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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05. 2021

다소 정치적인 인사이트

교차성, 구조주의, 환상과 증상

교차성과 구조주의


시대는 변하고 있다. 시대가 변하면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면서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이슈에 따라서 정체성을 선택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체성은 교차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구조주의는 구조 안에서 운동하는 교차성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다. 억압적인 구조, 착취의 구조에 대해서 반응하는 다양한 정체성은 하나로 정해진 그룹이 아니라 다양하게 운동하는 것이다. 문제는 시대적 상황이 교차성과 교환성을 중심으로 유동하는데 반해 구조주의는 '구조'를 보려고 하는 관점 때문에 정태적이고 정해진 것들을 규정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과 교차성, 그리고 자본주의 교환


자본주의의 시작은 교환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교환할 수 있는 매개로 화폐가 등장했다. 교환가능하다는 생각은 교차성에서도 친화적으로 작동한다. 정체성을 교환한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실제로 자신의 얼굴을 바꿔서 매번 다른 정체성에 대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차성과 교환성은 연결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매번 현실에서 살아남게 되고 또한 자유자재로 변환되어서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다. 그럼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이 비혁명의 시대에 우리가 당면한 문제이다. 



반본질주의와 본질주의


본질주의essentialism는 모든 일에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본질을 건드리거나 해결하면 문제가 해결되거나 사람들이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다. 반대로 반본질주의는 모든 것의 본질은 여러개로 구성되어 있고 하나의 본질로 무엇인가를 결정한다는 것, 정의한다는 것 때문에 문제가 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대감'을 가진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을 적대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한국사람이라서 라고 보는 것이 '본질주의'라면, 그 사람이 한국사람이면서도 남자이면서도 내 앞에서 이상한 짓을 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과거에 내가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나에게도 원인이 있음으로 하나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 '반본질주의'이다. 이것이 정치영역으로 확장되면 계급갈등, 세대갈등, 지역감정으로 정치지형을 파악하는 본질주의에 대해서 교차성이나 교환성의 관점에서 보는 반본질주의는 뼈때리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운동의 성격이 달라지고 정치문화의 형성과정이 달라지는 것이다. 



알튀세르 과잉결정


알튀세르에게는 과잉결정overdetemination 개념이 있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가져온 이 개념을 사회적 관계의 모순을 설명하는데 설명한다. 서로 대립하는 주체들이 결국에는 선택되고 그것은 항상 과잉결정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과잉결정이 진행되는 것은 경제적인 구조가 최종심급이라는 것이 알튀세르의 관점이다. 이것을 가지고 과연 최종심급이 여전히 유효한가 혹은 과잉결정이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개념인가?라는 것은 논의가 필요하다. 



고전적 마르크스와 단절된 지점들


계급주의 : 노동계급이 사회변화의 근본적 추동력을 가진 특권적 행위자를 대표한다는 관념

국가주의 : 국가 역할의 확대가 모든 문제의 만병통치약이라는 관념

경제주의 : 성공적인 경제 전략이 필요한 정치적 효과를 보장한다는 경제주의 

좌파 자코뱅주의 : 사회를 합리적으로 재조적하기 위해 중앙집권적 권력이 필요



상징계에 관한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구조주의가 상징계를 발견했다면, 포스트구조주의는 상징계의 외부를 사유하는 것이다. 상징계 안에 포섭되지 않는 과잉요소들을 찾아내는 것이 포스트구조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상징계의 구조와 질서는 항상 자신의 내부로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과잉요소들을 배제할 때에만 구성될 수 있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를 때 아버지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 아버지가 아닌 요소는 배제되는 것을 이야기한다. 포스트구조주의는 바로 이 지점들을 찾아나는 것이며 그러므로 상징계 바깥에서 내부로 계속해서 교차성이 발생한다. 



증상과 환상


라캉은 상징은 항상 증상을 포함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아프다'라고 외치는 순간 아픈 이유가 있는 것이고, 아프다라는 것은 증상인 것이다. 그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증상의 원인을 발견하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해석하게 된다. 증상은 결국 과거와 현재와 연결되는 과정이다. 반면, 환상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작업이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이루어질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 이것이 환상이다. 증상과 동일시하면 내가 아픈 사람이다가 되고, 환상과 동일시하면 나는 아프지 않은 사람이다가 된다. 그러나 아픈 것은 현실인데 증상과 동일시는 해결이 불가능하고, 마찬가지로 환상과 동일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사회적 환상의 횡단


지젝은 사회적 환상을 다루면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서 일정한 '환상'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상상'이 아니라 환상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라한 환상은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문화나 유행, 트렌드나 현상이 된다. 이러한 사회적 환상을 가르지르는 작업은 그 환상이 허구임을 밝히고 실제로 환상을 실현해보니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환상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 환상은 극복되어야 하지만, 그 극복의 방식은 사회적 환상을 횡단한다는 개념이 되는 것이다. 



사회적 비전


증상과의 동일시는 과거로 향해있기에 역사주의 혹은 실존주의 안에서 고립될 가능성이 있다. 변할 것이 없다는 것과 피해자라는 의식이 무엇인가를 받는 수동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반면 사회적인 비전은 우리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이고도 명확한 그림을 함께 그리는 것을 말한다. 예전에는 누군가 던져주고 그것이 맞는지 아닌지 고개를 저의면 되었다면 이제 모두가 뛰어들어서 사회적 비전을 그리고 함께 그려가야 한다. 비전에 대한 이루말할 수 없는 정의들이 있지만 어떻게 보면 닥터스트레인지가 말한 비전이 가장 명확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한다. 




시각화하고 모든 디테일을 상항하며 너의 앞에 있는 그 새로운 세계를 보면 새롱누 세계의 문이 아주 선명한 세상으로 너를 인도할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선명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증상과 동일시나 환상과의 동일시가 아니라 함께 걸어가야할 사회적인 비전을 그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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