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한_2, 3, 4장 내용
올해는 1991년 5월이 지난지 30년이 된 시기이다. 1991년 5월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은 무엇이고 전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1991년 강경대 열사의 죽음으로 시작된 혁명은 오늘 우리에게는 잊혀진 부분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경험한 역사가 가려진 것과 그것이 드러내는 현재의 현상. 그 원인을 이해하는 것과 맥락을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늘부터는 김정한씨가 쓴 비혁명의 시대를 읽는다. 1980년대 이후부터 내려오는 혁명의 논의과 1990년대 이후에 바뀌어 버린 이데올로기의 형태들을 찾아가서 결국 우리는 대안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오늘은 2장에서부터 시작해서 전향과 민주화대안을 이야기 한다.
80년대의 투쟁을 이끌었던 민주화세대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등장했는가? 사회운동은 민족이거나 지역이거나 계급이나 계층에 따라서 분할되기 마련이다. 투쟁을 조직화하고 진행하는 세력이 '세대'라는 담론에 들어가는 것은 다소 예외적이다. 운동세대가 엘리트화되면서 '지배 엘리트'가 되고 이것이 386세대가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보면 '능력주의'에 의거해서 혹은 '역사주의'에 의거해서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가졌다. 다시 말하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공로를 인정받아서 지배적인 '세대'가 된 것이다. 그것이 386세대가 가지고 있는 '나~때는 말이야'가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소위 민주화투쟁이라는 명목하에 다양하게 진행된 운동들이 1991년 이후에는 급진적인 논의들이 사그라들고 급진성, 다양성, 혁명성 들이 '정치적 민주화'를 위한 담론으로만 소급되었다. 군사정권을 처치하고 정당을 통해서 민주화를 이루는 부분만 강조되어 버린다. 민주주의는 새로운 상상력과 저항, 시민들의 연결이라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만 1991년 이후에는 '국가'를 기반으로 해서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어 버리는 흐름이 생긴 것이다. 그러다 보니깐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같은 다양한 이념들은 배제되어 버렸다. '인혁당'사건의 경우는 공산주의 운동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의 하나로 소급되어 버리는 웃지 못할 해석도 등장하는 것이다. 인혁당 사건을 한국사회에서 오늘날 기념할 수 있는 것은 '이념적 지향성'이 아니라 군부의 폭력성에 반대하는 입장에서의 민주화 담론에 흡수되어 버린 것이다.
극우반공체제가 우세한 진영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87년 체제라는 것은 사회운동적 관점에서도 계승도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극우반공체제인 48년체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한에서는 그렇다. 그래서 1991년의 비혁명의 시대는 이전에 세대, 체제의 그림자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림자에 억눌린 암흑과 같은 비혁명의 시대가 오게 되는 것이다.
1980년대에는 NL과 PD 그리고 민주주의의 시대였다. 민중주의는 보통 populism이라고 부르지만 지금 이야기하는 그런 정치 포퓰리즘과는 다르게 대중들의 이야기를 담는 것을 말한다. 1980년대에는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운영되는 운동의 성과들이 있었다. 그러나 1990년 소련의 해체로 인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국내의 이데올로기에도 심각한 도전과 변화를 주게 된다.
민주주의라는 보편성을 재구성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선거제도를 넘어서서 민주주의 핵심가치를 정치적 의제와 담론적 차원으로 끌어와야 하고, 민주주의에서의 정치 주체는 결국 '투표를 하는 유권자'를 넘어서서 시민들이 더큰 차원에서 정치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정치적 행위와 윤리에 대해서도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정치적 행위가 신자유주의 이후에 냉소적인 허무주의로 귀결되기 쉬운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영웅주의와 카리스마적 정치적 행위에 쉽게 포섭되어 버리면 안된다. 여성, 노동, 가난, 배제와 분리, 차별과 혐오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극복해야할 민주화의 과제가 되는 것이다. 민주화에 대한 생각은 사회운동의 활성화의 고민과 같이 가야 한다.
이번 장은 1991년 5월 이후에 혁명가 혹은 지식인들이 전향했는가를 보여준다. 세가지 전향담론이 있다. 첫번째는 비합법 전위조직을 공개가 핵심이다. 조직적인 전환을 할것인가? 두번째는 진보지식인들의 고백이고 세번째는 전향적 작성이다. 조직적 전환은 PD계열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자. PD계열은 이전까지는 혁명을 위한 지하조직을 지향하다가 노동자정당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정당'을 만들고 의회로 진입하려는 노선으로 바뀌게 된다. 그 후에 지난한 사건과 불협화음이 있었고 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주대환은 조사받는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노선, 폭력 혁명 노선, 전위정당 노선을 폐기한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사건 이후에 사회 운동은 포스트마르크스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고 마르크스주의 혹은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부르주하 정치에 투항이라는 논의와 함께 지속되었다. 이병천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을 내세워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 그 핵심개념을 폐기하고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전향의 논리는 진보정당의 성공가능성이 낮고 문민정부가 개혁하는데 힘을 실어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노동당 계열의 실패는 이런 부분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식인에 관해서는 리영희선생님을 들 수 있다. 리영희는 초기 마르크스의 인간학과 후기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구분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초기 마르크스의 인간학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관점에서 자본주으와 사회주의를 배합하는 일종의 사회민주주의를 대안적인 좌표로 제시하고 있다. 리영희는 자기만이 소유해야 한다는 욕심, 배타적 소유욕, 그리고 이기심이 원초적 인간 그 자체라는 점을 제기한다. 사회주의가 없는 자본주의는 부패, 불법, 부정, 타락, 빈부격차, 폭력, 범죄, 잔인, 인간소외 등을 낳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사회주의의 인간 중시적 가치관만이 그러한 자본주의의 반인간적 측면을 방지하고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바람직한 것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적절한 배합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전향인가 전환인가?
어찌되었든 전향담론은 반지성주의로 연결되었다. 전향서 혹은 준법서약서는 전향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서준식) 전향을 제출했다는 것보다는 실질적인 정치적 실천과 책임이 더 중요하다(신영복) 주장들이 전향담론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1990년 이후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억압적인 국가장치의 존재로 인해서 전향담론은 상황에 맞춰서 판단이 되는 편이 맞는 해석이라고 본다. 레닌주의나 마르크스주의의 합리성이나 적실성을 비판하는 것도 전향담론에 포함되어 버림으로써 사상적인 발전을 위한 토론이나 논의가 반지성주의를 낳게 되었다. 전향자체로 무의미해져 버리는 것은 '사상적인 변화'를 대안으로 마련해 놓지 않은 것으로 전향이 어찌되었든지 실천의 장소에서 그것들의 실체를 본다고 하는 것도 무의미해저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전향과 사상의 분리효과는 일체의 이론적, 사상적 논쟁만이 아니라 전향 자체까지도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1990년대의 전향 담론들은 보수와 진보의 사상적 경계, 또는 우파와 좌파의 사상적 정체성을 더욱 뚜렷하게 형성하는데는 기여하지 못했다.
최장집이 한국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이론가라는 것은 이견이 없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민주화 기획 혹은 대안은 논의의 대상이 된다. 보수정당의 독재와 지속성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최장집은 정당-정치의 의지주의를 주장한다. 이 당시 민주화는 이념적인 노선을 잃어버리고 신자유주의에 따른 제도와 국가에 주체성을 넘겨 버린 현상들을 만들어 냈다.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탈민주화라고 부르는 거대한 변환이다. 기업권력과 시장의 논리가 제도정치의 운영과 관리를 주도하면서 민주주의의 원리를 구현하는 제도들이 무기력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것이 곧 탈민주주의이다. 세계적으로 탈민주주의화가 주요 연구과제로 되는 것도 비단 한국의 현상만이 아니라 1990년 이후에 전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흐름이었다.
포스트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담고 있는 민주주의 대안 문제의식도 크라우치는 민주주의의 절차와 제도가 유지되고 있지만, 민주화 이전 시대와 유사하게 특권적인 엘리트들의 지배와 통제가 재확립되고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상이 도래하는 것이다. 대중이 요구를 정치에 반영한다기보다는 제도정치 세계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하고 자신이 속한 정당의 보존과 유지에 치중하는 정치계급과 금융세계화로 인해 국가의 통치력을 벗어난 대기업의 이윤활동을 대변하는 경제계급이 결합하여 지배 엘리트 집단을 형성하고 권력과 부를 축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정당정치의 붕괴가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최장집은 이러한 흐름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정당정치의 부활을 이야기한다. 정당정치는 시민들의 요구를 정당이 대변하는 대의민주주의 핵심이면서 반대로 보수적으로 엘리트집단의 지속적인 통치가 가능한 제도이다. 따라서 1991년 비혁명의 시대에는 최장집류의 정당정치 기반의 대안들이 기승을 부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잘 표현한 것이 결국 양당체제인 것이다.
민주화를 가져왔던 운동은 정당으로 전환하지 않았고, 통일전선 운동에 매몰되어 스스로의 역량을 서서히 소진해갔다. 사실상 그 다른 이면은 운동권 엘리트들이 개인적 차원의 결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제도권 정치 엘리트로 변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실 정치에 운동권이 많이 참여하게 되었지만 현재 존재하는 정당 역시 기존의 정당들과 유형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기대를 모았던 민주노동당 역시 넓게 보면 교육받은 중산층의 정치관이 지배하는 엘리트 정당의 유형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 _ 최장집, 박상훈, 박찬표 '어떤 민주주의인가' p263
한국 민주화의 주요 특징은 운동에 의한 민주화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기존의 사회운동이 퇴조하고 새로운 사회운동이 성장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회운동이 대중들의 정치 조직화를 통해 정당 체제 개혁과 민주화로 나아가는 경로가 다시 성립할 수 있을지는 낙관하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포스트민주주의의 조건에서 배제된 자들의 사회운동과 정당 정치를 결합하는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전략'이 유효할 수 있다.
새로운 정당은 새로운 사회운동의 힘으로 구성될 수 있으며, 새로운 사회운동은 제도정치를 무시하고 기각할 것이 아니라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해야 한다. 현대 군주가 정당이고 현대의 호민관이 사회운동이라면, 현 정세에서 우리에게는 군주와 호민관이 모두 필요하다.
오늘날의 상황에서 유일하게 새로운 문제는 어떤 수준에서 권력들에 대한 통제가 실행되어야 하며, 대표가 구성되어야 하는가하는 점이다. 나에게 답변은 자명하다 그것은 모든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지역적 수준 및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국민적 수준, 그리고 초국민적 수준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로부터 끌어내야 할 결론은 대항권력, 권력에 대한 통제가 존재하는 한에서 권력 및 대표가 존재하는 모든 수준에서 실질적인 대표가 존재하는 한에서 시민권이 다시 존재하게 될것이라는 점이다_에티엔 발리바르 '정치체에 대한 권리' p2011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4607.html
함께 토론하는 내용들을 성명을 기입하지 않고 담았다.
1.
비혁명의 시대라는 주제를 다룰 때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정말 우리는 비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는가? 혁명의 기준은 무엇인가? 혁명은 자본주의 전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혁명을 무엇을 위한 혁명이고 무엇을 바꾸려고 하는 혁명인가? 혁명 그 자체가 필요한가? 지금 혁명을 해야 하는가? 자본주의는 정말 이겼는가? 당좌파와 사회적 좌파의 연합은 가능한가? 혁신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혁명은 시대적으로 매우 멀어져 있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개혁이나 혁신을 하면 공정하고 공의로운 시대가 올 수 있을까? 이런 논쟁은 가능하다. 비혁명의 시대에 우리는 혁신과 개혁을 통해서 혁명의 효과를 이룰 수 있는가?의 논의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회적운동을 하는 여성운동, 환경운동, 소수자 운동이 포함될 것이고(물론 참여연대나 경실련도 포함되나 조금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당좌파는 혁명의 효과를 내야하는 주제를 가지고 변화를 꾀하는 정당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조직과 시민의 연결, 정당과 사회운동의 연결은 가능할 것인지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매우 중요한 논의임에는 틀림없다.
1980년대에는 학생운동이 거의 유행처럼 번지던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최근 한양대에서는 학생회장 후배가 없어서 선거가 무산되었다.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고, 탈민주주의 문제, 인구감소, 경제적 여건이 문제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어찌되었든 사회를 바꾸어 간다고 보면 우리는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2.
일단 역사적으로 기록된 과거의 사건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논리는 지금의 시점에서는 가늠하기 어렵다. 사회주의, 사노맹, 노정추와 같은 이야기들은 지금세대가 읽기에는 역사적인 것과 같다. 우리의 일상과 거의 상관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공감이 가는 부분은 '정당'의 문제와 엘리트주의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정당이 왜 지금 대안으로 떠올랐는지와 정당이 가진 자체적인 문제가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볼 수 있다. '우리 사회를 대표하지 못하는 정당이 문제'인가? 혹은 '우리를 대표하지 못하는 정당체제'가 문제이다.
3.
당좌파와 사회적 좌파가 협력하는 모델이 필요한 것 같다. 물론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는 고민이 되기도 하지만, 생각은 해볼 수 있다. 정당이나 정치를 생각할 때 현재 상태가 너무 힘들다. 그래서 안될꺼야라는 냉소주의를 경계하는 것은 맞지만, 최근에 오면서 정의당만 생각해도 슬픈 생각이 든다. 물론 정당을 혁신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지역위원회에는 생각보다 스펙트럼이 매우 넓어지고 있다. 자영업자, 배달직원 등등 정당정치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엘리트주의'는 별로 작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조직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풀뿌리 수준에서의 대화와 논리, 토론과 대안을 논의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4.
당좌파나 사회적 좌파의 관계에서도 '수평과 수직'을 생각해야 한다. 수평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있지만 수직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있었다. 정치가 수직적인 부분은 반듣시 있다. 예를 들면 범위에 있어서도 국가-세계의 관계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 수평과 수직을 넓여가는 것이 대안이지 않을까? 정당과 시민사회를 연결하는 것에만 국한되는 것을 넘어서 확대하는 것, 대안적 주제, 목적과 방향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혁명과 정치를 보면, '혁명'은 뜨거운 느낌이다. 마치 스포츠와 비슷하다. 개인종목이 있고 팀대항이 있다. 정당은 '내편과 다른 편'이 익숙하다. 거의 대결은 1:1이 많다. 야구만 해도 연고지가 있고 서로 응원을 한다. 스포츠에는 스타플레이어가 있다. 결국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엘리트는 스타인가? 이런 고민도 들지만 어쨌든 정치와 스포츠는 연결고리가 많다. 그렇게 이해하면 정치에서 스타를 어떻게 만들고 그 효과를 만들어낼 것인가는 정치전략, 정치공학이 될 것이다.
5.
오늘 우리가 논의한 탈민주주의요소에 대해서 시민사회나 정당이 아예 일을 안하거나 무능한 것만은 아니다. 고질적이라고 보는 '운동'권의 문제들도 어느정도 해결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당주의는 과연 맞을까? 최장집류의 논의들은 현실주의자들의 논리이다. 현실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미 제도적인 경로를 가지고 축적된 제도 안에서의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주의의 입장에서는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주의에 따른 대의민주주의의 강화는 현실적으로는 권력을 잡는 방식으로 우위를 가지게 되지만, 엘리트주의는 더욱 가속화된다. 나는 어떤 대안을 만들것인가? 이런 고민들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