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삐에르 부르디외가 인생의 말년에 '세상의 비참'에 대해서 쓴 글을 보았다. 자신의 지식이 점점 늘어 갈 수록 세상의 비참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세상에 비참한 일들과 사람들의 삶의 조건은 나날이 악화되어 가고 있지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부르디외는 평생 이런 관점에서 세상이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글을 썼다. 물론 68혁명에서 프랑스대학의 서열화를 붕괴시키면서 그 당시 지성계의 다른 거장인 샤르트르와는 사뭇다른 현실을 걸었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라는 책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과 '구별' 지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썼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을 규정하고 악을 구별해 낸다고 해도 세상의 비참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상의 비참, 삐에르 부르디외
언덕으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 비참함의 경계에 서 있는 것도 이제 지쳐간다. 언제까지 비참함에 우울증으로 대면하거나, 혹은 무시함으로 내 양심을 짖눌러야 할까? 사람의 시간은 누구나 똑같다. 의식을 하고서 시간을 의미있게 사용하면 그 의미는 무게가 되어서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의식이 비참함의 의식이라면 그 느리게 가는 시간을 사는 현실은 지옥이 된다. 가난이 의미가 되고, 소외되는 것이 의미가 되고, 거절당하는 것이 의미가 되어 버린 이상 인생의 피아노 건반같은 시간들은 모두 비참함의 멜로디를 내는 우울한 심포니가 될 수 밖에 없다.
비참으로부터 도망가는 사람들을 본다. 하루 빨리 손을 털고 일어나서 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을 본다. 반대로 비참에서는 도무지 깨어날 수 없는 사람들을 본다. 시간이 남아 돌아서 이것저것 다 깨보고 짖눌러 보는 영상들을 보다가 문득, 지금도 할머니를 기다리는 손자의 이야기를 담은 후원영상을 본다. 빈곤포르노라고 하지만 현실은 더 빈곤의 일상이 되어 버린 아이들을 2번 가해하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물론 말한다. '비참을 해결하는 방법'이야. 그런데 그 비참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누군가를 대상화하고 거리를 두는 순간 사랑은 사라지고 동질감이 아니라 투사하는 것 밖에 안된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나의 감정을 투사해서 그 사람을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순간 일종의 '주종관계' 혹은 '주인과 대리인'의 관계가 형성된다. 알고 있다. 무엇인가를 위해서, 그 아이의 삶을 위해서 비참함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화면에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게 만들려는 것을. 그런데 그 장면을 보는 나도, 그 장면을 찍고 있는 사람도, 그것을 기획하고 만들고 있는 사람도, 그 아이와 할머니의 삶도 결국은 비참함의 연속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누군가 이 비참함을 도와달라고 하는 거리를 만들어서, 여기서는 여유라고 할 것이다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여유, 후원자와 수혜자를 나누는 방식. 부르디외가 말한 '구별짓기'의 새로운 방식이다. 똑같다. 다르지 않다. 나는 후원을 하고 누군가는 도움을 받는다는 관계 말이다.
후원할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 후원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비참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나는 계속해서 머뭇거린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이 비참에 대해서 대안을 내놓을 수 없고, 답변할 수 없고, 책임질 수 없는 초라하게 작아져버린 개인적인 삶에서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쉽게 나의 삶의 주변으로 도망가고 싶다. 이 우울증에서, 이 비참함에서 멀리멀리 최대한 보이지도 않게 도망가고 싶다. 반듯한 모양의 선들과 푹신한 촉감들과 심리적이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그림들과 살고 싶다. 세상의 비참함이 심해지든 말든, 그것이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지만 않으면 되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그렇게 살아야지 하고 다짐을 하다가 또 머뭇거린다. 매트릭스 세상 속에서 내가 누리고 싶은 것들 모두 모아 놓고 여기에 눌러 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 비참함의 구렁텅이에 내 이웃이, 내 가족이, 그리고 내가 있다. 그 가운데서 울고 있는 내가 있고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은체로 운명을 운명으로 받아 들이는 나의 아이들이 있다. 지식은 무서운 것이다. 정보는 사실을 모아서 알려주지만 지식은 그것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구별지음의 역사가 누군가를 왕으로 만들었고, 누군가를 하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차별의 역사가 어떤 사람들을 제국의 원로로 만들고 어떤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것을.
자본주의는 피할 수 없다더라. 사람들이 그러더라. 자본주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이라고. 어쨌든 인간의 삶은 자유와 선택에 따라 달라지고, 무엇을 내 놓으면 무엇을 가지게 된다는 교환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돠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해주면 그 다음에 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과도 딜을 하고 있는 인간성의 근본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어떤 것을, 행동을, 마음을 준 적이 있을까? 생각컨데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럼 나는 인간의 본성에서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인 걸까? 오히려 반대라면 그럼 인간은 주면 받아야 하고, 내가 힘이 세면 누군가를 지배할 수 있고, 내가 많이 가지고 있으면 텅텅거리는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일종의 비참함'은 인간의 본성일까?
역사를 두세바퀴 돌아서 다시 이 자리에 선다. 생각을 여러번하다보면 지구도 여러바퀴 돌지만, 내가 알고 있는 역사의 수레바퀴도 여러번 돌려보고선 이 자리에 다시 앉는다. 자본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인간의 사회를 만들기도 전에, 계약에 의해서 인간의 이기심을 법에 종속시키기도 전에. 인간은 무엇이었을까? 그 때도 인간은 비참함을 경험하고 있었을까? 그 때도 아무런 허영이 없이 내가 더 잘하니깐 저 사람보다 더 낫고, 내가 더 많이 가졌으니깐 이정도는 해도 된다고 생각했었을까? 괴로운 것이다. 세상의 비참을 생각하다가 그 비참함의 원인을 살펴보는 시간들은.
나는 누군가를 도우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비참함을 나가는 방법을 알고 싶은 것이다.
이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고 싶은 것이다. 몇가지 느낀 것은 그 것을 나가는 방법은 다 같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갈등선을, 구별선을 지워버리고 함께 이 비참함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남겨두고 온 누군가가 생각나서 나는 다시 우울증에 걸릴 것이다. 요즘은 자기만 구원받고, 잘 살고 있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더 얄밉더라. 그 비참함에서 벗어나서 참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오히려 그렇게 구별짓기로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다가 갈 것처럼 하면서 좋은 건 다 해보고 싶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것보다는 무엇인가 바꾸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는게 더 낫다는 생각을 해본다.
혼자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 같을 때, 외롭다. 처절하게 외롭다. 그 외로움은 비참함 속에 들어 있으면서도 심지어 나갈 수 있으면서도 나갈 수 없어서 외롭다. 새롭게 태어날 아이들, 그 맑고 깊은 눈망울과 가느다란 손가락에도 가난이 배어들고 상처가 깊이 페어서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이 자리를 뜨지 못한다.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게 당장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깐 더 외롭고, 우울하다.
나는 왠만하면 긍정적이고 포기는 잘 안하는 편이다. 내가 이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일은 어쩌면 내 인생이 끝날 때까지 힘들지도 모른다. 아닌 척 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이 세상의 비참함을 맛 본 순간 나만 잘 살 수 없고, 나만 이 비참함에서 떠나 있는 것처럼 살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을 늘리기로 했다. 내 때가 아니라도 어느정도의 시점이 지났을 때 누군가가 함께 이 비참을 끝내버릴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도록. 그럼 생각이 달라지기는 한다. 그럼 무엇을 남겨야 할까? 어떤 걸 도전해야 할까? 이걸 해보니깐 안되고, 이건 인간의 본성에 기반한 것이고, 이건 해보니깐 몇년 정도로는 안되는데 한 100년정도 하면 되더라.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