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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Dec 22. 2020

이층집에서 바라본 '모더니티'

평생연구과제_일본과 제국주의, 신자유주의와 개발독재

이층집에서 바라본 '모더니티'


1930년대 유럽의 음울한 풍경을 드러내는 장면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유대계 독일 지성인의 이동과 망명은 열림과 비판을 중핵으로 하는 유럽계몽정신의 붕괴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 정신의 붕괴가 외부와 만남으로써 인식의 지평에 떠 올랐음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현상이다. 발터벤야민, 한나아렌트, 한스요나스, 레오 슈트라우스, 한스켈젠, 슈테판 츠바이크, 테오도어 아도르노, 막스 호르크하이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등 열거하기도 벅찬 20세기의 기라성 같은 지성들이 조국 독일을 떠나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던 사정을 일일이 살펴볼 이유는 없지만, 이들이 망명지에서 유럽정신사를 상대화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테어도어 아도르노와 막스호르크하이머는 뉴욕에서 나치의 광풍이 유럽 계몽주의의 필연적 귀결임을 고발했고, 한나아렌트는 프랑스와 미국의 혁명을 비교해 후자야 말로 진정한 공화주의의 적자임을 주장했으며, 슈테판 츠바이크는 센프란시스코에서 19세기 유럽문화의 몰락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한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정신이 내포하고 있던 역설의 변증법은 15세기 이래 유럽 곳곳에서 박해와 차별로 신음해온 '외부인' 유대인들에 의해 '외부로부터' 인식의 지평에 떠오른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유럽이 외부를 매개로 스스로의 정신을 비관적으로 가늠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전 세대의 지성들과 전혀 다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로부터 베버에 이르기까지 유럽 외부를 참조하는 것은 유럽의 우월성이나 독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지 유럽 정신의 몰락이나 쇠퇴를 고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치의 광풍에 떠밀려 낯선 곳에 스스로의 몸을 위탁하게 된 유대계 망명지식인들이 유럽 정신의 우월성을 입증할리는 만무했을 뿐더러, 새로이 정착한 미지의 땅은 그들의 유럽정신에 대한 환멸과 한탄을 한층 날카롭게 벼리기에 충분한 장소였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아렌트의 '혁명의 관하여',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 등은 미국이라는 외부가 아니면 볼 수 없었던 유럽정신의 자가당착에 대한 고발이었으며, 유럽이 낳은 미국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찬 시선을 드러낸 저술들이었다. 근원적으로 몰락의 계기를 내포한 유럽정신에 대한 비판과 그로부터 탄생한 미국문명에 대한 냉소를 통해, 이들 망명지식인들은 진정한 유럽정신이 유럽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전파된 외부에서도 몰락할 운명에 처해 있음을 비관적인 어조로 토로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망명은 단순히 고난과 역경의 체험만을 뜻하지는 않았다. 망명은 유럽정신이 유럽 바깥에서 기괴한 형식으로 뿌리내리고 있음을 실감케하는 사건이었으며, 그 기괴함 속에는 유럽정신이 내포된 근원적 위약함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며에게 미국의 대중문화와 매스미디어는 커다란 충격이자 혐오의 대상이었고, 이 때문에 이들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 계몽의 역설을 파헤쳐낼 수 있었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자식들인 아렌트의 정치철학이나 마르크제의 문명론도 마찬가지로 미국이라는 계기가 없었다면 성립불가능했다고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대계 망명 지식인들 중 단연 주목을 끄는 인물은 또다른 하이데거의 자식인 칼 뢰비트이다. 다른 인물들이 유럽이 낳은 유럽의 외부인 미국 땅에서 유럽 정신의 몰락을 고발하는 저술을 남겼다면, 뢰비트는 유럽과 전혀 다른 전통을 가진 일본에서 동일한 궤의 작업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뢰비트는 낯설기 짝이 없는 유럽의 문물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수용한 일본과 마주했고, 이 조우를 통해 자신이 성장한 유럽의 정신세계를 성찰한 것이다. 그 노력은 '헤겔에서 니체로'라는 저서와 '유럽의 니힐리즘'이라는 논문으로 결실을 맺게 되고, 특히 논문의 일본독자를 위한 후기에서 뢰비트는 일본의 근대화를 논구하면서 유럽정신의 몰락과 일본 근대의 자가당착이 서로 얽혀 있다고 지적한다.


    유럽으로부터 배우고 받아들인 진보가반유럽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일본인의 서양에 대한 관계는 모두 필연적으로 분열적인 것, 양가적인 것이 되며, 서양 문명은 찬탄됨과 동시에 혐오된다. 모든 영역에서 이제 일본은 다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고자 하고 있다. 즉 순결하게 일본적이고자 하고 있으며, 남의 영향을 최대한 줄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본질과 사명을 이렇게 의식하는 일도 유럽의 충고를 준수한 결과다.

    이런 상황 앞에서 유럽인이 유럽정신의 역사를 일본잡지에 스케치하는 일은 아마도 독자에게 기묘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유럽 통일체가 붕괴했다든가, 낡은 유럽은 끝났다든가, 우리들 최후의 말은 능동적이 돼버린 '니힐리즘'이라든가, 이런 말을 어느 유럽인으로부터 듣는 것 이상으로 일본의 애국자들에게 환영받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논물을 써서 번역되기를 바란다면 어떤 변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유럽의 자기비판에 대한 변명이며, 일본의 자기애에 대한 비판이라고 말이다

_칼 뢰비트 '유럽의 니힐리즘'


'유럽의 니힐리즘'은 이와나미에서 간행한 잡지 '시소오'에 1940년에 연재된 글이다. 여기서 뢰비트는 유럽정신의 진수는 그리스부터 계몽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타자와 만나 타자 속에 머물면서 자기를 되돌아보는 성찰'임을 논증한 후, 그러나 그 정신이 현재 니힐리즘의 단계에 이르러 더 이상 타자도 자기성찰도 모르는 퇴행의 나락에 빠져들었다고 고발했다. 이 때 그가 말하는 니힐리즘이란 인간(자아)과 자연(타자) 사이의 상호소통을 통해 가능한 자유추구가 더 이상 문명 진보의 목적이 되지 못하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며, 역사를 기술적 진보로 축소해 이해함으로써 자유를 개척하기는 커녕 자연의 필연 앞에서 맥없이 주저앉거나 그것을 자유로 착각하는 태도를 말한다.


일본우파의 시작 고구카쿠

 

이런 맥락에서 뢰비트는 "미국, 러시아, 일본에서만 오늘날도 여전히 진보의 이념들이 신봉되고 있다"고 비꼬았다. 미국, 러시아, 일본에서는 과학기술로 대변되는 물질문명의 진보가 정신의 몰락을 초래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뢰비트는 이러한 물질문명과 기술진보에 대한 신봉이 바로 일본의 자기애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이때 자기애란 유럽으로부터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며, 정신 자체는 일본의 것을 고수해 유럽을 능가하려는 낙관적인 태도다. 즉, "일본인은 일본적인 것 중에서 최선의 것은 남기고, 유럽으로부터는 최선의 것만을 받아들여 '일본의 완전성'에 대해 '유럽의 완전성'을 이어붙임으로써 유럽을 능가하고자 한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일본의 자기애를 뢰비트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들은 이층집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즉 일본적으로 느끼거나 생각하는 일층과 플라톤으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는 유럽 학문이 진열돼 있는 이층으로 된 집 말이다. 결국 그들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사랑하고 있으며, 아직도 인식의 과실을 먹지 않은 채 순결을 잃지 않고 있다. 즉 인간을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 끄집어 내어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적으로 대면시킴으로써 자기를 상실하는 경험을 겪지 않은 셈이다. 유럽에서는 통계가 된 태도, 즉 가차없는 날카로움으로 자기 자신을, 또한 자기들 국민을 문제시하는 태도를 가진 일본인이 과연 있을까 나는 의심스럽다_ 칼 뢰비트


이러한 언설에서 비유럽인들에 대한 유럽인의 편견을 읽어내고 고발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물론 그런 독해가 타당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만 읽는다면 뢰비트의 발언이 농축한 유럽과 비유럽 사이의 복잡하고 두터운 관계 양상을 파헤치는 일은 단념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뢰비트에 따르면, 근대 일본이 이층집에 살수 있는 까닭은 '화혼양재'로 대변되는 서양문물에 대한 수용태도가 성공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화혼양재라는 낙관적이고 편이적인 태도가 유럽의 충고를 받아들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때 유럽의 충고란 타자에 비춰 자신을 바라본느 비판적 태도를 말하는데, 근대 일본에서는 이 태도가 자기성찰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전통에 댛나 맹목적이고 자연적이며 강력한 신봉으로 뒤바뀌었다는 것이 뢰비트의 진단이다. 즉 일본의 자기애는 일본적인 것과 유럽 분명을 균형있게 공존시킨 결과라기보다는, 유럽정신이 기이한 형태로 뿌리 내렸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인 샘이다. 또한 이 때 뢰비트의 주장은 유럽정신에 이미 이런 자기애로 귀결되는 게기가 내재해 있었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제국일본은 우리나라에서 계속해서 재현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뢰비트의 근대 일본 비판은 유럽정신에 대한 비판과 중첩된다. '유럽의 니힐리즘'이라는 글이 "유럽의 자기비판에 대한 변명이며, 일본의 자기애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할 수 있다. 근대에 이뤄진 유럽문명과 정신의 전파는 한편에서 니힐리즘으로 대변되는 유럽의 자기혐오를 초래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층집이라는 은유로 표현될 수 있는 일본의 자기애를 가능케 한 것이다. 따라서 뢰비트가 망명지 일본에서 본 '모더니티'는 근대화론이나 오리엔탈리즘 시각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유럽이 비유럽의 모델이 된다거나 비유럽이 유럽의 편향된 시선으로 구성됐다는 관점을 제시하기보다는, 유럽과 비유럽을 아우루는 모더니티에 대한 물음이 필연적으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인 채로 연속된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이는 외부로부터 유럽정신의 몰락을 고발한 유대인 망명지식인들이 공유하는 모티브이기도 했다. 즉 이들은 어디까지나 유럽에 대한 물음을 중심에 두면서도,  비유럽을 그 물음이 출발하는 지점으로 삼은 셈이다.


그러나 뢰비트를 비롯한 유대인 망명지식인이 말한 유럽정신 자체를 놓고 왈가왈부하자는 것은 아니다. 유럽인 망명지식인들의 이야기를 이처럼 장황하게 한 까닭은, 이 때 비유럽과 유럽에 대한 물음은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보다 원천적인 상호참조의 관계를 이룬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다음 절에서는 이 시각을 바탕으로 두고 근대 일본의 헌법, 주권, 천황의 문제를 다뤄보고자 한다.



천황이란, 헌법과 주권이라는 유럽의 문명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근대 일본이 스스로의 전통을 번역해 만들어낸 일본적 자기애의 상징 같은 존재임과 동시에, 유럽에서 발명된 헌법과 주권이 내포하는 아포리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 다음 절에서는 헌법, 주권, 천황을 둘러싼 언설들을 검토함으로써 천황에 대한 물음이 바로 헌법-주권-일반에 대한 물음임을 논쟁하고, 이를 통해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스스로의 정당성을 추구해온 '모더니티'라는 특권적 시대규정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함을 조심스레 검토해보고자 한다. 우선 근대 법체계를 통해 번역된 천황제에서 기본적인 문제틀을 추출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김항_제국일본의 사상 : 포스트제국과 동아시론의 새로운 지평을 위하여







역사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처음 20살때 받았다. 그때는 이제 막 미몽에서 깨어나고 있던 탓에 칼 뢰비트가 누군지 몰랐고, 헌법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추천해준 책이 왜 칼 맑스가 아니라 칼 뢰비트인지 몰라서 책장 속에 오래오래 묶혀 두었다. 그런데 어느날 칼 뢰비트의 관점은 영웅문의 구음진경처럼 누더기 속에서 한편의 금은보화와 같이 '비법서'로 내 인생에 다가왔다. 칼뢰비트가 비추어주는 인식은 다름 아닌 '이층집' 비유였다. 제국일본은 여전히 1층집에 자신들의 역사와 삶을 지키면서 2층 집에 유럽이라는 나그네를 세놓고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에 있어서 외생적 근대화란 사실은 자기애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위장'과 같은 것이었다.



20세가 저물어 가던 29세때에야 비로서 책을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 그 중에 노르베르트 엘리야스의 '문명화과정'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서양을 1층 집으로 삼았던 나의 세계에서 그들을 내보내고 1층집에 '임대'를 써 붙였던 일들이 있었다. 문명이 되어가는 것은 역사의 필연이 아니라 수 많은 사건과 행위, 사람들에 의해서라는 것이었고 '과정'에 따라서 다른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축적이 되니깐 시작하는 문명들에게는 너무 큰 장벽이나 산이 되는 거였다. 문명화과정을 다 읽기도 전에 한국의 역사와 철학을 꺼내 들고서 근대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찾아 읽으면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비록 하산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지만 졸업하기 전에 그 짧은 시간동안에 앞으로 내 인생에서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책을 읽는다면 반드시 3가지는 해결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1. 제국주의 : 제국주의의 잔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2. 개발독제 : 개발과 민주주의는 정말 같이 갈 수 없는가? 독재는 필연적이었나?

3. IMF외환위기 : 신자유주의는 진보적 형태인가? 착취의 패러다임인가?


거의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첫단추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학자는 되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마냥 운동을 할 수 만도 없어서 무엇이라도 고민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는 취지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번학기에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들으면서 조그만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제국일본이 가지고 있는 사상의 역사와 중층구조 그리고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그들의 '미완의 근대화'가 우리의 내면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다양한 문제들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이미 제국일본이 아직도 가지고 있는 논리였는데, 나 자신도 모르게 답습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았다. 친일파들은 괜히 친일파가 아니라 뼛속까지 일제의 생각을 뿌리박고 그들의 기준을 제국에 맞춰놓기 때문에 물아일체가 된 듯했다. 제국이 곧 자신이고, 자신이 곧 일본인 사람들. 어쩌면 한국에선 '뉴라이트운동'에서부터 태동했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친일의 역사와 생각의 흐름을 볼 때, 식민지때부터 지금까지 근 100년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의 패러다임이 지극히 일본적이다. 일본적이라서 나쁜게 아니라 제국주의적인 생각이라서 나뿐 것이다. 그렇게 보면 위의 세가지 주제 모두 제국주의에서 연원한 것이고 그 방법과 해결책도 그 안에 있다. IMF 외환위기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의하면 제국의 현현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주어가 없는게 아니라 전세계적인 제국이 오늘날 금융분야에서 금융제국으로 드러난 모습이라고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 마루야마 마사오, 미키 유시오 등등 파해지고 분석하고 조사하고 분리하고 치유하고 책임져야 할 생각과 사건이 너무나 많다. 역사 속에서 책임지지 않았던, 못했던 일들을 찾아서 늦게라도 해결해보자는 생각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너가?'이런 냉소를 날리기도 하지만, 머 어떤가 이 삶은 경쟁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것이니깐. 이렇게 고민하다가 또 같이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한 발 내딛을려는 사람들을 만나겠지. 일단 김항교수님의 책은 이제 시작했다. 유럽과 일본의 동아시아적 제국주의가 만들어져 가는 시기에서 '천황'주의는 다분히 우리 안에 박정희, 유신, 대통령, 왕'과 같은  메타포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 이것들을 해석하고 분석하고 싸우고 몰아내는 작업들부터 천천히 해야겠다.


 


한 10년정도 흐르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20년 전에 품었고, 10년전에는 아련한 계획만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10년에 많은 것들을 했노라고 말이다. 그러니깐 한번 가보자. 최근에 김항교수님과 김누리 교수님의 강의와 논문을 번갈아가면서 찾아보고 공부하고 있다. 갈 길이 멀다. 앞으로 10년정도 남았구나!



https://www.youtube.com/watch?v=5UaJywOO6Mk&t=636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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