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혁명의 시대_김정한
그것은 우연적이다.
모순의 경우에는 a는 완전하게 a이기 때문에 not-a라고 하면 모순이다. 따라서 불가능하다. 실재적 대립의 경우에는 a는 또한 완전하게 a이기 때문에 a와 b의 고나계는 객관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효과를 산출한다. 그러나 적대의 경우에, 우리는 상이한 상황에 직면한다. '타자'의 현존은 내가 총체적으로 나 자신이 되지 못하게 지지한다. 이 관계는 완전한 총체성들이 아니라 총체성들의 구성 불가능성에서 발행한다. 적대가 있는 한, 나는 나 자신의 완전한 현존일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적대하는 힘 또한 완전한 현존일 수 없다. 그 객관적인 존재는 나의 비존재not-being의 상징이며, 이런 식으로 그것의 존재를 완전한 실정성positivity으로 고정되지 못하게 지지하는 복수의 의미들이 흘러넘친다. 실재적 대립은 사물들 사이에 객관적 관계이다. (규정할 수 있는, 정의할 수 있는)
모순도 똑같은 개념들 사이의 정의할 수 있는 관계이다. 적대는 부분적이고 불안정한 객고나화를 드러내는 모든 객관성의 한계를 구성한다. 언어가 차이의 체계라면, 적대는 차이의 부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적대는 언어의 한계에 위치하며, 언어의 파열로서, 즉 은유로서만 실존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적대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두 항의 관계를 뒤집어야 한다. 나 자신의 동일성을 획득하지 못하게 저지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다. 이미 모든 동일성은 본래 가로막혀 있으며, 불가능성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외부의 적은 단순히 작은 조각, 우리가 그런 본래적이고 내재적인 불가능성을 '투사'하거나 '외화'하는 현실의 잔여물이다_지젝
운동의 방식은 다시 메타담론으로 돌아가는 '정상화 패러다임'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진보의 패러다임'인가?
전략과 전술에만 치중하다가 정책이 없는 상황이 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