니 흩어져서 같은 단어들로 다른 문장을 만들어 버린다. 우울함은 무력감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을 때 우리 영혼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내던지는 방어기제이다. 열정가득한 단어들이 모이는 때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우연히도 다른 세계가 열릴 때이다. 어릴 때는 우연을 많이 믿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연보다는 필연을 더 믿게 되었다. 그러나 단어들이 서로 서로 연결되지 않은 공백에서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 등장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이 공백에서 어떤 사람들을 찾아보는 동안 친구들은 대부분 필연에 압도당했고, 우연을 더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공백을 이어주는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 단어가 되기도 했고, 서술어가 되거나 목적어가 되었다. '주어'는 비록 시간이나 역사 같은 큰 것들이지만, 그 다음에 오는 문법의 순간들은 누군가가 담당하고 있었다. 이 누군가를 사람들은 위인, 천재, 딴따라, 미치광이, 시대를 잘못만난 사람이라고 불렀다. 사실은 모두가 그런 여백의 주인공이었지만, 필연을 역사로 이해한 사람들은 여백에서 뛰쳐나온 이들을 대부분 질식시켰다. 


때론 도망가고 싶다. 아무 생각없이 걱정없이 무엇을 해야한다는 소명감없이 살고 싶다. 고민도 염려도, 삶의 의미를 곱씹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그 순간으로 도망가고 싶다. 누구나 그렇겠지. 그 순간으로 떠니지 못하는 이유는 다시 이 무거운 현실로 돌아와야 하니깐. 때로는 울어도 가슴이 후련하지 않고, 쓴웃음으로 몇시간씩 버텨야 하는 현실로 다시 돌아오는 그 시차가 적응이 안될 테니깐. 한 없이 깊어지고 즐거워져도 다시 이 악몽같은 현실로 돌아와야 하니깐. 친구들은 말한다. 그만좀 우울해하라고. 그런데 그게 안된다. 진찌 지옥을 살았던 순간들과 아직도 내일에 태양이 뜨지 않는 이들의 삶에 연결되는 순간. 나는 이 우울함을 떠날 수 없다. 도망갈 수 없다. 갖혀버린 것 같다. 한참을 울고 또 뜬 눈으로 밤을 새고 나면 새들이 퍼드드득 하고 날아간다. 정신이 번쩍 들고, 도망갈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 그 공백을 채우고 만드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음악으로는 즐길 수 있겠지. 도망가자. 



https://www.youtube.com/watch?v=GOS6C2jXTa8&list=RDKsznX5j2oQ0&index=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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