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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pr 13. 2021

영국과 미국의 행정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달했는가?

공공정책과정

I. 영국 행정은 어떻게 발전했는가?


0. 들어가기


영국은 역사적으로 예외국가였다. 유럽대륙과는 떨어져 있는 섬나라로써 상비군이 필요 없었는데 그 이유는 대륙에 비해서 전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있다고 하더라도 내전에서 소규모의 전투가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지정학적으로 고립된 요인이 관료제의 발달을 저해했는데, 절대왕정이 발달할 필요가 없었고 대의기관이나 사법기관은 치리를 위해서 존재했지만 체계적이지는 않았다. 국왕이 대규모의 전투를 준비할 필요가 없었음으로 조세를 통한 제정을 확보할 필요도 없었다. 대신에 의회가 해군과 상비군을 위한 조세를 부과하기는 했다.


섬나라이기 때문에 해군은 일찍히 발달했다. 물론 전쟁의 기능을 수행하기는 했지만 가장 큰 기능은 무역이었다. 선박의 건조에 유지에 대한 비용 지출이 많았고 군사력을 유지하거나 창설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매우 낮았다. 따라서 조세부담이 낮았기 때문에 조세저항이 낮았고 이에 따라 대규모의 조세를 운영할 필여가 없었으므로 대규모의 관료제가 발달할 필요도 없었다. 귀족들은 군사적으로 힘을 모으기 보다는 상업활동에 지붖하였고 이에 따라 상업이 상대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절대군주정이 아닌 의회중심의 국가가 된 것이 이러한 역사적 경로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유럽은 역사적으로 대규모의 군대가 필요하고 국가간의 전쟁이 잦았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상비군과 관료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왕권이 강화되었고 의회는 약화되었다. 영국은 그 반대로 의회의 기능이 매우 강하게 만들어지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중세시대에도, 절대왕정시대에도 국왕이 의회의 동의없이 법제정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영국의 젠트리


1. 의회의 발달


중앙집권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지방정부가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 지방정부는 지방자치의 핵심은 '젠트리'계급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대부분의 사무처리는 지역정부가 담당했고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의기관이 발달했다. 대의 기관은 조세의 부과 혹은 입법기능은 국왕과 공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젠트리계급이 오늘날 젠틀맨이라는 귀족의 이름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Ertman은 1997년 신분제 의회의 구성에 대해서 분석하였다. 지역대표성을 띠게 되면 양원제로 보통 구성된다. 양원제는 귀족원house of Lords으로 대표되는 상원을 가지고 있고 평민원은House of Commons 젠트리 계급과 도시주민, 재산소유자를 대표하게 되었다. 영국의 신분제 의회는 그 자체로 의회의 기능이 세분화되고 강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원제는 다시 말하면 지역대표성을 중심으로 그 나라의 역사가 흘러왔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반면에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은 삼부회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귀족과 성직자, 도시주민의 세가지 원으로 구성된 이유는 왕권에 대립해서 효과적으로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의 무적함대는 사실 상업적인 욕구가 발달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보통 양원제는two-chamver는 영국, 폴란드, 스칸디나비아 국가가 대부분이고 이것의 의미는 지역정부가 강하였고 의회의 힘이 왕권보다 강력했으며 절대왕정의 특징인 상비군과 조세제도, 관료제가 약했다는 것을 뜻한다. 반대로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에는 강력한 군주제에 반대하기 위해서 삼부회의제tricurial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상비군, 관료제, 절대왕권을 뜻한다.


우리가 이러한 흐름을 알아보는 이유는 '역사적 제도주의'의 관점에서 '비교행정학'을 하기 위함이다. 각국가의 행정제도가 다른 이유는 역사적인 경로가 있다는 것이고, 제도가 독립변수가 되기도 했다가 종속변수가 되기도 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하면 각국가별로 행정이 발달하는 이유와 세계화 시대에 무역과 협상, 정책믹스나 정책이전을 할 때 제도적 상보성을 고려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영국의 지방정부, 의회중심의 국가운영은 신분제 의회를 가지게 되었고 1688년 명예혁명, 1689년 권리장전과 같이 왕권의 힘이 강해지려고 할 때 의회를 중심으로 다시 그 세력을 누르려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명예혁명이라는 이러한 관점에서 의회의 권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헌법은 희ㅚ의 동의없이 왕이 군대를 육성할 수 없도록 만들었으며, 재정은 의회의 동의없이 세금을 부과할 수 없고 카톨릭교도는 국앙이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영국은 다라서 정치적, 법적 의미의 국가the state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대표성을 중심으로 하는 common welth라는 개념ㅇ르 사용하낟. 국왕은 존재하지만 행정권executive power는 의회가 가지게 되었다. 의회와 연결되어서 국민이 행정권과 연결될 수 있었다. 이것이 제국주의시대가 되면서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게 되나면 내치에 있어서 조세저항에 있어서 의회를 통한 정치적 지지를 확복하게 되고 합의형성이 되면서 빠르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민주성은 전쟁을 하기 위한 효과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원인이 되었다.



영국의회의 발달은 지방정부의 발달과 연결되어 있다


2. 행정의 발달


유럽대국이 행정국가로 발전하는 시기가 17세기라면 영국은 뒤늦게 19세기에야 행정이 발달하게 되었다. 지정학적인 요인이 가장 컸고 상비군이 없었던 이유, 조세부담이 적었기 때문에 이것을 운영하는 정부가 작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영국의 공무원수가 6만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프랑스는 45만명이었다고 하면 말 다하지 않았는가?


명예혁명은 의회가 관료제를 압도하였기 때문에 관직 임용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관직에 대한 의원의 소유권도 인정하였다. 따라서 의원과 친한 사람들이 공무원이 되는 엽관제가 성행하게 되었다. 이것은관료제 혹은 행정의 비효율성을 가지고 오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관직의 매매와 엽관제의 지속, 낮은 급여를 가지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역사적으로 축적되면서 행정개혁에 대한 요구가 커지게 되었다. 그럼 엽관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할까? 당연히 공개경쟁시험을 통해서 실적중심, 능력주의가 도입되었다. 엽관제는 폐지되고 관료제 개혁과 교육개혁도 마찬가지로 연계해서 요청되었다.


이당시 노스코트-트레빌리안 보고서가 발행되었다. 1854년 노스코트Northcote, 트레빌리안Trevelyan은 행정조직에 관한 보고서 Report on the Organisation of the Permanent Civil Service를 제출하여 경쟁시험에 의한 채용, 실적에 의한 승진, 지적 업무와 기계적 업무의 구분, 중앙집권적 급여체계를 주장하게 되었다. Civil Service라고 보통 부르는 영국의 관료제는 동인도 회사나 민간고용인이 군대 고용인과 비교애서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정부의 서비스를 말한 것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1870년 글래드스톤Gladstone 총리 취임 이후에 보고서를 수용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크림전쟁에서 경험한 영국 군대의 비효율성이었다.


브레이브하트가 나오게 된 이유가 있다. 절대군주정이 아니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여기서 부터 이제 문제가 생긴다. 구조를 바꾸기 위한 젠틀리계급들은 공개경쟁제도를 통해서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엽관제의 특권을 허물려는 노력으로 인문교육liberal education과 공립학교출신으로 제한한 것이다. 그래서 이때 당시의 공립학교였던 Oxford와 Cambridge가 젠트리들이 계급을 상승시키는 관문이 되었다. 당연히 대상은 귀족과 젠트리 계급의 자녀였으며 표면적으로는 공개채용제도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귀속적인 결과가 나오게 된다. 이것이 바로 마이클샌들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다루고 있는 구조적으로는 불공정한데 표면적으로는 공정한 것과 같은 착각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비판한 부분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관직을 독점하고 있던 귀족과 젠트리계급은 1870년의 행정개혁을 지지하게 되고 1867년에 두번째 선거권이 도시 소시민과 노동자로 확대되면서 귀족과 젠트리 계급은 확고하게 고위공직을 독점하게 되었다.


행정개혁은 대학개혁과 그래서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영국은 귀족과 젠트리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는 과정으로 중산층이하는 배제되었다. 반면 프로이센의 경우 관직을 독점하고 있던 융커 계급에 대항해서 중산층이 권력을 잡게 된다. 독일의 경우에는 대학이 지역마다 하나씩 생기면서 대학도시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적인 과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문교육 혹은 일반상식을 강조하는 것은 일반행정가genelralist 위주의 행정제도화가 이루어졌고 정책에 대해 일반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훈련받고 사회화되었으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젠트리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실버맨은 1993년에 이러한 과정을 정리하여 두가지로 정리하였다. 문제해결이 전문지식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상상력과 이해력, 논리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인문교육은 마음을 교육하는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II. 미국과 행정의 발달


1. 또, 예외국가?


미국은 신기한 나라이다. 유럽의 경우에는 국가와 관료제가 성립한 이후에 산업화가 되고 민주주의가 제도화되었다면 미국은 민주주의가 먼저 만들어지고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면서 국가 관료제가 발달하는 과정을 경험한다. 이것은 국가형성에 있어서 시점과 순서, 경로의존디 뒤바뀌는 아웃라이어(특이점)를 보여준다.


사실 미국 혹은 미합중국은 영국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독립전쟁 이후에는 국가의 권위는 급격히 저하되었으며 1784년 미국의 인구가 4백만에 상비군수가 700명도 안되는 과정을 겪었다. 당연히 조세와 상비군, 관료제가 없는 국가였다.


미국이라는 국가를 기초한 Founding Fathers들은 자의적으로 국가권력이 발생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제도를 설계하게 된다. 양원제 의회와 함께 입법, 사법과 행정의 견제와 균형을 만들기 위해서 연방제를 구성했다. 역사적으로는 군사적 갈등과 전쟁이 없었고, 봉건제와 전통적 귄위도 없었으며 넓은 영토와 폭넓은 기회가 자연적으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만들어내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의 제도화는 개인주의가 강조될 수 밖에 없었다.


극도의 분권화extreme decentralizaiton은 고도로 발달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정당중심으로 선거 민주주의electral democracy가 발달하게 되었다. 독립전쟁 이후에 식민지들은 정치권력이 분산되는 과정을 거쳐서 정부의 통합성과 질서를 정당과 법원이 담당하게 되었다. Skowronek은 1982년에 19세기 후반까지 법원과 정당의 국가라고 할 정도였다.


19세기 미국은 법원과 정당이 국가를 대체했기 때문에 예산결정과정에서 유일하게 정당이 그 권한을 가지고 잇다. 유럽의 의회제 국가는 행정부가 예산을 편성하는데 반해서 미국은 완전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전통과 방법으로 운영되는 제도를 가지고 와서 우리 나라에서 의회가 예산결정과정에 전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된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만들어 놓은 미국의 민주주의는 오히려 다른 결과를 가지고 온다


2. 미국의 관료제


미국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민주주의가 먼저 발달하고 자본주의의 발달이후에 관료제가 발달하게 된다. 당연히 민주주의 방식으로 정당들이 운영되면서 관료제를 도입하기는 했지만 활용하거나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이러한 흐름에서 1828년 Jackson대통령은 '엽관제'를 공식화한다. 이러한 논리는 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자신의 상황을 적용하여 오히려 추천제가 평등사상에 부합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직기회를 부여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엽관제도는 4년단위로 공직을 임용하면서 특정직무에 공무원을 임용하는 관행이 제도화된다. 이것은 스페셜리스트로서 경력을 중심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것과 다르게 정부교체에 따른 주기적인 혼란이 발생하게 되었고 무능한 행정과 공직에 대한 뇌물과 로비가 심각하게 많아진다.


문제가 축적되면 누군가는 바꾸려고 한다. 그래서 엽관제를 실적주의로 바꾸려는 1883년의 펜들턴법Pendleton Act가 등장한다. 이것은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한 정치인들의 전략적 선택의 겨로가였고 1880년 태동령 선거에 공화동의 가필드 대통령과 1882년의하원선거에서 민주당이 장악하면서 실적주의를 도입하게 된 것을 말한다. 일정수준의 공직유지가 가능한 실적주의는 정치적인 계산을 통해서 행정개혁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행정의 개혁은 백악관을 탈환하려는 민주당의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직무에 기초한 인사행정의 기본틀은 그대로 유지하였고 엽관제와 마찬가지로 공직을 경력이 아니라 직무로 정의하는 경로가 동일하게 만들어졌다. 이것은 정치적인 의지가 투입되는 경로가 되었다. 노스코트-트레빌리언 보고서의 영향으로 경쟁시험이 도입되었으며 실용적인 실험이었다. 직위분류제에 따라서 앞으로 수행해야 할 직무가 요구하는 능력을 테스트하는 시험이었으며 정부와 민간부문간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는 직위분류제가 도입되었다. 연방공무원들은 경쟁시험을 통해서 1910년에는 10%였지만 1930년대에는 75%가 되었다.


고담시티는 뉴욕시정이 당면했던 문제들을 진보주의의 차원에서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내포한다


3. 과학적 관리기법의 등장


다시 생각해보자. 미국은 민주주의가 먼저 발전하고 그 다음에 자본주의, 그 다음에 관료제가 발전하면서 관료제는 자본주의의 형태를 닮아가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기업이 운영하는 형태를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은 과학적 관리기법이 테일러의 의해서 발전하게 되었는데 효율성의 복음the gospel of efficiency과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전문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치와 행정이 분리되어야 하고, 과학적인 관리기법을 중심으로 정치행정이원론politics administration dichotomy가 나오게 된다. 기업을 닮은 관리기번인 신공공서비스론이 나오게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행정개혁은 연방정부가 아니라 시정부의 역할이 된다. 시정부에서 진행한 행정개혁이 연방정부로 확산되었고 1921년에 Budget and Accounting Act가 발의된다. 1902년에는 정부직접지출의 3/5는 지방정부 지출이었다. 국방과 관련한 지출은 제외되었다.


진보주의 운동도 이때 등장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사회개혁운동이었다. 1907년에 뉴욕시정연구소New York Bureau of Municipal Research는 유럽으로부터 대규모의 난민이 발생하면서 사회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 행정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진보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도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기업에서 하고 있는 과학적 관리기법을 가지고 온 것이다.


시큐러스대학교의 맥스웰스쿨이 미국행정학의 기초가 된다


과학적 관리기법은 MBO, 성과주의, 목표달성 측정이 중요한 KPI를 사용하게 되었다. 시정부가 하는 일이 기업과 유사했기 때문에 소방, 쓰레기 처리, 상하수도, 도로보수 등의 일상적인 것들을 과학적 관리기법의 의해서 처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시정부의 산출물은 측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과학적 관리기법은 정부가 하는 일을 잘게 쪼개어서 각각 직무가 하는 일과 이를 위한 자격요건을 연구하게 되었고 이것이 추후에 미국 인사행정의 기초가 되는 직위분류제가 되었다. 행정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제고하고 책무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은 바로 예산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흐름에서 품목별 예산제도line-item budgeing이 도입되었다. 시정부 차원에서는 커다란 정치적 고민 없이 이미 주어진 목표를 가장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방법만 강구하게 되었고 정치란 미국행정학에서는 정당정치를 의미하게 되었다.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정치의 본질적인 부분은 행정의 상호작용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과학적 관리기법의 창시자인 테일러


미국행정학은 과학적 관리기법을 기반으로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행태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허버트 사이먼에 의해서 주장되는 것처럼 과학적 방법론은 보여지는 것, 측정할 수 있는 것만 성과로 인정하게 된다. 행태주의 패러다임에 의한 경험적 연구는 사회과학적 지식체계에 기반한 행정학이 발달하게 되고 전세계적으로 행정학의 발달에 기여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것은 예외적인 현상이었고 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정치행정이원론의 상황에서 행정으로 기업을 닮은 행정이 과학적 관리기법과 만난 예외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행정학은 결론적으로 다원주의pluralism이다. 이것은 기술craft로서의 행정의 의미가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개인으로서 관리자public manager의 의미가 처음부터 부각된 것이었다. 뉴욕시에서 시작된 행정개혁은 연방정부차원에서 삼권분립과 결합되어서 개인주의적 국가제도들이 발전하게 되었다. 정부의 역할은 최소한이 되면서 개인주의와 자본주의가 미국행정의 주용한 변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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