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예멘 난민과 관련된 문제가 있었는 데 그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제주도에서 인권담당교육을 하던 지인의 말이다. "오히려 제주도민들은 예멘 난민들과 함께 살아갈 궁리를 했고, 서로서로 일자리를 제공하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일에 개입되어 있지 않은 타자들이 이 상황을 나와 너가 아니라 나와 너희로, 더 나아가 나와 그것으로 갈라 놓았다."라고 말이다. 평화로운 제주도에서 난민들과 함께 살아가려고 했던 제주도민들의 뜻보다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여론몰이는 난민과 제주도민을 나누어 놓았고 결국 지금은 건너지 못한 강을 건넌 것처럼 아예 보이지도 않는 문제로 사라져 버렸다.
과연 무엇이 그들을 갈라놓았던 것일까? 보편성과 근대화, 개인주의와 국가주의, 안보논쟁과 정치화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이 떠오른다. "우리 일자리가 뺏았긴다"거나 "이슬람교도들이나 아프리카인들이 오면 우리의 생명에 위협이 된다. 우리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라는 위험명제들을 가지고 여론몰이를 하던 사람들의 이면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었을까? 의도적인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 다양한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 있지만 오늘은 코펜하겐학파의 관점에서 안보화의 단계를 알아보면서그것이 난민문제와 어떻게 연결되고 폭력적인 위상을 갖는지 살펴보자를 이를 기반으로 앞으로 그럼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지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같이 살아갈 궁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대안을 찾으려고 할 것이고, 분리시켜서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하고만 잘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제와 혐오가 편한 선택지일 것이다.
1. 난민과 안보 이론
1970년대 미국과 소련의 '데땅뜨'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어낸다. 미소분쟁의 화해라고 이야기되는 이 시점에서는 '국가안보' 이론의 변화가 경제/문화/사회 등 세분화된 안보문제로 발전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기존의 냉전이라는 프레임만을 염두해둔 국가안보이론보다는 공산주의 이후, 독립국가들의 등장으로 인해서 새로운 형태의 안보이론이 등장한다. 특히, 새로운 국가의 탄생은 언제나 그렇지만 새로운 경계에 들어간 사람과 바깥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난민들의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배경에서 미국의 경우, 데탕트 이후에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안보적인 이슈가 발생하지 않도록 통제하려는 목적이 매우 강하였고, 안보와 연결된 경제적인 불안정성을 만들지 않도록 유도하는 것이 국제정치 전략의 주요한 핵심이 된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미국에서 미국식 세계관을 무장하기 위한 '헐리웃 문화'는 체제 안정성과 안보에 대한 미국식 자유주의의 일정한 세계관을 제시하고 확산했다. 파급력에 있어서는 특히 미국이 생각하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산하기 위한 지정학적 위차에 있는 아시아 지역에 문화적 전략의 형태로 전해졌다.
2000년대가 막 넘어간 시점에서 일어난 911테러는 '안보화'에 대한 새로운 위험성을 제시했다. 무슬림세력이나 민족주의진영에서 발흥한 테러조직이 국제이주자 조직으로 위장하여 테러에 가담할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따라서 국가 안보에 국제이주, 난민/이주민 네트워크가 중요한 주제로 부상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세계무역빌딩이 무너진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사회에서는 일상적인 공간 안에 테러범이 숨어있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이주와 난민에 대한 문제를 '안보이슈'로 변화시켰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9.11이후에 무슬림 테러범들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타문화와 타인, 타자에 대한 경계는 의심을 넘어서 확신으로 나아가는 것을 '헐리우드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2. 인간안보와 코펜하겐 학파
국제개발협력의 관점에서 보면 제 3세계 국가들에게 이루어지는 다양한 개발사업은 어떤 역설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개발이 오히려 인간의 안정적 삶을 파괴하는 현상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개발이 진행됨에 따라서 개발을 받는 수원국의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인권의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욕구의 증가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수원국의 주민들은 개발이 진행됨에 따라서 자신들이 처한 인권상황과 인간개발의 문제를 요구하게 되고, 이것이 과격해지면 시위나 내전, 집단적인 난민사태로 발전하는 '인간 안보'의 문제가 된다. 개발의 진행으로 역설적인 효과들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간 국가중심의 지원과 주도하에 진행된 개발 정책이 실제 현장 중심의 지원과 보호 정책으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이론상으로 혹은 기본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던 난민과 이주민 문제도 기존 법제도 차원에서의 논의가 '인간 안보;의 관점으로 이행하게 된다.
난민과 이주민과 연결된 안보의 문제는 단지 원조와 개발이 이루어지는 수원국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난민과 이주민들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도착하는 국가들에게서도 발생하게 된다. 난민을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와 난민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에 따라서 대처방법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논의가 된다. 이러한 논의에 대해서
코펜하겐 학파의 사회안보 개념은 다음과 같다. 먼저 안보의 영역을 5가지 영역으로 나눈다. 기존의 전통적 안보이론은 군사적인 영역에서 안보개념을 주로 다루어왔다면, 코펜하겐 학파에서는 군사영역을 포함한 정치, 경제, 사회, 환경 영역으로 확장하여 안보영역이 구성된다. 안보대상도 군사적인 영역에서는 기존부터 다루어왔던 국가나 정치체제를 다루는 것은 것은 물론 주권, 국가이념, 국민경제, 삶의 질, 집단정체성, 생명과 문명 보존과 같은 다양한 대상들이 규정된다. 특히 난민문제와 관련해서 주목하게 되는 주요한 내용은 사회 영역에서 안보대상을 상정할 때 '집단정책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안보에 대해서 생각할 때 사회적으로 '집단의 정체성'을 위협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주민이나 난민 같은 인구이동으로 인한 사회 내부 변화는 사회영역의 '집단정체성'의 차원에서 안전을 뒤훈드는 '위협'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다양한 대응이나 반응이 발생하는데 국경통제나 성원권 논쟁, 정체성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국가안보라는 하나의 층위가 아니라, 중층적 층위에서 구성되는 이슈들이 발생하게 된다.
여기서 생각해야 하는 중요한 점은 객관적이고 실체적인 생명의 위협이 아니라 '언술행위speech act'가 구성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협'이라고 간주되면 '안보문제'로 승격이 된다는 발상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으로 언술에 의해서 형성되는 집단정체성은 실체적 위협이 아니어도 사회적인 다름에 대한 언술행위들, 담론들의 결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이 이미 만들어진 사회에서는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위협으로 간주하고 공유하고 표현하는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사회적인 의사소통 과정에서 변화 무쌍하게 전개되는 안보의 문제는 새로운 측면에서 전개되는데 코펜하겐학파는 '안보의 두 단계'로 정리하고 있다.
3. 안보화의 두 단계
코펜하겐 학파의 안보화 단계는 사회적 안보에 대해서 2가지의 담론적 형식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정치화단계와 안보화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정치화 단계 이전에 비정치화 단계에서는 국가는 이슈를 해결할 필요도 없으며 이슈가 공적 토론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문제가 시작되는 지점은 정치화단계에서 부터이다. 정치화단계에서는 국가는 기존 정치체제의 표준 내에서 쟁점을 관리한다. 또한 쟁점이 정부의 결정이나 자원배분이 필요한 공공정책의 일부가 된다. 정치화 단계까지만 해도 안보이슈는 쟁점정도이지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만들지 않는다. 또한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쉽게 정책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정치화단계를 넘어서서 안보화단계로 넘어가면 쟁점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거지면서 안보화하는 행위들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안보문제'로 규정된다. 안보화 행위자는 이미 정치화된 이슈를 안보 대상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 부각시키면서, 쟁점정도로 관리되던 이슈가 안보화단계에서는 사회의 안전과 정체성을 위협하는 '안보문제'가 된다. '안보화단계'에 이른 이슈들은 그 문제를 만들어내는 대상들이 국가와 사회의 위협을 가하는 수준까지 인식되는 단계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난민 문제를 생각해보자. 먼저 비정치화단계에는 난민문제는 기존의 법적 테두리에서 난민을 분류하고 허용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예멘난민'과 같이 난민의 갑짝스러운 발생이나 어떤 사건이 시발점이 되면 정치화단계로 격상하게 되면 정부는 정책적 의지를 가지고 기존의 난민법 안에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에서 난민문제를 관리하고 그에 대해 필요한 부분이 있는 경우 공공정책적 측면에서 대처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더 나아가서 난민 문제가 사회와 국가에 위협이 된다는 인식하에 안보화단계로 격상되는 순간 안보문제로 규정되면서 사태는 돌변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기존의 문제가 되지 않았던 '난민'의 지위는 안보화화 단계에 따라서 안보문제로 연결되고, '난민에 대한 배제와 차별'이 자연스럽게 집단정체성을 지키는 방법이 된다. 이때 쏟아져 나오는 '언술'행위들은 '난민'들에 대한 소문과 극적인 사건들,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들과 같은 방법으로 사회에 전달된다. 정부가 다룰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어떤 특단의 조치를 내야하는 수준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렇게 해야하는 상황이었을까? 이런 고민들은 늘 존재한다.
4. 한국에서 난민문제
실은 '난민들'이 겪고 있는 위기임에도 안보화단계까지 발전하면 '난민 수용국'의 위기로 인식되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범죄율의 급증이나 테러리즘과의 연계성, 복지체계의 부담이나 일자리 잠식 등은 정말로 '한국의 위기'가 되는 것인가? 미국은 2001년에 Patriot Act, 2005sus Real ID Act와 같이 난민을 잠재적으로 테러리스트로 간주하기도 한다. 영국도 비슷한 법안을 제정하면서 정치권이 난민은 테럴리스트라는 이미지를 창출한다. '안보화'를 통해서 '위기, 혼돈, 범죄, 테러리즘, 규범해제' 등의 부정성을 낙인찍는 것이다. 난민과 이주민의 경제요인의 이주가 혼합되면서 경제안보와 일자리 이슈화되는 것이다. 2013년 난민법 시행 이후, 전체 난민신청자 수는 2018년 6월까지 4만명이었다. 2018년 5월 예멘에서 입국자수가 14명에서 432명으로 급증하면서 한국사회에서는 급격하게 난민문제가 이슈화가 되었고, 결국은 비정치화에서 정치화로, 정치화에서 안보화 단계를 거치면서 '난민혐오'로 이어진다.
위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멘 난민 이슈'는 결국은 '안보화단계'까지 갈 조짐을 보였다. 최소한의 난민수용 혹은 반대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안보와 위협'의 테제'가 들어 있었다. '대한 민국, 백의 민족, 한민족 5,000년의 역사'와 같은 동질적인 정체성을 중심으로 신화적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타자의 '배제와 차별의 합리화'는 정치화를 넘어서 안보화까지 발전한 것이다. 항상 그렇다. 어떤 담론이 안보화단계까지 넘어가면면 소수자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 '우리'라고 하는 애매모호한 정체성 속에서 다양한 담론들이 오용되고 이용되고 문제를 만들어 낸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그래야할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무엇을 해야할까? 고민이 생기는 지점은 더 커진다.
5. 난민문제에 대한 생각
사실 난민에 대한 혐오 혹은 배제든, 이주노동자에 대한 편견이든,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든 같은 맥락에서 발젼한 것 같다. 그것은 근대 국가가 이미 가지고 있었던 주권의 히스테리다. 주권이라는 개념의 발명으로 나와 너의 사이에서 갈라진 '우리'와 '너희'라는 감정은 명확한 실체나 기반이 없는 체로 이데올로기들의 성벽 안으로 사람들을 몰아 넣는다. 나와 '다름'을 인식하는 것, 그 자체가 '타자는 일단 이질적이라서 거리감이 있잖아요~'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근원인가를 곰곰히 따져보면 빈 공간들이 너무 많이 생긴다.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더더욱 거슬러 올라가봐도 애매한 구석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과연 한민족이라는 뿌리가 같은 곳에서 시작되었는가도 문제지만 그 한민족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마치 무엇인가를 지키고 싶은 것 때문에 발명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 만들어진 외생적 근대화는 다른 여러 식민국가들과 다르게 '동일 문화권'에 의한 근대화였다. 오히려 민족적인 친화력이 더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친화력 덕분에 친일파들은 근대화를 가능하게 해준 제국 일본에게 감사하라면서 아직도 일본을 주군처럼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자아개념이 충분하지 않은 탓에 근대화의 승기를 유럽과 서양에 빼앗껴버린 일본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정체성집단을 만들고 '소년'들을 새시대의 첨병으로 장착하여 근대 국가를 완성하려고 했듯이, 한국에서도 여전히 유신헌법이후에 전해지는 '새로운 근대성'의 원천은 '동질한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것이 1997년 이전까지만 해도 '능력주의, 개발주의'의 관점에서 성과주의 사회에 도달한 사람들을 기반으로 '집단정체성'을 만들고 성공의 담론을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성과, 결과, 성공, 돈과 소유를 만들어 내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그런 집단 정체성을 만들고서 서열화시키기 시작하더니 1997년 IMF 위기에는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와 결합되어서 '경쟁해야만 살아남고,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은 나가야 한다'라는 담론이 형성되었다. 그러니깐 경쟁을 위해서 한없는 사다리를 올라가야만 살아남는 구조가 제도적으로, 문화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난민문제는 바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바로 안보화단계로 발전할 소지가 크다. 우리라고 하는 제한된 라운드에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한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우리의 일자리를 뺏는 경쟁자, 사회적으로는 '우리의 퀄러티'를 낮춰버릴 패배자들의 등장말이다. 폭력을 가할 수 없는 경우에는 분리하고 배제하고 차별한다.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차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그 차별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거나 부족하다는 인식이 깔리게 된다. 이것을 돌리는 기제는 바로 '경쟁의식과 비교의식'이다. 그러니 난민이든, 성소수자든, 취약계층이든 모두 패배자로 끌어내리려는 공격과 위협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나서 기본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경재의 이데올로기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경쟁'이 공정하다는 착각을 가지게 되고 '능력주의'야 말로 이 사회에서 기회의 평등을 가져오는 가장 평화로운 방법이라고 믿게 된다. 그런 신념의 체계에 '난민'이란 무슨 말인가? 당연히 쫓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몰아내는 방식은 다시 사회적인 분류에서 '집단정체성'에 맞지 않는다는 논리가 등장한다. 그래서 난민들은 만약에 난민신청을 하려거든 한국어 시험을 보고, 한국역사를 알아야 하고, 한국사람들의 문화코드와 의식들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나오는 것이다.
함정들은 도사리고 있다. 일본의 1만원권 지폐에는 후쿠자와 유키치라고 하는 일본근대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 자리잡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사람위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없다'라고 하는 슬로건으로 19세기 초기에 인권운동가로 아주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그런 후쿠자와 유키치는 아시아 침략사상을 기초한것을 넘어서 대동아 동영권을 이루기 위한 1등 국민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교육에 앞장을 선다. 그러는 사이에 발생하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의 2등 국민들은 개돼지 취급을 했다. 인권을 가장한 집단정체성의 말로였다. 신기한건 이런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발끈하고, 일본을 응징하자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같은 맥락에서 난민들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내면은 왜 돌아보지 않는 것일까?
유럽에서 발흥한 계몽주의 프로젝트는 시대와 장소를 넘나들며 떠돌아다니다가 '한민족'안에 경제적인 모습으로, 세계화속의 무한경쟁이라는 모습으로, 민족국각와 민족주의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것을 벗겨내고 새로운 민족과 근대를 만들자고 하는 일본의 계략과 박정희의 유신과 세계화의 노력속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그것을 바로보게 해주는 것이 바로 난민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다. 예로부터 친구로 지낼 수 없기 때문에 적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우리의 문화 정체성은 세계화 속에서 '보편적인 신자유주의 경쟁' 속에서 더 편협해지고 있다. '경쟁은 야만이다' 라는 말이 현실에서 옷을 입듯이 난민문제에 대해서도 경쟁적인 관점에서 보고 평가하는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자연스러운 이데올로기와 담론들이 한국 사회를 보편성에 벗어난 편견이 가득한 사회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코펜하겐 학파의 논리대로라면 해결을 위해서는 일단은 안보화단계의 난민문제를 정치화단계로 낮추고, 비전치화단계까지 낮추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난민문제에 대해서 '증거에 기반한 대안과 예시'가 필요하고, 500명 정도가 되는 예멘 난민들이 5,0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위협한다는 왜곡된 자아개념부터 해결해야 한다. 결국 나 스스로가 제대로된 자아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위협은 기회가 될 것이고, 세계 속에서 한국은 함께 걷기에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전략적으로 안보위협의 단위에서 정치적 논쟁의 수준으로, 그리고 비정치적인 일상의 해결책들을 만들어가야 하는 노력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당위'적인 차원에서 논쟁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같이 해결할 프로세스를 짜고, 이에 맞는 생각의 변화를 위해서 계속해서 교육하고 설득하는 작업들이 필요하다. 또한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위협'의 담론과 패러다임에 맞춰서 요한 갈퉁이 이야기한 것처럼 갈등의 전화를 위한 작업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갈등을 전환하려고 하는 '피스메이커'들이 평화를 촉진하는 역할들을 담론과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주장의 근거에 대해서 데이터적인 접근과 결과의 확신에 대한 지식적인 차원에서의 반론들을 계속 만들어야 한다. 오히려 우리에는 '평화 마케터'가 필요한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아이러니 하지만.
0. 나오기
아는 지인이 오래전부터 난민을 도와주는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이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면, 놀라운 것은 이 친구 속에 '세계시민주의와 인권'의 확장성이 너무나 아름답고 놀랍게 담겨 있다는 것이다. 타자를 향한 열려진 마음과 지친 친구들에 대해서 위로의 마음과 무엇이라도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의 한켠을 들여야 보면서 나의 인생을 돌아본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기억에 남는 사실은 그 친구가 이 일을 하기 전부터 이 친구의 내면에서는 함께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비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냥 두려움이나 위협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갈 때 느끼는 행복의 구체적인 모습들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동시대에 함께 땅을 밟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살아갈 궁리를 할 수 밖에 없다. 함께 살아갈 비전이 없는 체로 현실에서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는 '자아의 붕괴'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전쟁하자고 하는 것 밖에 안된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분석할 수 있지만, 그 분석의 결과를 가지고 혐오와 폄하, 차별을 스스로 시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러링'의 방식으로 되갚아 주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아니다. 오히려 함께 만들어가는 공유된 비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우리라는 테두리를 뛰어넘는 것이어야 한다. 더 큰 보편성의 차원에서 문화를 이해하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함께 살아갈 궁리를 하는 것이다.
요한갈퉁의 유명한 저서를 아직도 기억한다. "평화는 오직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 이루어진다."평화를 만들어가는 수단 자체도 평화에 기반한 방식이 되어야 한다.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위협적이었던 적들이 함께 쟁기를 들고 땅을 메고 밭을 갈며 살아갈 궁리를 하는 세상을 꿈꿔본다. 경쟁하기 보다는 함께 걸어가는 뒷모습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